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우리 궁궐 이야기 <창덕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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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우리 궁궐 이야기 <창덕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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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과 창덕궁의 역사 -상- (학술 마을지기 순천님)

^^^▲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 - 19세기 중엽( 조선 순조 ) 때 제작^^^

지난 두 회에 걸쳐 우리는 궁궐이란 무엇이며 어떤 기능들이 있었는 지 살펴보았습니다.

궁궐은 단순히 임금만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가장 으뜸이 되는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임금이 나라를 상징하고, 나라를 대표했던 당대에 있어 그만큼 궁궐이 상징하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창덕궁이 포함된 조선 궁궐들은 어떻게 이어져 왔을까요? 조선왕조 518년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조선의 궁궐도 수많은 역사적 부침을 거듭해 왔는데요. 조선 궁궐의 역사는 곧 조선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이번 회에서는 조선 궁궐과 창덕궁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조선 궁궐의 역사 - 경복궁에서 경운궁에 이르기까지

1392년에 고려(高麗)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 조선을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재위 3년째 되던 1394년에 고려의 옛 수도인 개경(開京)에서 오늘날의 서울인 한양(漢陽) 으로 도읍을 옮겨 옵니다.

도읍을 옮겨 오면서 궁궐과 종묘(宗廟), 사직(社稷), 도성(都城) 등 조선이 앞으로 나라를 다스려 나가는 데 필요한 시설들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때 처음 지어진 궁궐이 바로 경복궁(景福宮) 이었습니다.

태조때 처음 지어진 경복궁은 왕이 거처하는 연침 및 동서소침, 서소침, 및 왕의 집무실인 보평청 과 정전 등 모두 390여 칸에 달하는 규모로 당시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강녕전(康寧殿),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등 궁 내의 주요 전각의 이름은 당시 태조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창, 발전 시키는 데 앞장 섰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에 의해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처음 지어진 경복궁에서 태조 7년이던 1398년에 태조의 첫 부인인 한씨 소생의 왕자인 정안대군 방원(후일 태종)이 왕자들을 제거하여 왕실에 역모를 도모했다는 구실로 정도전을 비롯한 일부 개국공신들과 태조의 둘째 부인 강씨 소생의 왕자인 방번과 세자 방석 형제를 제거하는 이른 바 '왕자의 난' 이 이 궁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끝에 두 아들을 잃은 태조는 실의에 빠져 결국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로 세웠다가, 얼마후에 세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가 바로 2대 정종입니다. 하지만 정종은 골육상쟁이 나는 한양에 머무르는 것을 꺼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고려의 옛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갔고, 이 바람에 한양은 다시 빈 도시가 되어 당시 기록에 '한때 호랑이가 경복궁 근정전에 까지 드나들었을 정도' 였다고 하니 (정종실록), 얼마나 살벌한 도시가 되었는 지는 이 기록 내용만을 보더라도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황폐화되어가던 한성이 다시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정안대군이 3대 태종으로 즉위하면서부터입니다. 태종은 부왕 태조의 뜻을 이어받아 재위 5년이던 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재 천도하게 됩니다. 한양으로 재천도하게 되면서 경복궁을 수리하게 하고 새로 향교동이라는 곳에 새로운 궁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둘러보게 될 창덕궁(昌德宮)입니다. 즉, 정궁(법궁)인 경복궁에 대칭하여 동쪽에 창덕궁이라는 이궁을 세웠던 것입니다.

태종때 지어진 창덕궁의 규모는 경복궁에 비해 규모는 작았으나, 경복궁의 법도에 따른 일직선 배치에 비해서는 다소 자유롭게 배치 되었습니다. 태종은 경복궁 보다는 주로 이 궁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끝에 오른 왕위가 다소 걸려서 인지 경복궁 보다는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더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창덕궁에 머물던 태종도 때때로 경복궁으로 옮겨오면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는데, 태종 12년인 1412년 경회루를 크게 증축하고 명당수를 파도록 명했다는 기록 (태종실록) 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종도 경복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이 태종의 결단에 의해 4대 세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세종은 곧 창덕궁으로 옮겨 왕위를 물러난 부왕을 위해 창덕궁 옆에 새로 수강궁을 짓고 자신은 창덕궁에서 머물며 정사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태종이 승하한 이후 세종은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번갈아 옮겨 들기는 했지만 세종 32년의 업적은 대부분 경복궁에서 이루어 집니다. 또한 태조때 작게 지어진 경복궁의 규모가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도 바로 이 세종때였습니다. 따라서 경복궁이 크게 발전한 시기는 바로 세종때라고 할 수 있으며, 세종은 경복궁을 무대삼아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 19세기 수선전도에 나타난 조선시대 5대 궁궐의 모습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중에서^^^

그 이후 9대 성종때에 이르게 되면 당시 생존해 있던 할머니, 양어머니 (작은어머니), 어머니 등 세 분의 왕실 어른을 위해 세종때 지어진 수강궁 건물들을 크게 넓혀서 새로운 건물들을 짓고, 창경궁(昌慶宮) 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때 지어진 창경궁은 때에 따라 창덕궁을 보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경복궁이 북쪽에 있는 궁궐이라 하여 북궐이라 불렸다면, 창덕궁과 창경궁은 그 동쪽에 위치했다 하여 동관대궐, 혹은 동궐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14대 임금이던 선조 25년이던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등 동북아 3국이 많은 피해를 입혔던 당대의 큰 국제 전쟁이었습니다. 이때의 전란으로 인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등 궁궐 모두가 불에 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593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가 당시 정릉동에 남아 있던 월산대군(성종의 친형) 사제에 머무는데 이 월산대군 사제가 임시 궁궐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광해군때 경운궁(慶運宮) 이라 불리우다가 오늘날 덕수궁 (德壽宮)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는 이른 바 정릉동 행궁이 그것 이었습니다.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진 궁궐들은 대부분 광해군때 중건됩니다. 그러나 경복궁만은 많은 경제적 부담이 들어가는 데다 풍수지리상 이롭지 못하다는 반대 의견이 있어 이후 273년 뒤인 고종때 중건될 때 까지 빈 궁궐터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복궁을 대신하여 이후 정궁으로 사용되던 곳이 창덕궁이었습니다. 또 창덕궁, 창경궁 중건 이외에도 광해군때는 경덕궁(경희궁) 과 인경궁이 지어지게 되는데, 경덕궁은 이후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어 창덕궁 및 창경궁 (동궐) 에 대칭되는 서궐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그후 고종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등 이른 바 5대 궁궐이 갖추어 지게 되지만, 1896년 이후 고종은 경운궁에서 머무르며 혼란했던 당대의 역사들을 지켜보게 됩니다.

1910년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게 되면서 궁궐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거나 훼손당하는 수난을 겪게 됩니다. 1915년의 조선 물산 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1917년 창덕궁 화재때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조리 뜯어가는 가 하면 1926년에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짓기까지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창경궁은 동, 식물원을 조성하여 창경원이라 격하하였고, 경희궁은 아예 건물 전체를 전부 없애 그 흔적마저 찾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좀처럼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하던 궁궐은 1983-86년 창경궁의 복원과 1990년대 경복궁 복원 사업을 계기로 더 활발한 복원과 보존 작업이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궁궐 유적이 더 이상 파괴되고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의 주의와 관심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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