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을 외우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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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단을 외우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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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목적의 암기는 사회악

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는 한국의 모 대학 여자 교수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미국인들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한국인이 영리한 원인 중 하나가 구구단에 익숙해진 때문이라는 점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은 유치원 어린이들도 구구단을 외울 정도라고 자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여줌으로써 칭찬과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런 모습을 여러 차례 지켜보던 어떤 교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미국에서 구구단을 외우게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여자 교수는 미국 교수의 질문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직감하고 되물었다. "그럼 구구단을 외우도록 하지 않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까?"

미국 교수가 다시 말했다. "김교수가 학생들이 구구단을 당연히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를 확인하는 의미로 물어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교수의 말대로라면 마치 미국 교육이 잘못이라는 의미이거나,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월등하다는 것으로 비약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미국 교수 : 첫째, 인간이 존엄한 것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구단의 원리는 누가 봐도 간단합니다. 그런데 어린이가 "2x2=4부터 9x9=81"까지를 입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익숙하게 외운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겠습니까.

학생들이 구구단을 암기하면 그만큼 생각할 시간을 빼앗긴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귀중한 시간들을 결과가 훤한 정답을 외우는데 소모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력을 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존엄성이 심각하게 손상 받게 됩니다.

특히 생각이나 시간이 자기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 집중되기보다 일률적인 사고나 행위나 정해진 정답에 맞추어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고 위험한 결과가 생겨버립니다. 만일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동기와 의식과 수준으로 교육을 받아버리면 교육의 역작용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사회 전반이 나약해지고 위험해집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일부 교사들은 구구단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우도록 시키지는 않습니다.

만일 학생이 구구단을 외우는 시간 동안 다양한 상상, 자기 삶의 의미, 세상의 궁금증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했다고 해봅시다. 이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인간의 삶은 9x9=81 이란 정답보다 9를 아홉 번 더함으로써 과정에 충실한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곧바로 정답을 얻어서 무엇 하겠다는 것입니까? 또한 남보다 좀 더 빨리 맞추거나 정답을 틀린 것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의미가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어차피 정해진 정답(결과)을 빨리 얻는 것보다 과정에 충실하면 결과(정답)는 자동으로 얻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미국 학교에서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정답만 맞추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정답을 맞추면서 풀이 과정에 충실한 학생에게는 100점이 만점이자만 150점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학에서 100점 이상을 받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는 정답도 중요하지만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충실한 것을 존중해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선생에 따라서는 비록 식이나 풀이 과정이 맞았는데 사소한 실수로 정답을 틀린 경우에는 1-2점만을 깎고 점수를 거의 인정합니다. 한국에서는 풀이가 아무리 옳아도 정답이 틀리면 0 점으로 처리하지 않습니까?

한국은 과정이야 어떻든 커닝을 해서라도 정답만 맞으면 끝나거나, 일단 부자만 되면 그만이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몸담은 사회에 대한 기여도도 없이 오직 단순한 방식의 공부와 점수와 정답으로 미래가 결정되어버리기 때문에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라는 비열한 속담 뿐만 아니라 실제 사회가 만들어졌지 않았습니까?

셋째, 개인 각자가 지닌 존엄성이란 너무나 다양하고 특이하고 절묘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모두가 동시에 쉽게 외우도록 일률적으로 가르치고 시간을 소모시키는 것은 선생의 역할이 초라한 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의식 성장에도 심각한 장애가 따릅니다. 이를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고 방치하는 교육 정책이나 국민의식 역시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모두가 함께 참여한 투자(공부)의 결과가 전체적인 보람과 결실로 집약되기는커녕, 모두의 능력이 미래를 위한 종합적인 잠재력과 창의력으로 연결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얄팍한 암기나 개인 실력(성적)으로 개인 우열을 가려서 커다란 대가까지 기대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는 한국이 개인적으로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어서 인생을 좌우했던 단순 사회에서 물려받은 후진적인 과거가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한국에서처럼 오직 개인적인 용도(시험)로 써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누가 잘 하는지 비교해서 우열까지 가려지면 오히려 교육이 사람을 망치게 됩니다. 때문에 겉모습은 교육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종 범죄, 패륜, 타락, 호화사치, 향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서로 엉켜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각자의 존엄성과 그 협력을 외면해서 사회와 인생과 역사를 자율적으로 만들고 향상시킬 능력이나 자질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한국과 같은 국민의식이라면 차라리 힘과 근면에 의존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농경지 사회 속에서 그럭저럭 먹고사는 편이 낫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서 단합된 존엄성이 창조적인 작품으로 모아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평생 세상을 함께 살아야 할 가장 가까운 철부지 친구끼리 인간다운 협조와 아름다운 관계를 배우기 전에 서로 경쟁하고 비교해서 우열을 나누는 것부터 익혀지면 차라리 배우지 않음만 못합니다. 물론 원인 제공에는 교육 정책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후진적인 국민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지도자로 나선 사람이나, 정치인과 공무원이나, 이를 비판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나 일반 국민들이나 모두 민주주의에 무능하고 자질이 떨어지는 도토리 키재기 수준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산적한 문제들이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이 정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서로 책임자도 연구하는 사람도 없이 비난과 분열과 원망 속에서 엉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넷째, 인간이 개인적으로 타고난 머리는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100자리 수 곱하기 100자리 수를 개인 머리로 풀어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설사 이를 푼 사람이 있더라도 수학이나 과학의 깊이로 따지면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아무리 계산이 빨라도 실제 계산 능력은 계산기보다 못합니다. 이는 구구단을 외우는 사람이나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엄청난 과학의 단위와 공식과 원리와 속도로 보았을 때는 지극히 하잘 것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수없이 많고 복잡한 계산과 공식과 원리들을 잘 활용하고 응용하는 능력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의 짧은 머리로 수학 문제의 정답을 풀고 맞춰서 점수를 받기보다 다양한 공식과 계산과 원리를 실제 목적에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현실적입니다. 특히 인간이 복잡 난해한 계산을 자기 머리로 기어코 풀려는 무의식 심리에서 이미 욕심과 이기심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미미한 인간은 답답한 자기 목적(자기 이익)보다는 다양한 원리를 응용하고 협력해서 더욱 큰 과제들을 해결(사회적 가치 실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섯째, 어떤 나라에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이 천만 명 정도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이웃 나라에는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은 별로 없지만 다양한 원리를 활용하고 응용하는 사람이 천 명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이 때 앞 나라는 점수를 잘 받고 취직을 잘하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선진국에 진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개인적 능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쉽게 선진국 진입이 가능합니다. 또한 다수의 능력이 떨어진 점들은 조만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국가적 안목과 가치는 외면 당한 채 개인적 목적에 그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식으로 개인의 생계보장이나 행복 달성이나 출세 도구로 이용하거나, 서로 비교해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등 과거 신분 위주에서 잠시 지식으로 도구만 바꿨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한국의 한계이며 한계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거의 모든 국민이 대학을 나왔지만 전체 모습은 점점 선진국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직장에 취직해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수학이나 과학이나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 어려우며 세계의 흐름과는 무관하거나 역행하는 현상까지 생깁니다. 이런 경쟁 구조로는 인간의 질적 가치와 아름다운 삶은커녕 순수한 존엄성 발휘조차 어렵습니다.

구구단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한국인의 우수한 머리를 너무 아까워하는 나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너무 근시안적인 목적과 욕심에 치우친 나머지 우수한 자질과 능력으로 전 세계를 이끌어가기보다 오히려 작은 승부와 돈벌이에 급급하며 서로를 무시하다가 함께 몰락하면서 망국으로 가는 것이 너무 답답합니다.

수학과 철학 등 학문은 기원전부터 생겨나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수준과 의식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정도와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교육은 분명 정책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러나 그 정책은 그 이전의 국민성이 반영 집약되어 만들어집니다. 때문에 문제가 보이면 정책을 원망하게 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한 의식수준이기 때문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국민의식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부작용을 당하면서도 책임전가나 원망과 분열과 구경꾼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겪어본 한국인들은 구구단을 외우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자랑처럼 여겼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은 구구단을 외우느냐 외우지 못하느냐에 의해 부모에게 꾸중을 듣거나 스스로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수준에서 형성된 것이 한국의 국민의식이며 총체적인 국민성의 실상입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구구단이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폐해는 보통으로 심각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국민의식의 건전한 기반을 말살시켜버린 요소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남이 해놓은 것을 머리로 쉽게 얻기만 해서 편히 먹고살고 출세까지 하려는 지극히 단순한 국민의식의 대가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한국은 아직도 일반 서민들을 제외하면 봉사정신이 지극히 희박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대통령들조차 임기가 끝나면 과거 경력이나 공적에 연연하지 않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자세로 자기 가치 발휘를 위해 봉사하고 노력합니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이 과거에 얻어진 간단한 결과(외우기, 점수, 학벌)로 호의호식과 출세는 물론이고 미래의 우위까지 확보 점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어리석으며 어떤 면으로는 모두가 미개한 의식이거나 죄악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과거의 성과로 미래를 좌우하겠다는 생각이나 그런 사회 구조나 조직의 시스템이 바로 기득권 의식이며, 기득권 사회이며, 기득권 문화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기득권 세력은 일부일지 몰라도 기득권적 사고나 습성은 전체 국민이 거의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시간이 흐르고, 인물이 바뀌고, 지식을 동원하고,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도, 결국은 한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지금도 한국에서는 각종 문제를 보면서도 총체적인 원인 분석이나 실질적인 대안 없이 잘못만을 따져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부작용과 잘못과 병폐가 누적되고 쌓여서 엉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한국에 상주하는 동안 나를 아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배우거나, 반성하거나,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나와서 곤란해지면 변명과 합리화와 감정적인 자존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대화는 진행도 못했습니다.

나는 그간 많은 한국인들을 가르치며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열심히 가르쳐주면 오직 자기 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2년에서 16년을 머리로 받아들여서 알기만 하는 교육을 받았으며 그런 앎으로 곧바로 자기가 얻을 이익(점수, 대학, 취직, 결혼, 출세)과 연결시키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교육은 빵과 직업을 위해 지식으로 무장시키는 위험한 교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식과 앎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항상 안타까웠습니다. 심지어 진실로 반성하고 서로 해결 방법을 모아야 할 상황에서 더욱 더 개인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때문에 나와 오랜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엉뚱하게도 정치인이나 공무원을 비난하거나, 갑자기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들먹이거나, 시간이 필요하다며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이런 태도는 사회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관심과 책임과 의지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나라의 주인이 왕이었던 왕권주의에서 마치 평민이나 머슴처럼 살아버린 이유로 생각합니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생활에서 노예근성까지 얻어버린 이후 강대국의 탓만을 해왔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다수 국민들은 마치 구경꾼처럼 귀찮고 피곤한 것은 싫다면서 이익만 되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공격과 비난과 불신과 원망은 적극적이면서도 책임과 연구와 반성에서는 구경꾼이나 방랑자 같은 이중적인 모순과 위선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간 나를 거쳐갔던 한국의 지식인들이 한국에서 과연 어떤 자세와 태도로 임할 것인지는 보고 듣지 않아도 이미 눈에 훤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내가 아무리 강조해주어도 반성하는 기색 없이 오직 머리로만 받아들여서 자기 무지 해결, 자기 지식, 이익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한국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평소 생각과 대화 내용과 실제 행동이 전혀 이율배반적인 위선자 집단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나는 처음에 한국을 좋아했고 많은 애정을 쏟아서 충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눈앞에서 잠깐 동안의 태도뿐이었으며 진정으로 달라지고 개선된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최소한의 봉사나 기부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의 만남을 슬슬 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결국 한국인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고, 순위를 따지고, 우열감을 갖고, 꾸중을 듣거나 매까지 맞고, 능력으로 인정받고, 세력이 형성되고, 엘리트니 지식인으로 구분되는 등 기막힌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변명 한 마디 못한 한국인 여교수

한국의 여자 교수는 입도 뻥끗 못하고 듣기만 했다. 자신도 역시 다양한 변명과 합리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미국 교수는 한국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와 학문의 깊이와 세상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 정립이 너무나 명확하고 명료했다. 때문에 도저히 반론이나 변명이나 합리화를 할 틈새도 여지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이나 미국에는 세상과 인생과 자기 분야에 대한 포괄적인 애정을 바탕으로 월등한 철학이 동반된 교수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무의미하고 답답한 문제에서 훨훨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 평판과 유명세나 권위보다 미국이라는, 전 세계라는, 학문의 방향과 발전이라는, 지구의 장래와 후손들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대단한 역할과 책임을 동시에 수행해주고 있다.

한국의 교수들은 절대 책임을 지는 법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책임은 회피한 채 역할이나 주장하는 기회주의적 의식과 입장과 활동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솔직하게 피력하기 곤란하다. 그래도 지식인의 무능과 무책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인이 침묵하고 있어서 그나마 방법이라고는 침묵을 깨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의 미래는 지식인의 손을 떠났으며 이제 순수한 국민의 책임으로 넘겨졌다. 모두 함께 분발해서 십시일반으로 행동에 옮기자는 간절한 마음을 이 글에 실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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