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 [1844.10.15~1900.8.25]^^^ | ||
모든 것에 확실한 현명함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그 이유가 되며, 진리와 학문의 전횡이 오히려 허위의 가격을 끌어올리게 되는 것처럼, 현명함의 전횡이 새로운 종류의 취향을 만들어 내게 되어서 더욱 어리석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현자가 바보에게 길을 물었다. 그 바보는 단순히 가장 가까운 도시로 가는 길을 묻는 것처럼 생각하고 즉각 대답했다. "너 자신을 찬미하는 것, 그리고 거리에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현자는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했다. 이에 바보는 반격으로 "어떻게 모욕을 느낌 없이 계속적으로 찬미할 수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말은 동문서답 같은 대화지만 지혜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와 마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덫에 거린 독수리를 본 농부가 그 아름다움에 취하여서 새를 날려보냈다. 독수리는 살려 준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농부에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무너진 벽에 앉아 있는 농부를 보고 독수리는 달려가서 농부가 동여매고 있는 머리띠를 발톱으로 낙아 챘다. 이에 놀란 농부는 벌떡 일어나 독수리를 따라 갔다.
그러자 독수리는 그 머리띠를 떨어트렸고 농부는 그것을 주어 들고서 원래 자리로 돌아 왔다. 그제 서야 독수리가 자기가 베푼 친절에 대해 신통하게도 보답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머리띠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 일을 하느라고 헛수고만 해서 독수리가 농부로부터 받은 보답과 같은 꼴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솝의 이야기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많은 고통과 행복을 안고 살지만 고통을 더 많이 안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러한 고통은 무엇으로 오는가, 그리고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지혜는 없는 것인지를 되묻게 된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간다. 그러한 전진성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출발점으로부터 종착점을 향해가도록 만들어졌고 누구든지 지금 이 순간에도 매 순간 귀착점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이것이 만물의 본성이고 우주의 섭리다. 따라서 인간은 짧은 기간을 사는 동안에, 자기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점검하며, 반성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것을 잊고 정신적인 면에서 너무 쉽게 만족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점을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과 무지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어떤 종교나 신앙심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해서 찾기도 하지만, 일상 속에서, 생활 속에서, 깨우치는 지혜도 함께 필요하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지만 수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속에서, 소중한 삶을 알차게 살고, 최대한 활용하며 살아야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살면서, 하루하루의 희로애락에 매달리며 살게 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심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서로가 형제이고 이웃이며 친구가 되지만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벽을 만들고 다툼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넓고 길게 보면 서로의 차이점이 없고, 본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모두가 내 이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대편으로부터 때로는 화가 나고 질투가 생기며 미워지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 사랑을 느끼며 같이 어울려 살아가게 마련인 것이 인간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잘못된 오류를 범해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가기도 하여서 자기자신을 파탄시키게 된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변하는 일상 속에서 색깔, 냄새, 맛, 느낌, 소리와 자각 등으로 다양한 지각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살게 된다. 이러한 자각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자각하게 되는데, 세상의 물질 세계에서는 명석한 지식을 근거하여야 이로운 자각을 할 수가 있게 된다.
지각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을 강화시키고 부정적인 요소들은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만, 보다 이로운 지각을 많이 하게 된다.
따라서 긍정적인 요소들은 행복을 증대시키고 부정적인 요소들은 행복을 감소시킨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내면 세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인간은 물질적인 조건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행복을 향한 열망을 성취시켜줄 다른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게 된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미약해서 신앙심에 매달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성취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인간의 지성은 행복을 찾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창출해주는 인간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
지성은 고통극복과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해악을 만들어서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지성을 통해서 물질을 만들어 유용하게 쓰기도 하지만 지성을 통해서 근심과 고통을 만들기도 하며,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일도 예측하게 한다.
인간의 지성 때문에 만들어 내는 불행은 그 지성에 의해서만이 없앨 수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열린 마음과 지성이 합치게 되면 더 높은 단계의 행복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웃을 배려하고 자비심을 베풀며 사랑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이러한 심성들이 지성을 더욱 강력하고 긍정적인 힘을 갖도록 변화시키게 된다.
그러한 지성을 가지게 되면 마음이 더 관대해 지고 넓어지게 되어서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된다. 자신의 행복에 안주하지 않고 타인의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선심과 자비심이 생기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나만이 홀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행복해지지 않으며 항상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살아야 행복하게 된다. 따듯하고 자비로운 마음의 평화를 가져야 이웃을 바로 보게 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지혜의 눈과 마음이 생기게 된다.
분노와 미움은 자기의 내면세계를 파괴하게 되어서 불행해 진다. 자비심과 용서는 평화의 기초가 되어서 모두에게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게 된다.
항생제는 강력한 질병치료제지만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는데는 별로 소용이 없다. 부러진 다리는 다른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 어른과 아이가 먹어야 하는 약이 다른 것처럼 인간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그러하다.
고통과 행복은 여러 가지 조건들을 기반으로 해서 생긴다. 감각기관, 경험, 지각과 같은 내면적인 요소들과 소리, 냄새, 맛, 촉감 같은 외적인 요소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고통과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요소들의 본성은 과연 무엇일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을 없앤다면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해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하다가 불행해지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것은 지성의 부족에서, 경험의 부족에서, 물욕의 욕심 같은 데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평상 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생기고, 모든 욕심을 버리면 얻게 되고, 대접받으려면 먼저 대접하라는 말이 생기게 된다.
번뇌는 무지에서 생기고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으로 자아를 재인식하는 데서 그것을 줄일 수 있다. 무지는 단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적극적인 상태를 말한다.
잘못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물들을 그대로 보면 실제 모습과 반대로 잘못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면 들어 날수록 자기의 무지가 잘못 알았다는 것을 강하게 깨닫게 된다.
산다는 것은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행복 찾기라고 하지만 결국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다가 죽는다. 하지만 그것을 빨리 깨닫는 자는 다소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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