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서린 삶을 산 어린 단종 임금이 누운 영월땅
한(恨) 서린 삶을 산 어린 단종 임금이 누운 영월땅
  • 전도일 기자
  • 승인 2012.06.14 21: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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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7대 왕릉 중 유난히 애틋함을 느끼게 하는 ‘장릉(莊陵)’

▲ 사약을 받아 숨쳐 동강에 버려진 단종을 호장 엄홍도가 노루가 머물럿다는 산 정상에 암매장한 곳이 복원돠면서 '장릉'으로 정비됐으며, 조선 27대 왕릉들보다 협소하다.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에 의하여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端宗, 1441~1457년, 재위 1452~1455년)의 ‘장릉’(莊陵)을 찾아가는 길은 도로가 잘 다듬어졌다는 오늘날에도 구불거리며, 해발 300m에 가까운 고갯길을 두 번씩이나 넘어야 해 옛날 이 길을 이용해 한양에서 영월까지, 더구나 원주를 거쳐 긴 주천강을 돌고 돌면서 험준한 군둥치와 배일치를 지나 동강이 앞을 막아서고 북으로는 험준한 산이 막힌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던 영월에서의 유배지라는 것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급경사가 진 구비를 돌아 영월에 들어서면 신록이 우겨진 가운데 애달픈 삶을 마감했던 단종의 능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조선의 42기 왕릉(王陵)들이 거의 당시 한양에서 100리안에 조성됐지만, 장릉만이 유일하게 멀고도 먼 첩첩산중인 영월에 모셔져 있어 역대의 여느 왕에 비해 유난히 애틋함을 간직하고 있다.

▲ 능원을 들어서면 오른쪽의 '정려각'은 단종의 시신을 몰래 암매장했던 호장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266인의 위패가 모신 장판옥은 정조 15년에 건립됐으며, 단종제례와 함께 제례를 치른다.
12살 어린나이에 어머니인 안동 권씨(후에 ‘현덕왕후’ 추존)를 여의고 아버지인 문종(文宗)마져 붕어한 상태에서 1452년 왕위에 올라 재위 3년만에 계유정난에 의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고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14세에 세자빈이 된 정순왕후 마져 영도교(永渡橋)에서 이별을 하고 홀로 쓸쓸히 영월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장마로 인해 관풍헌(關風軒)에 기거하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병자옥사(丙子獄死)의 여파로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나이에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히는 바람에 제일 먼 왕릉이 되고 말았다.

험준하고 굽이굽이 돌아 영월땅에 발을 들어서는 사람들이라면 당시의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읊은 ‘천만리 머나 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며 밤길 예놋다’는 시(詩)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애잖한 땅이 영월이다.

▲ 장판옥안에 모셔진 충신들의 위패
▲ 장릉의 '홍살문'은 역대 왕릉과 다르게 평지에 북쪽을 향하고 봉분은 오른쪽 산 정상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단종이 묻힌 장능은 역대 왕릉들이 구릉지대에 모셔진데 반하여 높은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고, 묘역 또한 넓지 못한 것은 시신이 동강에 버려진 것을 당시 호장 엄홍도(순조 33년 공조판서, 고종 13년 충의공으로 추존)가 수습해 노루가 머물렀다는 곳인 능의 자리에 비밀리에 암장한 것을 1698년인 숙종 14년에 왕으로 복위되면서 이곳을 찾아 왕릉을 정비했기 때문이라고 문화해설사가 전했다.

장릉입구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홍살문을 따라가면 북쪽을 향해 서 있고 정자각(拜位廳이라 함)까지 어도(御道)와 신도(臣道)가 놓여 있으며, 그 끝에는 영천(靈泉, 제향때 제수로 사용)이 자리하고, 왕릉은 별도의 길로 올라갈 수 있는 등 대부분의 조선왕릉들이 홍살문, 정자각, 봉분이 일직선으로 위치하지만, 장릉은 특별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 '홍살문'의 끝자락에 있는 영천, 제례때에는 우물을 청소해 이 물을 제수로 사용한다고 전한다.
▲ 단종 제례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으로 '배위청'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위치가 산 정상의 봉분옆을 향하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왕릉에 다다르면 곡장(曲墻) 3면, 혼유석(魂遊石) 1개, 명등석(明燈石) 1개,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 마석(馬石) 1쌍, 양석(羊石) 1쌍, 호석(虎石) 1쌍 등으로 배치돼 있는 데, 추봉된 왕릉이라 명등석의 밑돌과 가운데 돌 사이의 받침돌인 간석(竿石)과 봉분 주위를 둘러 세운 병풍석(屛風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없으며, 호위 동물석이 적은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왕릉 중에 장릉에만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信位) 32인, 조사위(朝使位) 186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 등 총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이 있고, 한식날(현재는 4월 셋째주 토요일)단종제향때 함께 제례를 올리고 있는 것도 특징이며, 단종이 처음 머물렀던 청령포는 ‘물의 지옥’ 이라 일컬어지듯이 동강이 가로막혀 배를 타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천혜의 유배지라 아니할 수 아니할 수 없다.

▲ 단종의 봉분에는 간석, 병풍석, 무인석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호위 동물석도 다른 왕릉에 비해 적은 편이다.
▲ 봉분은 정서(正西)에서 북쪽으로 15도 각도와 정동(正東)에서 남쪽으로 15도 각도에 위치해 정자각에서 제배(祭拜)를 할 경우 옆에다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지난 2007년 4월 28일에는 영월군이 조선 27대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국장(國葬)을 치르지 못한 단종의 승하 550년을 맞아 정조국장의궤(正祖國葬儀軌)의 반차도(班次圖) 및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葬軒大王實錄)을 근거로 전주이씨 대동종악원 전례(典禮)이사의 감수와 집례로 국장을 치렀는 데, 국장행렬 중 거리에서 노제(路祭)를 봉행하고, 장릉에서 대나무와 한지로 만든 모형 말인 ‘죽인마’를 불태워 천도를 기원하기도 했었다.

▲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장마로 이곳 '관풍헌'에 기거했으나, 사육신의 복위운동의 여파로 사약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滿乾坤) 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성삼문

“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해서 물바다 금이 나며
곤강(昆崗)에서 옥이 난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
아무리 사람이 사랑(思郞)이 중요하다고 한들 임마다 따르겠는가”-박팽년

▲ 동강이 가로막아 배를 타야 나올 수 있는 청령포에는 소나무가 그때의 광경을 지켜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단종이 한양을 향하여 그리움을 표한다는 절벽도 있다.
▲ 영월군이 지난 2007년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한 단종 승하 550년을 맞아 국장을 치르기도 했다.
어린 단종의 폐위를 안타까워하며 복위 운동에 연루돼 새남터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한 사육신 성삼문(成三問 1418∼1456)과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충의와 절개가 어린 위의 시조를 되살려 읊조리며, 애달프고 한서린 삶을 살다 이곳 영월땅에 묻힌 단종에 대한 그 시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굽이굽이 돌아 먼 영월땅을 찾아 온 보람은 있을 것이며, 힘들지만 능앞에 서서 요절한 단종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4배(拜)를 올리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을까 한다.

▲ 지난 2007년 단종 국장을 치르기 위해 삼배로 된 굴건제복을 입고 거리행렬을 했으며, 수 많은 영월군민과 관광객들이 이를 지켜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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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아 2013-06-25 11:36:48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곧바로 노산군으로 강등된 것처럼 문장이 기술되어 있네요. 사육신의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노산군으로 강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