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일요일엔 별식이 그리운지라 점심으론 아내와 칼국수를 사 먹었습니다. 집으로 들어서는데 다시금 감나무에서는 메추리알보다 조금은 더 크고 계란보다는 작은 감나무의 새끼(?)가 제 머리를 때렸습니다. 낙하한 감나무의 '새끼'는 이제 이승을 떠난 것입니다. 그건 바로 우리네 인생의 초상과 별반 다름없는, 이른바 '적자생존'의 수순과 법칙에 의거한, 어쩌면 생노병사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감나무에서 그처럼 채 익지도 않은 감들이 듬성듬성 떨어질 때마다 제 마음은 아렸습니다. 지금 떨어진 감이 온전히 감나무에 붙어 있었더라면 올 가을에 저 감나무에서는 그 얼마나 많은 감들이 수확될 수 있을 것인가...! 대체 하늘의 조화와 바람의 심술은 어찌도 저리 요사스러워서 저처럼 갸날픈 어린 감들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친단 말이던가! 저 감들이 이제 더 이상은 떨어지지 말고 모두 '오순도순' 어울려 고루 익을 순 없는 것일까?!
하지만 거개의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이 여전히 모두 감나무에 붙어 있으면 다 죽는 겨! 그러니까 누군가 희생을 해야만 비로소 후세는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고 보니 무릇 우리네 인생도 그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는 역시나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만 자식은 그러한 토양을 발판 삼아 성장한다는 어떤, 저 자신의 헛된 논리의 빗댊이 아마도 그런 범주가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이러구러 나이만 먹어 낼모레면 지천명을 바라보는 필부입니다. 하지만 허구한 날 빈궁의 터널에 빠져 사느라 그동안 변변한 아비 노릇도 잘 못 했습니다. 그도 모자라 저 스스로 판단컨대 제가 오늘날 불변의 빈곤인 것은 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시스템의 불량과 더불어 '노이무공'(勞而無功)의 귀결이라는 자가당착과 허무감에 휩싸여 한동안 칩거의 나날도 보낸 바 있습니다. 하여 우울증과 자학감은 제 살을 베는 예리한 비수로 다가오기 일쑤였습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고백하건대 사실은 잠시 전 칼국수집에서도 대낮부터 비애의 소주 한 병으로 '온 몸을 적시고' 온 상황입니다. 그건 바로 여전히 잠복하고 있는 자괴감의 발로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육중한 감나무에서 그 여린 '새끼 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종국인 가을엔 '튼실한' 감들이 열린다는 것이 결국은 만고불변의 이치라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제가 바로 그처럼 떨어지는 감이 되어야만 하겠지요.
제 생명의 가치를 상회하는 저의 분신이자, 아낌없는 사랑만을 가득 퍼붓다 제가 죽어도 부족하기만 한 사랑하는 아내와 그리고 아들과 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시종여일 그처럼 '떨어지는 감'이 되어야만 하겠다고 다시금 작심의 끈을 불끈 쥐는 것입니다. 마음의 잣대를 그리 쥐어서 일까요... 오늘 따라 마당의 감나무가 더욱 정겹고 살갑게 다가옵니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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