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는 꼬막이라 카는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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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꼬막이라 카는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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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갯벌

 
   
  ^^^▲ ▲ 창원 비음산
ⓒ 창원시^^^
 
 

내 고향 창원은 한반도가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져 있던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했던 땅이었다. 창원은 상고시대부터 바다와 육지의 교통이 편리하여 사람들이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골포국, 그러니까 삼한 안에서도 작은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또 낙동강 건너 동녘에 자리잡고 있었던 진한의 울산과 더불어 남도지역의 주요 철 생산지였다.

"이야~ 이 까만 쇳가리 좀 봐라. 이기 오데서 까끼(깎여) 나오노?"
"내가 그걸 우째 알끼고?"
"어른들 말로는 저 비음산에 있는 방구(바위)에 철이 써키(섞여) 있다 카더라"
"그라모 우리도 그 철 캐로(캐러) 가자"
"철로 캐가꼬(캐서) 뭐 할낀데?"
"그 아재 오모(오면) 울릉도 호박엿 바꾸(바꿔) 묵구로(먹게)"
"문디야, 방구에 박힌 철로 우째 캘끼고? 그 철로(철을) 캘라카모 큰 가마솥에 불을 억수로 오래 떼가(떼서) 녹카(녹여) 내야 된다 카더라"

그래서 그런지 어린 날, 냇가에 나가면 고운 모래가 삼베처럼 둘러쳐진 물가에는 까만 띠 같은 게 많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지남철을 갖다대면 그 까만 띠가 순식간에 몸을 비비틀며 들러붙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냇가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그 냇가가 있던 자리에는 시멘트로 잘 포장된 그런 반듯한 하수구 같은 게 들어서 있고, 그 하수구 같은 내에는 물파래만 새파랗게 들러붙어 있다.

화려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그 골포국은 신라 법흥왕 532년에 신라에 편입되었다가 676년인 통일신라시대 때 굴자군 골포현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니까 그 당시 나란 존재 자체가 아예 없었을 때, 작가 천승세 선생의 말마따나 나란 존재는 허공을 떠도는 구름이었거나, 바람이었거나, 아니면 배추나 무뿌리였을 때다.

천승세... <황구의 비명> <낙월도>의 작가 천승세 선생은 1939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1958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점례와 소"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원로 작가로, 작가 박화성 선생의 아들이다. 또한 천승세 선생은 내 결혼식 때 마산까지 내려와 주례를 서 주신 분이기도 하다.

"내가 문단에 나올 때 너가 몇 살이었지?"
"선생님! 그때 저는 어머니 뱃속에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때 너는 너희 논에 자라는 벼였거나 아니면 밭에 자라는 배추 잎사귀나 무뿌리였겠구나. 그러다가 너희 부모님 뱃속으로 들어가 너란 존재가 만들어 졌겠지"

굴자군은 다시 신라 경덕왕 16년, 757년에 의안군이 되었는데, 이 때 골포현을 합포현이라 고쳐 부르면서 의안군에 포함시켰다. 당시에는 지금의 마산시도 모두 의안군에 포함된 하나의 현이었다. 특히 내가 태어난 남면벌은 마산과 함께 합포현에 속했던 것이었다.

 

 
   
  ^^^▲ ▲ 봉암갯벌
ⓒ 경상남도^^^
 
 

하긴 내가 태어난 고향 남면벌은 마산과 봉암교라는 작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마산 앞바다가 남면벌과 이어져 봉암갯벌을 형성하고 있었고, 남면벌을 뱀처럼 가로지르는 남천이 그 봉암갯벌과 이어져 있었다. 남천과 봉암갯벌이 만나는 그곳에는 은어떼를 비롯한 각종 물고기들이 무척 많았다. 은어떼가 떼지어 노는 남천에 돌멩이를 집어던지면 은어가 은빛비늘을 햇살에 빛내며 몇 마리씩 떠오르기도 했다.

"이기 머슨 조개고?"
"그거는 꼬막이라 카는기다"
"우와! 니(너)는 한 시간도 안됐는데 벌써 그렇게 많이 캤나?"
"여기는 뻘보다 조개가 더 많다 아이가. 이 봐라, 발에 밟히는 기 전부 조개 아이가"
"그래, 빨리 한 바께스 채우고 가자. 미니버스 놓칠라"

당시 봉암갯벌에는 유난히 조개가 많았다. 그리고 각종 철새들과 게, 갯지렁이 등도 많았다. 지금은 온갖 정화작용을 하는 갯벌의 소중함을 느낀 마산의 관계자들이 이곳에 생태학습장을 만들고 있는 중이지만, 당시 봉암갯벌은 남면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탁을 늘 풍성하게 차려준 곳이기도 했다.

또 봉암갯벌과 마산 앞바다를 이어주는 그 작은 봉암다리(지금은 대교가 들어섰고 그 대교 옆으로는 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서 있다)에는 마산과 창원을 이어주는 미니버스가 다녔다. 우리는 봉암갯벌에 갈 때면 늘 그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조개가 가득 담긴 양철 바께스를 들고 낑낑거리며 급히 타던 그 미니버스는 유리창에 흙먼지를 빗물처럼 흘려내리며 그렇게 달렸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의안군은 다시 의창현으로, 조선 1413년, 태종 때에는 창원부로 승격되었다가 1601년 선조 때에는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창원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때부터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왜 의안군이란 이름이 의창으로, 또 창원으로 바뀌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창원(昌原)이라는 이름은 한자말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빛의 근원, 즉 광주처럼 빛고을이란 뜻이 된다.

빛고을? 그래. 아마도 내 상상으로는 창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내력이 대략 이러하다고 생각된다. 창원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동으로는 봉림산과 비음산, 대암산이, 서로는 장복산과 팔용산이, 남으로는 불모산이, 북으로는 천주산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창원의 바깥에서 바라보면 그 창원쪽 산마루에서 늘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마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장복산과 팔용산이 창원을 에워싸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산들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봉암갯벌이 자리잡고 있어, 마산과 창원의 숨통을 열어놓고 있다. 그래서 마산쪽에서 바라보면 아침해는 늘 장복산과 팔용산의 사이인 남면벌에서 떠오르는 것이었다. 창원에서는 아침해가 늘 비음산과 대암산에서 떠올랐다.

"너거 집은 집터가 안 좋네"
"우리 집이 어때서?"
"아, 아침이 되어도 햇살도 비치지 않는 이런 집이 뭐가 좋다카노? 좋은 집터는 뭐라캐도 아침에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그런 집이라카이"
"그래, 그라모 너거 집은 집터가 좋아서 아들만 줄줄이 넷이나 낳았나?"
"하모(그래). 니 봐라. 그라이(그래서) 딸만 줄줄이 낳았다 아이가"
"아나, 인자(이제) 그 이야기 고마(그만)하고 고매나 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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