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 망우리공원은 이런 곳!
망우리공원은 서울의 동쪽 외곽과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1.62㎢로서 1977년 건설부 고시 제138호로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내 묘지는 1933년부터 1973년 사이에 조성되었는데, 당초 약 2만8천5백 여기의 분묘가 있었으나, 계속된 묘지이장으로 인해 현재 9,981기(중랑구7,147기, 구리시 2,834기)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마련한 후,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선왕의 능지보다는 대왕의 신후지지(身後支地)로 적합하다는 무학대사의 권고로 태조 자신의 능지로 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어 자신이 보았던 능지를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라 ‘아아, 이것으로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고 한데서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 송촌 지석영 선생, 소파 방정환 선생, 박인환 선생 등 애국지사와 저명인사의 묘소가 있고, 공원내 순환로를 따라 이 분들의 얼을 기리기 위한 연보비가 설치되어 있어, 민족과 역사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사색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항일의병 ‘13도 창의군탑’과 산책로, 약수터, 정자 등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사계절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3도 창의군탑
1907년 11월 동대문 밖 30리에 해당되는 망우리 일대에서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이 13도 창의대군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여 서울로 진격, 일본과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였다.
비록 서울 진격은 못했으나 항일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1년 7월 31일 동아일보사에서 기념탑을 망우리공원 입구에 건립하였다.
공원내 묘지는 1933년부터 1973년 사이에 조성되었는데, 당초 약 2만8천5백 여기의 분묘가 있었으나, 계속된 묘지이장으로 인해 현재 9,981기(중랑구7,147기, 구리시 2,834기)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마련한 후,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선왕의 능지보다는 대왕의 신후지지(身後支地)로 적합하다는 무학대사의 권고로 태조 자신의 능지로 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어 자신이 보았던 능지를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라 ‘아아, 이것으로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고 한데서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 송촌 지석영 선생, 소파 방정환 선생, 박인환 선생 등 애국지사와 저명인사의 묘소가 있고, 공원내 순환로를 따라 이 분들의 얼을 기리기 위한 연보비가 설치되어 있어, 민족과 역사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사색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항일의병 ‘13도 창의군탑’과 산책로, 약수터, 정자 등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사계절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3도 창의군탑
1907년 11월 동대문 밖 30리에 해당되는 망우리 일대에서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이 13도 창의대군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여 서울로 진격, 일본과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였다.
비록 서울 진격은 못했으나 항일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1년 7월 31일 동아일보사에서 기념탑을 망우리공원 입구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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