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깊이 다가가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마다 눈의 시력이 차이가 있는 법이다. 어떤 사람은 가까이 가야 잘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져야 잘 보인다고 한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그것이 바로 나에게 알맞은 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거리감이다.
사람의 시력처럼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도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보면 그 고난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야만 성에 차는 사람이 있다. 함께 땀 흘리고 함께 눈물 흘리고 그리고 마침내 함께 시련을 이겨내는 그 기쁨은, 그런 삶을 살아보고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삶과 그런 삶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좀 멀찌감치 떨어진 사람들이 있다. 산골짜기 무성하게 우거진 판잣집들을 바라보며 소박한 아름다움이니, 사람들의 삶의 근원적인 고독이니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야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적어내는 글들 또한 가슴에 깊은 아름다움의 감동을 주는 것을 보면 삶이란 참 여러 가지 시작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가보다.
조금 어중간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삶 속 깊은 곳으로 뼈져들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다.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면서 그저 주변을 배회할 뿐인, 그러나 고개를 돌려서 아예 먼 곳으로 떠나버리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나도 원래부터 이런 거리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나도 한때는 보다 삶에 가깝게 다가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눈물에 젖어 흐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차마 열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비루한 이유들과 나 자신의 태생적인 한계로, 혹은 다소 낭만적인 단어들로 내가 가까이에서 느끼는 삶에서 조금의 거리를 두게 된 원인들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내 가슴에만 담아두고 싶다.
지금 나는 삶을 바라보기를 즐긴다. 아니 그것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법 그 자체이다. 밥을 버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고,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들에서 떠날 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나의 존재의 양식으로 고착화되어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려서 나는 관조의 미학에 조금의 맛을 들였고, 조금 철이 들면서는 다가서는 아름다움을 느껴보았었다.
‘무엇을 보려면 가까이에서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한때 내 삶을 이끌던 명제였었다. 당시 내 속에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뜨거운 무엇이 있었다. 그러나 곧 나의 이성적인 생각들이 너무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오류들을 몇 가지 지적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엇을 경험하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성찰하려면 한걸음 물러서야 한다.’ 나의 명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바뀌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뜨거움과 감동을 느낄 수는 있지만 오류를 발견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삶의 뜨거움에서 한발 물러서게 만든 주요 원인은 아니지만, 실제로 나에게 중요하게 작용했던 원인 중 하나였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삶을 한발쯤 물러서서 본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지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또한 너무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자칫 한발만 더 다가가면 아픔을 느낄 수 있고, 또 오류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삶의 치열함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는 삶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것은 내 삶의 활력에서도, 나의 신앙에서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한발 물러서 있으되, 열심히 관찰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나는 자칫 너무 가까이 다가가 버리는 단점이 있다. 평상심을 지키기에는 아직도 내 마음은 충분히 진정되지가 않았나보다. 말을 아껴야 할 때 불쑥 바른말을 해버리고, 점잖게 있어야 할 때 너무 앞서나가 버리는 일들이 아직도 잦다. 듣는 이가 없어도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요한의 피가 내 혈관에 아직도 조금은 섞여 있는가보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예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던 마리아의 애타는 침착함이 나에게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다. 나는 또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에게서 나의 비겁함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언젠가 나도 반석이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오늘도 또 하루를 이렇게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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