왜국(倭國)이 왜곡시킨 원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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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倭國)이 왜곡시킨 원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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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한민족혼의 본거지 두더지굴로 전락?

^^^▲ 원구단의 원형 그림사진(Mestimes)^^^

일제 때 생긴 한국 혼 말살의 사적지 현장이, 수도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장사꾼이 범람하는 심장부에 있다.

사적제157호인 원구단(窩丘壇-서울중구소공동87-1) 이 거기 있다.밑둥이 두더지 소굴처럼 뺑뺑이 지하주차장으로 둔갑됀채 쓸쓸이 방치, 대한제국의 국태민안을 기리던 그 때를 머금고 그렇게 거기 서있다. 국민의 자존심에 먹칠을 해도 누구 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물론 일제다. 바로 그 일제가 원구단을 크게 훼손시켰다. 지금 논란이 되는 광화문 그 1395년 창건된 문의 세월을 지나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한 1913년 그들에 의해 원구단이 철거됐다. 그 자리에 다음해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됐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 있다.

원구단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즉위식을 마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역사적인 장소로 사대문 안의 명당으로 꼽힌다. 소유는 국유. 1967년 7월 15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Mestimes는 3.1절을 이틀 앞둔 27일 '역사교훈실천 시민운동연합'의 정준영 대표와 '우리말과 예절찾기 운동' 대표 최훈영, 두 분을 모시고 옛사진을 중심으로 현장을 답사했다. 겹겹으로 지하 차도와 상가를 뚫어 마치 불법 건축물의 경연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이 괴로운 역사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정준영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한다. 일명 원구단 (圓丘壇) 또는 줄여서 원단(窩壇)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지신(地神)에 제사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방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고대 중국의 전통적인 의례와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이에 최훈영씨가 덧붙이기를, "우리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됐으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됐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 에 의하면 "고구려·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 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미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성종 2년(983) 정월조에는 "왕이 圓丘에서 祈穀祭를 올리고, 몸소 籍田을 경작했다"는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천자국인 중국과 다름없는 제도로 시행됐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禑王) 11년(1385)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당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 나가던 중이어서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됐다.

조선초 제천의례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신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에 실시된 원구제(園丘祭)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했다.

조선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됐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됐으며, 문헌에 보이는 원단의 위치는 오늘날 한남동ㆍ보광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하여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건립지를 선정한 후 단(壇)을 건립했다.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았고, 10월 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이 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만행을 부려 1913년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철도호텔(현재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 현재의 원구단과 원구단의 원형 그림^^^

현재 이곳에는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 자리에 황궁우(皇穹宇)의 팔각당(八角堂)과 돌로 만든 북인 석고(石鼓) 3개가 남아 있다. 팔각당 건물은 광무 3년(1899)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건물이며, 이곳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고, 익공계 건물로 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잡한 장식이 있다. 또한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한국사학)는, "일제강점기 왕조의 유산이 무참하게 파괴된 것이 어찌 한둘인가. 그런데 대한제국이 자주독립을 위해 몸부림쳤던 유적처럼 철저하게 파괴된 것도 없다. 제국의 법궁이던 경운궁이 그렇고,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항쟁하다가 산화한 영혼들을 위해 지은 장충단이 그렇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황제가 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의 처참한 모습"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이어, "자주독립의 상징인 원구단을 일본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래서 1914년 총독부는 황궁우만 남기고 제단인 원구단을 헐어 그 자리에 철도조선호텔을 지었다. 이때부터 황궁우는 조선호텔 후원의 장식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광복 후 조선호텔은 더욱 우람한 건물로 개축됐다. 그 주변에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황궁우가 어디에 있는지, 원구단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호텔을 찾는 인사들은 호텔에서 세운 옛날 정자쯤으로 알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국유지의 일부가 어떤 경유를 거쳐 '삼성생명'의 땅이 됐는지 기록이 없다. 등기부와 토지대장 상에는 '공개불가'의 낙인이 찍혀있을 뿐이다. 서울시가 삼성생명으로부터 원구단의 시청 광장쪽 부지 소공동 97의 3일대 246평을 사들여 이곳에 보행통로를 내고 느티나무 등 70그루의 그늘목과 인공폭포, 화강석 기둥을 조성, 원구단을 내,외국인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명소로 꾸며 놓았다.

원구단 둘레 난간은 지금 군데군데 균열이 생겨 언제 붕궤될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대한제국 그 민족의 혼이 서린 원구단이 왜 통곡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알 수가 없다는 사람이 있으면, 서울시가 조성해 놓은 광장에 서서 건너편, 덕수궁 정문에 걸린 '大漢門'의 현편을 보면 된다.

그것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초대통감이 한국 혼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에 따라 지시해 당대의 명필 '남정철'로 하여금 본래의 '大安門'을 떼내고 붙인 판액임을 안다면 새삼 한맺힌 통곡의 뜻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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