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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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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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앞두고 필자가 협동목사로 있는 교회에 출석하는 여자 권사님이 2주째 몸이 불편하셔서 교회를 나오시지 못해 주일 오후 예배 후 교우 몇 분과 함께 심방을 간 적이 있었다.

그 권사님은 생각보다 더 야윈 모습으로 누워 계시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자세히 살펴보니 시선이 자꾸 딴데로 가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허공을 쳐다보는 것이다. 귀도 어두워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목까지 가누지 못해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런 권사님이 셋째 자식에게 얹혀 사는 것을 미안해하면서도 몇 해를 찾아오지 않는 못된 큰아들을 애타게 찾으며 헛손질을 자꾸한다. 오죽하면 그 얌전한 권사님이 큰아들 이름을 부르며 “죽이고 싶을 정도로 보고 싶다”고 욕을 했을까?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하고 아들들을 찾는 모양인데 첫째, 둘째아들들은 명절이 되어도 형제들 간의 불화를 이유로 팔순노모를 찾지를 않고 있다. 과연 그런 아들들이 자기 자식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키울까 걱정이 된다.

찬송가를 부르는데 잘 듣지도 못하면서 누운 채로 입술을 움직이며 손을 허우적거린다. 아마 평소에 찬송가를 부르며 손뼉을 치던 습관이 무의식 속에서도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애처롭기만 했다. 기도를 하면서도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그만 목이 메여 결국 흐느끼고 말았다.

이제는 아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진 권사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들의 손이라도 잡아보고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를 했다. 그런 간절함이 마음으로 통한 것일까 권사님이 내 손에 힘을 주고 꼬옥 잡는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서 어쩔까” “고마워요 목사님” 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늘 내차를 타면서 하시던 “목사님 왜 하나님이 이 늙은이를 안 데리고 가시는지 몰라요” 하며 “얼른 하나님 곁으로 가고 싶다” 던 권사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면서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날 저녁 난 베르나르 포르가 지은 “동양종교와 죽음” 이라는 책을 읽었다.

누구나 인간에게 있어 성장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겪는 게 몇 가지가 있다. 결혼하고 출산하고 또 직장에서 부대끼며 어느덧 젊음을 보내고 늙어서 임종을 하게된다. 누구든 태어날 때는 욕망을 갖고 싶어 두 주먹을 움켜쥐고 태어나지만 이 세상을 하직할 때는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두 손을 펴고 간다.

특히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죽음에 임박하면 눈물을 흘리는데 왜 우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나기 때문일까, 아님 이제껏 이루어 논 업적이 아쉬워서 일까, 어쩜 미지의 세계인 죽음이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시인 말라르메가 표현한 대로 ‘비방의 대상이긴 해도 전혀 깊지 않은 강’ 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현대인들이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내던져 버린 이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지옥과 낙원을 믿지 않게 된 것 같다. 오늘날의 죽음은 고독감과 무책임 속에서 무심히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어느 과학자는 죽음이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 체념하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바로 죽기 전의 정신이 어떤 상태인지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 할 수 없어 몹시 안타깝다고 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현상을 그때그때 녹음이나 측정을 통해 기록함으로써 죽음을 향한 인간의 실상, 인간의 정신상태를 과학적으로 입증 할 수만 있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고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얼마 전 주례를 선 신랑 신부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식을 출가시키며 흐뭇해하던 부모의 모습, 탄생의 기쁨, 결혼의 행복,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죽음의 슬픔, 모두가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태어나는 것과 죽음은 극과 극이 아닌 한 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병중에서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권사님의 모습이 며칠을 두고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무리 경기가 침체되고 불안해도 훈훈한 인정을 주고받는 미풍양속이 배척되는 등 우리의 마음까지 각박하게 만들 수는 없다. 이제는 시력까지 잃어 그처럼 보고팠던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권사님이다. 그러나 자식의 손이라도 만져보고 가슴에 쌓인 한(恨) 이라도 풀어야 할 것만 같다.

부친이 생존해 계실 때 효자 소리를 듣던 나였지만 몇 해가 지난 지금도 간혹 부친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형제간의 다툼을 이유로 늙은 노모를 찾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 할 것 같다. 부디 아들들이 권사님을 찾아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내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노모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그런 추석이 되었으면 한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선조들의 훈훈한 인정의 마음을 닮은 나눔을 통해 우울한 추억을 날려버리고 마음이 풍요로운 추석을 만드는 권사님의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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