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이 되고 있는 경운궁(덕수궁) 옛 터는 어떤 곳이고 그곳의 현황과 문제점은 어떤 것이었는 지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개 관
최근 미국 대사관의 신축 문제로 인해 논란이 되고 있는 경운궁 즉, 덕수궁의 옛 터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일제에 의해 경운궁이 본격적으로 훼철 작업을 벌일 때 경운궁 일대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이며, 그 일대에 있었던 건물은 선원전을 비롯해서 흥덕전, 사성각, 영복당, 수인당 등 주로 왕실의 선조를 받들어 모시던 신성한 지역이었다.
일제에 의해 훼철되면서 주변에는 덕수초등학교를 비롯하여 경기여고 등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현재 경기여고는 다른 곳으로 이전되면서 빈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지난 1984년, 당시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과 체결된 한 미 협정과 1986년 서울시가 당시 을지로에 있던 미국 문화원 부지를 매입하면서 대사관 신축을 전제로 미국측에 이 부지를 양도했던 것이 결국 최근에 대사관 신축 문제 논란으로까지 불거진 것이다.
2. 경운궁 옛 터에는 어떤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는가?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전후로 하여 경운궁은 크게 넓어졌는데, 그때의 영역은 대체로 정동 일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경운궁 옛 터에는 경운궁이 한창 경영되던 대한제국 시기 당시 영성문 대구역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선원전을 비롯하여 사성당·흥덕전·흥복전이 있었다고 한다.^
선원전과 사성당은 역대 임금의 영정, 즉 어진을 모시던 장소로 왕실의 선조를 모시던 중요한 곳 이었고, 흥덕전은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국장을 치르게 되는데 그 이전에 혼백과 시신을 능에 모시기에 앞서 임시로 모셔두는 빈전이었다. 요즘으로 이야기 하면 빈소라 부르는 곳이 바로 흥덕전이다.
흥복전은 국장이 끝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기 그 이전까지 신주를 모시던 장소였던 까닭에 선원전을 포함한 이 지역은 상당히 신성시되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1911년 타계한 순헌황귀비 엄씨 (영친왕의 생모)의 혼전으로 사용되던 영복당 및 수인당등 여러 건물들도 함께 하고 있었다.
3. 어떻게 파괴 되었는가?
1919년 68세의 고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 3년 뒤인 1922년 일제는 궁의 서쪽 선원전 일대를 헐어버리고 이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개통하였는데, 그 길이 오늘날 속칭 '덕수궁 돌담길 '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영복당 및 수인당등을 헐어내고 그 북쪽으로 경기여고의 교사를 새로 지었다. 한편 그 동쪽 제사 준비장 터에는 덕수 초등학교 (현재)의 교사를 지었으며, 다시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마저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청사를 건립하였다.
철거되고 파괴된 영역들은 모두 경운궁 (덕수궁)과 연관이 있던 자리로서 경운궁의 면적이 상당한 규모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때 경희궁과도 육교를 놓고 연결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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