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대 조상우 교수, 한국 골프코스 도입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 발표(3)
호서대 조상우 교수, 한국 골프코스 도입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 발표(3)
  • 양승용 기자
  • 승인 2013.04.0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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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포 소래해수욕장과 구미포 골프코스

▲ 뉴스타운 골프 자료사진

한국골프사에 있어서 구미포 골프코스에 대한 기록이나 자세한 내용은 남아 있지 못하다. 대한골프협회(2006)에 따르면 “영국인 선교사들이 외인촌을 조성하고 살았고, 그들의 휴양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골프를 즐겼다고 추측도 가능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휴양지는 바로 황해도 구미포에 있던 구미포해수욕장이다.

구미포는 황해도 장연군에 위치한 포구로 이곳에 구미포 해수욕장이 있었다. 구미포해수욕장은 ‘Sorai Beach’, ‘소래비-취’라는 양명(佯名)과 ‘구미포’라는 한명(漢名)이 있었으며, 순조선명(純朝鮮名)은 ‘소래’라고 불리었다(이동원, 1933). 소래에는 1883년에 우리 선조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설립된 소래교회가 있던 곳이다(박은배, 2009). 소래교회가 설립된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선교사가 H. G. 언더우드(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목사였다.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 L. H. 언더우드에 의해 쓰여진 ‘언더우드의 전기’에 따르면(이만열, 1990)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3월 27일 조선에 입국하였고, 소래마을을 처음 방문한 것은 1887년 10월이었다. 그리고 소래해변을 발견한 것은 1888년 장기 순회여행을 하던 시기였는데, 이 당시 언더우드 목사는 구미포 해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선교사들의 휴양소로 만들 계획을 추진하여 그 곳 땅 대부분을 사들이고, 이후에도 조금씩 땅을 사들여 상당히 넓은 땅을 확보하였다.

언더우드 목사가 소래해수욕장을 무료로 조차하고 많은 땅들을 사들여 휴양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고종황제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1885년) 후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궁궐 내 음식에 독이 들어있을까 염려하여 드시지 못하고, 밤에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자 언더우드 목사와 O. R. 에비슨(Avison) 선교사 등은 가정에서 음식을 가져오고, 밤에는 궁궐 내에서 고종의 곁을 지키며 호위(박형우, 2010)하여 고종의 신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 뉴스타운 골프 자료사진

그 후 언더우드 목사는 1905년에 여름 휴양지를 완성하여 처음으로 구미포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고, 다른 선교사들에게 소래해변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13년, 1914년에 가서야 알려지기 시작하였다(이만열, 1990).

구미포의 소래해수욕장에 대한 기록들은 이후에도 당시 신문기사들을 통해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널리 사용되어졌다는 기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내용들을 통해서 구미포의 규모와 외국인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구미포 휴양지에 골프코스가 도입되었을 것이라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동아일보(1934, 8월 10일자)에 황해도 소래해수욕장을 소개하는 기행문 기사를 통해 이곳에 광활한 골프코스가 있었다는 것을 본 연구를 통해서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구미포 골프코스의 코스형태는 이동원(1933)이 묘사해 놓은 “구미포에는 烽火臺라는 조그마한 산이 바다으로 돌출하였는데 洋別莊이 봉화대 전면에 널려 있고…”라는 모습, 동아일보(1934, 8월 10일자) 기사 “광활한 잔디 잘입힌 꼴프장까지 잇다. 그 꼴프장가로는 푸른솔이 병풍을 둘럿다”는 모습, 대한골프협회(2006)의 구미포 해수욕장 전경 사진을 종합하여 볼 때 구미포 골프코스는 바닷가 절벽 위에 있던 전형적인 링크스 코스였을 것으로 보인다.

구미포 골프코스의 규모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는 없지만 O. R. 에비슨(Avison) 선교사의 전기(이광린, 1993, 박형우, 2010)를 보면 언더우드 목사가 휴양지를 만들기 위해 땅을 사들이면서 이미 이곳에 골프장을 비롯한 정구장, 야구장, 산책로를 만들 계획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이 완성된 후 아이들은 물놀이, 40-50대는 테니스, 소년과 남자들은 야구, 골프장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좋아했다고 전한다. 구미포 골프코스는 언더우드 목사가 소래해수욕장을 개발하면서 골프를 비롯한 다른 여가시설이 함께 있던 한반도 최초의 골프리조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 뉴스타운 골프 자료사진

구미포 골프코스의 개장 시기는 정확하게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처음 여름 휴양지로 개장되던 1905년 당시에는 이용자가 소수였던 관계로 골프코스는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한골프협회(2006)에서는 황해도 구미포 골프코스가 1913년에 있었다고 다카하다(高畠種夫)의 주장을 언급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의 행적을 살펴보면 언더우드 목사는 1905년 여름 소래 휴양지를 개설한 후 1906년 7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며 한국을 떠났다가 돌아왔으며, 1910년 여름에는 소래 휴양지의 개량 공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지게 되어 두 달 동안 병원에서 지내게 된다(이만열, 1990). 이러한 언더우드 목사의 행적과 대한골프협회에서 언급한 골프코스가 있었다던 시기를 종합하여 분석하여 보면, 구미포 골프코스는 언더우드 목사가 소래해수욕장을 발견한 1888년부터 계획되고, 대한제국에 재입국한 1909년에서 선교사들에게 소래해수욕장이 널리 알려져 방문자가 많아졌다는 1913~191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미포 골프코스가 폐장되어 없어진 시기는 당시 매일신보(1941, 7월 15일자)에서 외국인이 1941년 7월에 대부분 귀국하고 조선인들이 대성황을 이뤘다는 것과 세계2차 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영향을 받아 1942년 6월 1일 한국에 있던 마지막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다(박형우, 2010)는 것을 종합하여 보면 1940년을 전후로 사라진 역사속의 골프코스가 되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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