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拉北者)가족, 그 한서린 세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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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拉北者)가족, 그 한서린 세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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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취재사례 -감시와 고문, 연좌제에 시달려

^^^▲ 지난 1973년에 납북됐던 어부 김병도씨가 탈출 귀환해 30년만에 가족품에 안겼다^^^
[필자 주] 납북자가족에 대한 실상을 연합뉴스 이충원,최선영 기자가 2002. 12. 15.부터 18.까지 부산,거제,군산,장항 등지에서 그 가족들을 직접 인터뷰한 사례를 발췌하여 그 실상을 엮어본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1968~1969년도에 감시와 재제가 심했는데 그 기족들의 증언을 보면 얼마나 납북자 가족들에 대해 인권적인 침해가 심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감시와 고문 자행

1969년 6월 연평도 근해 조기잡이를 하다 납북된 ‘복순호’ 기관장 최순복(52. 충남 장항읍)씨는 납북어부를 가족들의 품에 돌려주기는커녕 가족들마져 ‘빨갱이’로 몰아 고문,연좌제등 정신적,육체적 폭력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전북 군산에 사는 이광일(54)씨는 1967년 5월 ‘승용호’를 타다 납북된 동생 성일(51)씨 때문에 남은 7형제가 걸핏하면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 취약지구에 간첩이 나타났다 하면 큰형이 보안대와 경찰에 끌려가 두들겨 맞고 주전자물로 코에 붓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라고 증언했다.

1969년 5월 납북된 ‘복순호’의 선원 임판길(66)씨의 동생 선양(59)씨는 1972년 신고없이 이사했다고 군산경찰서에 끌려가 12일간 고문당한 끝에 만성폐결핵을 앓다 2001년에 숨졌다고 했다.

가족도 ‘빨갱이 가족’으로 몰아

임선양씨는 목포에서 배를 타던 중 경찰에 끌려가 ‘형과 접선해 북한에 가서 교육을 받고 남파된 것이 분명하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해 한쪽의 폐가 없어지고 한쪽 어깨가 주저앉고 정강이가 깨질 정도로 망가져 아이들을 부양치 못해 보육원에 맡기기까지 했고 누이는 그 가족들이라고 시집에서 쫓겨났다고 증언했었다.

1971년 1월 ‘휘영37호’를 타다 납북된 정완상(51)씨의 어머니 이간심(67. 경남 거제)씨는 ‘경찰에서 매일같이 아들이 간첩으로 들어올 수 있으니까 신고 빨리하라고 야단쳤다, 하루는 전에 없던 초소가 생겼는 데 가족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설치했다’라며 감시가 어느 정도였었는지 짐작케하고 있다.

같은 ‘휘영37호’의 납북된 선원 박동순(71)씨의 부인 임희순(68)씨는 ‘큰 딸의 결혼을 앞두고 경찰에서 혼수비용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아야 했다’라며 돈이 생기거나 재산이 불어나도 조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좌제에 2세들은 갈 곳이 없어

‘휘영37호’ 선원 황영식(83)씨의 장남 화봉(57.경남 거제)씨는 ‘부친 납북직 후 군제대를 하고 집에 오니 전교에서 1,2등을 하던 동생이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있었다. 동생 뿐아니라 납북자 가족중 학교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이 많았었다’고 진술해 연좌제로 2세들의 학업의 꿈들이 깨기기까지 했다.

1972년 12월 ‘오대양61호’ 선원 박두남(69)씨의 부인 옥철순(71)씨는 우여곡절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남이 국가공무원 시험에서 불합격했고 지방공무원 시험에서도 신원조회 때문에 불합격해 ‘경찰지서장을 붙들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것이 딱했는지 지방 공무원은 괜찮다고 해 면서기로 들어갔다’는 증언도 했다.

1967년 납북된 ‘풍복호’의 선원 문경식(51)씨의 형 중식(60.군산 옥구)씨는 막내인 아들이 육군사관학교를 갈려고 했지만 납북된 작은 아버지 때문에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 혼자 울음을 삼켜야 했다고 했다.

1972년 2월 납북된 ‘안영35호’ 김두선(67)씨의 부인 송봉심(59.부산 남구)씨는 ‘남편이 간첩이라고 식당 잡부일도 시켜주지 않았다. 겨우 직장을 구하면 어느새 형사가 찾아와 납북자 가족이라고 얘기해 직장도 오래 다닐 수 없었다’라고 해 얼마나 감시가 심했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귀환자들도 가혹한 고통

1969년 6월 연평도에서 조기잡다 납북되었다 돌아 온 최순복(52.충남 장항)씨는 ‘돌아오자 마자 인천 모여관에서 조사를 받았는 데 북한에서 그때 돈 45만원가량 장작,옷감같은 것을 실어 줬는 데 그 장작으로 두들겨 맞았다’라며 귀환자도 모진 고문에 시달렸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귀환자인데다 동생까지 납북된 이양일(61.전북 군산)씨는 돌아 올 당시에는 조사를 받지 않았지만 동생이 납북된 뒤인 68년도에 ‘너도 이북갔다오고 동생도 안왔다고 때리는 것에 하도 맞아 몸이 붓기에 옷을 찢어야 했다’면서 사정없는 고문의 정도를 증언했다.

늙은 할머니들의 애절한 사연들

납북된 ‘오대양61호’ 김의준(57), 태준(49)씨 형제의 어머니 박규순(72)씨는 일찍 남편을 잃고 2남1녀를 키우던 박씨는 생계를 이어가든 형제의 납북으로 청척벽력에 딸마져 가출을 일삼더니 10여년전 갓 태어난 손자를 남겨놓고 다시 가출했었다.

13세된 손자를 홀로 키우며 ‘사는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도 두 아들을 만나보기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라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1972년 12월에 납북된 ‘오대양62호’ 정도평(58)씨의 어머니 옥말분(77)씨는 20살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이 납북되기 1년전에 결혼했는 데 며느리는 아들이 납북되자 가출해 ‘얻어 먹고 빌어 먹었지만’ 유일한 손녀(30)가 공부를 잘해 경남대를 졸업 울산에서 회사에 다니다면서 ‘죽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아들 못보고 죽을 것이 무섭다’며 노구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회적 분위기되면 피해 늘어나

‘연합뉴스’ 기자들의 현지취재 및 인터뷰가 대채로 알려진 남해안과 서해안 일부에 국한되었으나 이를 미루어 볼때 전국적(동,서,남해안)으로 동일한 감시와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짐작이 되며, 납북자 가족들이 그때의 일들을 아직도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인해 묻어두고 있을 따름인 것으로 예견된다.

만약 납북자 가족에 대한 인권적 접근과 대책이 강구된다면 무수한 증언들이 붓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와 그 피폐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밣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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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04-03-22 15: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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