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배반과 희열 때문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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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기, 배반과 희열 때문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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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이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문학의 현란眩亂성을 보여주었다

소설쓰기기란 ‘소설’과 ‘쓰기’가 합하여 이루어진 어휘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15세기 김시습의<금호신화>이고, 국문소설은 17세기 초의<홍길동전>이다. 서구의 근대소설 역시 17-18세기에 확립되었다. 소설은 시나 극에 비해 그 역사가 길지 않다. 이 같은 이유로 소설이란 무엇인지의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혹자들은 이야기 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서사를 띤 글, 꾸며 쓴 글이라는 단순한 표현을 하기도 한다. 또한 소설쓰기에서 ‘쓰기’는 모방이 아닌 독창적인 창작성을 말하게 된다.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을 소재로 삼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독창성을 발휘할 것인가. 등장인물. 구성. 주체(사상). 배경. 서술자 및 시점. 문체. 시간과 속도 등으로 독창성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면 소설쓰기가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일정분량의 원고지 안에 이야기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설쓰기에서 제한성 혹은 한계성을 말하게 된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원고지에 다 쓸 수가 없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 독특한 것만을 써야 한정된 지면에 다 쓰게 된다. 대하소설이라고 해도 무진장으로 늘려서 쓸 수가 없다.

 

소설은 있었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적어 놓은 것이 아니다.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꾸며낸 이야기로서 허구성을 가지게 된다. 설화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구술되거나 기록되는 형식을 갖지만, 소설은 그와 같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시간의 역전기법으로. 혹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가공적으로 만들어낸 허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미국에서는 소설을 '픽션fiction'이라는 말로 쓴다.

 

소설은 편집성을 갖고 있다. 소설의 이야기는 일반 독자의 이성적 판단에 부합하거나, 호응할 수 있도록 꾸며져야 한다. 만약 소설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상력으로만 꾸며진다면 독자는 흥미를 잃게 된다. 여기서 편집성이란 소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도 사실처럼 믿음이 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인간과 사회성에 관한 것으로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인권. 행복 같은 근대적 가치관을 구현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20세기에 와서는 이러한 가치관들이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소설을 창작해 내기도 한다. 내면의식을 다룬 소설일지라도 그것이 역사나 당대사회의 상황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간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인간적 의미를 갖게 된다.

 

소설 속의 인물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행동이나 태도를 보여주고, 그의 인간관. 세계관을 나타나게 된다. 소설은 인간의 감정문제로 사랑. 행복. 불행. 질투. 기쁨. 슬픔. 분노. 증오 같은 것을 담게 된다. 또한 환락을 추구하는 악마적 요소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는 영혼문제. 부정의. 불평등. 억압에 대한 항거와 같은 정치적 문제. 빈부. 직업. 소외. 환경과 같은 사회적 문제 등을 두루 다루게 된다.

 

 

그렇다면 소설을 왜 쓰려고 하는가.

 

혹자들은 소설가의 인생이 흥분에 쌓여있고 노력한 것만큼의 보상과 명성으로 충만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피나는 노력을 하고도 좌절감에 사로잡혀 자학을 하기가 일쑤다. 한번 좋은 작품으로 명성을 날렸다고 해도 또다시 좋은 작품을 쓰기란 쉽지가 않다. 다시 말해서 늘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명 작가의 전기를 읽어보면 ‘이광수’는 창씨개명으로 민족정신을 훼절했고, 비참한 생을 살은 소설가로는 ‘김동인’과 ‘이상’을 살펴보게 된다. 소설을 쓰는 일은 밝은 빛과 어두운 빛이 같이 쓰게 된다. 늘 밝은 면만을 쓸 수가 없지만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한 형태로서 개인에게 발생하는 소극적 혹은 적극적 죄의식. 모욕. 비극. 우스꽝스러운 일 등을 정화시켜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쓰게 된다. 사랑이나 종교를 제외하고 그 어느 영역에서도 자신의 ‘생활’과 ‘사멸’이라는 무거운 짐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소설쓰기에서는 자유롭게 표현되고, 고백할 수 있어서 쓰게 된다.

 

소설을 쓰는데 시간과 정력을 다 쏟아 붓고,

타인의 조롱까지 감수할 수 있을 만치 소설쓰기에 가치를 느낀다면, 그 때에는 다른 직업을 포기하고 소설쓰기를 해야 한다. 무슨 직업을 가졌든지 간에 이를 버리고, 소설쓰기에 전념하는 충실성이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음미해보거가. 혹은 미적가치에 관점을 두거나. 사회적 효용성에 가치를 두는 일 따위가 소설을 쓰는 목적이 된다는 것을 덮어 두더라도, 즐거움과 가치를 선사하는 희열을 맛보기 위해서 소설을 쓰게 된다. 소설가가 생생한 현실 속에서 얻은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일은 장인이 명품을 만드는 행위와 같다. 무한한 인내심과 노력. 그것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시인이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문학의 현란眩亂성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그런 행위들이 문학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현란성이 없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거나, 읽어주지 않는 데도 모든 정열을 받쳐서 쓴다. 문학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만 혹자들은 현란성에 더 매료되어서 칭찬하고 흥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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