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세상을 알고 싶다
나도 세상을 알고 싶다
  • 김광진
  • 승인 2004.03.0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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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그리 작지 않은 내 아버지의 꿈

아버지는 지금도 손에서 회화 책을 놓지 않으신다. 작년에 칠순을 넘으셨다. 여기저기 잔 병들이 있지만 아직 다행히 커다란 병을 앓지는 않으신다. 몇 년 전 정년퇴임을 하신 후 주로 친구 분들이나 인터넷 바둑으로 소일을 하시지만, 아직도 끊이지 않고 독서를 하신다. 그런데 그 독서중의 많은 분량이 각국의 문화재와 회화에 관한 것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가끔씩 흘려듣는 말들에 의하면, 아버님은 남들에게 뒤지지는 않을 정도는 풍류를 알던 분이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지,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철이 들면서부터는 아버님은 그 모든 것을 끊으시고, 퇴근시간이 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시는 모범가장이셨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님의 모습니다.

그 계기 중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우리 삼형제의 만만치 않은 교육비 부담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세 형제의 대학자금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고, 아버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찍부터 그 준비를 시작하신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항상 넉넉지 않은 생활에 익숙했었고, 때로 가끔씩은 그런 궁핍한 삶이 아버지의 지나친 청렴함과 무관하지 않은 약간의 무능 때문이라고도 생각하기도 했었다.

아버님은 그 무렵부터 가끔 해외여행을 가시기 시작했다. 성실하게 일하시는 만큼 인정을 받아서인지, 아버님이 자신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고위직에 계셨기에 시찰을 할 기회가 있어서 인지는 모른다. 원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그 당시부터 회화공부에 재미를 들이셨다. 당시에는 몇 종류 되지도 않는 회화 책을 새로 사서 들고 들어오실 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었고, 그날은 왠지 아버님이 기분에 들떠 하시는 것 같았었다.

아버님은 그렇게 직장과 관련해서 몇 번의 해외여행 혹은 출장을 다녀오시고는 한 보따리의 사진을 우리들에게 풀어놓으셨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의 모습들을 구석구석 찾아보는 기회를 쉽게 가질 수 있었다. 아버님은 여행갈 곳이 정해지면 그곳에 관한 책을 사서 외우다시피 하셨다. 그래서 여행 가이드에게 보통 사람들이 잘 가는 곳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가기를 주문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가져오신 사진들은 주로 그런 곳의 모습들이었다.

아버님이 풀어놓으시는 사진보따리의 특징은 아버님 자신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사진에선 아름다운 배경을 대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는 것이 보통인데, 아버님의 사진에는 항상 대상만 찍어놓으셨다. “아까운 사진에 내 모습은 넣어서 무엇 할려구...” 아버님은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게만 대답하셨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아버님이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는 절약과 근면덕분에 우리형제는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저마다 직장을 잡았다.

명절 때마다 형제들이 모이면 아버님이 계시지 않는 방에 모여서 의논을 한다. ‘이번에는 어느 곳으로 여행을 보내드릴까?’에 관한 것이다. 아버님이 자신의 다른 모든 욕구를 희생하고도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여행에 대해 가지는 애착을 이젠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여행대상지를 고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아버님은 흔히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은 한사코 싫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휴양지, 유명관광지, 명승지... 이런 곳은 아버님이 기피하시는 곳이다. 주로 문화유적, 역사적 장소, 사막탐방... 아버님은 이런 것들을 좋아하신다. 그리고 여행상품이 잘 개발되지 않은 그런 곳에 여행을 다녀오시면 거의 한달을 앓아 눕곤 하신다. 자식들이 모아서 드린 경비를 아끼느라 지나치게 고생을 하신 탓도 있지만, 귀중한 여행기회를 아끼려고 강행군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넉넉히 경비를 드리려고 하지만 아버님은 항상 경비를 남겨 오신다.

여행 후에 너무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이번에는 너무 멀리 가시지 말고 좀 가까운 곳에 다녀오시지요.”라고 조심스럽게 여쭤보면 아버님은 항상 “이젠 더 여행 안 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어머님을 통해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아버님의 속내를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자식들이 매번 경비를 모아서 여행을 보내주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아버님은 아직도 가시고 싶은 곳이 무척 많고 여전히 여행공부와 회화공부를 하신다는 것이다.

가까운 곳을 여행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매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신의 기척이 수축해지시는 것을 느끼는 아버님은 더 시간이 지날수록 먼 곳의 여행은 불가능해 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기력이 남아 있을 때 한사코 경비를 아끼고 생활비를 아끼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한 곳이라도 더 다녀보려고 알차고 값싼 문화탐방을 계획하고 계신 것이다.

더 많은 곳에 더 자주, 더 편안히 여행을 보내드리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 안타깝다. 그분이 우리들을 지금과 같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참으시며 어떻게 고생해 오셨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후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꿈들을 좀 더 풍부하게 이루어드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내가 감히 아버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나 또한 아버님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새로운 것을 느껴보고 싶은 그 열망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의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삶에 매달려 살아가다가, 나도 한번씩 세상살이에서 벗어나서 훌쩍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꿈을 꾸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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