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시민들이 암매장됐다는 증언이 잇따른 옛 광주교소도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2015년 10월 교도소가 이전하면서 지금은 빈 건물만 남았지만, 1980년 5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혹은 가득하다.
37년 만에 광주교도소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뤄진 것은 5·18 당시 계엄군들의 양심 고백이 발단이 됐다. 그중 3공수여단 본대 대장이었던 김모 소령의 진술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과 20사단 병력이 주둔했다.
옛 광주교도소 전경(위)과 5·18 당시 3공수여단에 근무했던 김모 소령이 작성한 암매장 위치 약도(아래). 사진=뉴시스
1995년 5월 29일 김 소령은 서울지검 조사에서 “교도소 담장에서 3m 정도 이격해 시신을 매장했다”며 “관을 사용하지 않았고 가마니로 시신 2구씩 덮고 묻었다”고 진술했다. 직접 작성한 암매장 위치 약도도 제출했다.
이번 발굴의 첫 장소는 5·18 당시 재소자들이 농사를 짓던 교도소 북측 담장 인근 농장 부지다. 5·18기념재단은 김 소령의 약도를 토대로 발굴 장소를 확정했다. 약도는 검찰 수사에서 방치됐다가 최근 재단이 찾아냈다.
5일 오전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 북측 담장 인근 철조망에 5·18 암매장 추정지 발굴조사 현수막이 붙어 있다. 기념재단 등은 전날 중장비를 동원해 잡초와 콘크리트를 걷어내는 작업을 마쳤으며 6일 오전 발굴 작업을 재개할 계획이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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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수 대원들의 양심고백도 진실에 힘을 실었다. 5·18 당시 교도소에 주둔했던 제3공수 15대대의 김모 하사는 지난 9월 재단에 직접 암매장 정보를 알렸다. 그는 “부대원과 함께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전복된 차 안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하루 정도 방치했다”며 “암매장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방치된 시신에서 악취가 나 5~7구를 가매장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관이 없어서 그냥 묻었다. 신분증을 가슴에 놓고 나중에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덧붙였다.
1989년 1월, 3공수 제11대대 소속이었던 이모씨도 “교도소장 관사 인근쪽에 8명을 직접 묻었다”고 밝혔다. 당시 이씨의 제보는 실제 발굴 작업까지 이어졌지만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이씨가 증언한 장소는 계엄군이 철수한 직후인 1980년 5월 30일 땅에 묻혀 있던 8구의 시신이 이미 수습됐던 곳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877629&code=61121111&sid1=soc&cp=nv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