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가장 큰 사랑은 '자녀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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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가장 큰 사랑은 '자녀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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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과 예의는 인간보다 하위 개념

어린이가 어른을 이해해줘야 하다니.

토요일 오후 아빠가 집에 혼자 있는데 '딩동' 아파트 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주니 4학년에 다니는 작은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아들은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거실 바닥에 팽개치고 방문을 ‘꽝’ 닫고 들어 가버렸다. 아빠는 아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평소에 아주 착실했으며 이처럼 신경질을 내거나 화풀이를 해본 일이 없었다. 아들은 3-4살 때 아빠에게 뺨 한 대를 맞아본 뒤, 단 한 번도 손찌검을 당하지 않고 자랐다. 또한 아이는 아빠 엄마와 어릴 때부터 서로 위아래를 구분하거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인격적 관계를 유지했다.

더구나 큰아들이 미국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더욱 형제나 친구처럼 지냈다. 이런 사실은 친척이나 주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이런 평등한 관계를 배우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아들에게 당황하게 된 아빠는 이런 생각들이 뇌리에 스치면서도 '주위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하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아빠의 귓가에 “오냐. 자식 놈을 그 따위로 키우더니 꼴 보기 좋다.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과 함께 비웃음이 스치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래서 아빠는 잠깐 동안 마음을 정리해서 가다듬은 다음 방으로 들어가며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아빠 : 멍식아. 학교에 잘 다녀왔어? 그런데 우리 아들이 웬만해서는 이렇게 화를 낼 사람이 아닌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을까? (등을 토닥이고 안아주듯이 자세를 취하면서)

아들 : (무응답이다가 손을 내저으며) 저리 꺼져.

아빠 : 알았어. 그런데 누가 너를 화나게 만들었어?

아들 : 필요 없어. (다시 손을 저으며)저리 가-.

아빠 : 그래. 알았어-. 그래도 말해봐라. 이렇게 착한 우리 아들을 누가 화나게 만들었는지. 친구들이냐? 선생님이냐? 말만 해봐 내가 혼을 내놓을 테니까. 누구야 누구 응? 지금 당장 쫓아갈까? 몽둥이를 찾아야겠다.

아들 : 됐다니까. 꺼져야. (옆모습을 보니 터지는 웃음을 감추고 있었다.)

아빠 : (더 기가 살아서) 우리 멍식이를 화나게 만들었다면 가만 둘 수 없지. 말해봐.

아들 : 됐어 빨리 꺼져라.

아빠 : 알았어 간다니까. 하지만 만일 네가 아빠라면 사랑하는 아들이 화가 났는데 가만히 있겠냐? 어디 무슨 일인지 한번 말이라도 해봐라.

아들 :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됐어-. 아무 것도 아니어. 내가 알아서 한다.

아빠 : 그럼. 너 혼자 생각하든 정리하든 해결할 수 있어?

아들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아빠 : 너는 충분히 너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도 남을 사람이지. 그래도 힘들거나 상의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을 해주라.

아들 : (약간 화가 풀리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알았어.

아빠 : 그럼. 나 안심하고 너를 믿고 밖에 있겠다.

아들 : 응.

아빠 : (나가다가 돌아서서) 초인종을 하나 사서 달아놓을까?

아들 :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으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왜.

아빠 : 네가 필요할 때 초인종만 누르면 내가 곧바로 대령할 것 아니냐?

아들 : (피식 웃으며) 됐어야. 장난치지 말고 빨리 꺼져라.

아빠 : 그래. 알았어 그럼 간다.

아들 : 응.

흔히 이런 경우 부모들은 '이런 건방진 자식' '부모의 은혜도 모르는 놈' '너를 키우려고 얼마나 고생하는데'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숨김없이 똑바로 말해봐'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재판관이나 해결사 노릇을 하기 쉽다. 그래서 '아이들 싸움이 어른의 싸움이 된다'는 속담도 있다.

특히 부모가 '자녀의 잘못된 성격은 어렸을 때 잡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때리거나, 벌을 주거나, 큰소리로 잔소리와 욕을 해대면 아이는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는다. 이렇게 되면 어린 자녀는 이후에도 자신에게 다른 사건이 생겨도 부모를 무시해버리거나, 아예 사건을 숨겨버려서 상황을 악화시켜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대화나 마음이 단절되어버리면 아이는 부모를 통해 효과적으로 배우고 깨우치지 못한 채 혼자 따로 놀면서 잃는 것이 많아진다. 또한 발생된 문제나 사건에 대해 부모가 해결한답시고 직접 나서서 개입하거나, 싸움까지 해버리면 아이를 더욱 망치기 쉽다.

왜냐하면 자녀가 자기 경험에 의해 스스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사고 체계와 수습 방법과 인간관계의 기본 틀이 질서와 체계를 잡지 못한 채 부모에 의해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특히 더 심각한 경우에는 자기 사고 체계나 분위기를 빼앗겨버린 채 부모의 간섭(이기적이고 일방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부모의 생각과 행동과 선택)과 지나친 보호, 복잡하게 빚어지는 타인들에 의한 관계 때문에 진지한 자기 생각과 행동 형성에 심각한 장애를 받는다.

이처럼 어른들의 간섭이 심한 가정이나 사회일수록 구성원이 가치관 위주의 자기 사고나 인생이나 사회분위기를 유지해가기 어렵다. 이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이며 우리 국민들도 대부분 이에 해당된다. 단란하고 오붓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거의 실패로 돌아간다.

설사 부모가 자녀를 때리지 않고 키우더라도 자녀들이 처한 삐딱하고 심각한 상황을 존중해서 적절하게 안내해주지 못하면 무심한 부모로 인식되거나,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 오해받는다. 어쨌든 아직은 순진하고 어린 자녀의 특별한 상황, 심리, 분위기, 의식에 적절하게 대처해주지 못하면 자녀는 인격상 문제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해본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이 때 아이는 이전에 비해서 더 용감해지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향상될 수도 있다. 이는 아이가 죽음의 경험과 상황과 자기 심리 등을 통해서 받은 자극과 반응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경험하고 이해하고 적응하고 판단하고 다시 사고하고 응용할 기회와 능력과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의 일에 함부로 개입해서 생각과 과정을 차단하고 방해하고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주입하고 강요하면 아이는 장애를 받는다.

마치 부모가 자녀의 죽음(위기)을 사실(결과)처럼 생각해서 법석을 떨거나, 위기를 맞게 된 이유나 관계나 상황을 부모 입장으로 문제 삼아서 처리하거나, 죽음에 따른 상황을 크게 부각시켜버리면 아이가 당한 경험 수습과 정서 발달에 장애를 받는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일생일대의 경험을 통해서 용감해지고 위기관리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한 공포심을 갖거나, 만일을 위해 칼을 소지하거나, 바깥 외출을 두려워하거나, 사실보다 부모의 꾸중이 더 무서워서 계속 당하고 살거나, 빗나간 선입견을 가져버릴 수도 있다.

때문에 단 한 번에 불과할지라도 부모가 자녀를 함부로 취급해버리면 자녀는 부모와 함께 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든지, 마음의 문을 닫고 부모의 단순한 마음과 언행을 미리 짐작하고 감안해서 적당히 관계하든지, 적어도 자녀의 무의식에서는 부모를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버린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진심과 진실과 허심탄회한 관계에서 멀어져버린 셈이다. 어쩌면 자기 자녀의 그 당시의 그 상황이 자녀의 일생 중에서 부모의 이해와 도움이 가장 절실한 때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평소에 사랑과 은혜와 관심을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그것은 일상적인 관계이며 부모 자식 간의 당연한 정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자녀의 철부지 습성과 잘못을 모두 받아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든 순진하고 어린 자녀가 세상 속에서 힘들고 화나고 답답하고 고민스러울 때 비로소 구체적인 대응과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물씬 풍기는 자상한 안내, 합리적인 철학이나 방안 제시, 유심히 지켜보는 인내심이 발휘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부모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성공에 바빠서 진실한 가정생활이나 관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부모들조차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해주기를 바라면서 성적이나 대학이나 취업을 위주로 생각할 뿐 진지한 인간관계,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는다.

자녀가 부모의 뜻에 충실해야 하는 도리, 은혜, 관계, 미덕, 사랑은 평상시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 논리다. 그러나 자녀에게 특별한 문제나 감정이 생겼다면 이는 새로 생긴 변수 즉 특수 상황이다. 예를 들어서 아빠나 엄마도 바깥에서 기분 나쁜 일이나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어린 자녀들도 부모에 대해 함께 걱정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아이들은 밖에서 별의 별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순진하고 어리석고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 고통, 긴장, 두려움, 공포 등을 느낄 수도 있다. 이 때 부모나 어른들이 어린 자녀가 피해의식에 머물지 않고 발랄하게 성장하도록 진지한 관심을 보이며 따뜻하게 배려해야 하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위에서처럼 아이에게 중요한 상황임에도 일반 논리를 적용할 정도로 답답한 부모일수록 심리적으로 자기 무지를 인정하기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자기 무지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시키거나, 귀찮게 여기거나, 미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만회까지 하기 위해 비슷한 무지나 순진함이나 나약함을 상대로 억지를 부리면서 강요도 한다.

이는 화가 난 주체인 자녀에게 반대로 자신이 화를 내거나, 매질을 하거나, 무릎을 꿇도록 해서 벌을 세우거나, 심한 모욕감과 함께 잔소리하는 등 결국 자기(어른) 성질로 분위기가 바뀌고 만다. 결국 아빠에게 화를 내고 버릇이 없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서 다시 아빠가 더 큰 화를 내는 모순을 저지른다. 이는 사실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겪는 혼란이고 모순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그래서 이 아빠는 화난 아들이 방에서 나왔을 때 아들이 대화를 필요로 하는지를 살며시 떠보았다. 그런데 아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빠는 아빠(함께 옆에 있는 사람)로서 아들(상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만큼만 관계를 해준 채 아들이 원하지 않는 범위까지 침범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

왜냐하면 아들도 아들만의 프라이버시가 있을 것이며, 당당하게 지킬 줄도 알아야 할 것이며, 아들도 비밀을 지킴으로써 다른 누군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있는 줄도 모르며, 어쨌든 반드시 존중해주는 것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옳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자기 자녀의 일을 샅샅이 확인하고 간섭하려는 부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부모는 문제가 터졌을 때야 적극적인 것처럼 나설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진지한 자세로 애정과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다. 만일 이런 부모는 문제가 발생되면 진지하고 냉정한 태도로 자녀의 심리 상태와 변화 발전을 위주로 관심을 기울여주게 될 것이다.

이 아빠는 아들에게 한 마디를 추가하고 넘어가기로 생각했다.

아빠 : 멍식아. 조금 전에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잘 풀었니? 내가 너에게 제대로 역할을 해주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네가 아빠였더라면 너는 훨씬 더 잘 대처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네 스스로 알아서 마음을 풀어버린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특별한 문제없이 잘 끝난 것이지?

이후 아들은 몰라보게 빨리 어른스러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화를 내는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아빠는 주변 사람들에게 '설사 자녀가 어리더라도 존엄한 인격체로서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부모들은 스스로를 생각해보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나 훗날 자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결국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아빠는 '자기 자녀를 존중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심으로 존경해야 한다'라고 말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람이 순진하고 어릴 때는 자기 몸만 제대로 가누어도 다행이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 사회의 일원(구성원)으로서 질서 교육과 약자를 돌보는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어린이가 아직 어른들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대인을 관계하는 것(표현, 태도, 마음가짐)을 어른의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가르쳐놓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정신적인 세뇌를 당하거나 정서에 장애를 받고 굴절된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 관계에 불과한 예절과 예의를 주입시키고 강요하고 꾸짖는 것은 사람을 망치는 짓이다. 수많은 성격의 사람들과 다양한 상황들, 분야들, 분위기, 업무, 소신, 철학에 관계없이 단순히 어른을 따져서 특별한 생각이나 태도나 방식을 정해놓거나 이를 위한 행위나 예절이나 도리를 주입하고 강조해놓으면 인간 존엄성의 근본 뿌리가 꺾여버린다.

이는 사회라는 전체적 안목보다 겨우 개인을 상대로 눈치를 살피거나, 처세하도록 하거나, 쉽게 복종하게끔 일부 구성원과 일부 사회가 빗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존엄한 인간으로서 뚜렷하고 자신에 넘치는 자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근본 의식구조와 자질에서 무지하기 때문에 법과 제도와 지식과 유학과 박사학위를 받아도 결국 그 나라 국민성 수준 이상으로 월등한 것은 아니다.

만일 지금 동남아시아 어떤 나라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서 지식이 들어가면 그들은 민주시민이 되는가? 그들이 그럭저럭 50-60년이 흐르면 자동으로 민주주의 시민이나 선진국의 시민의식이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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