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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 러시아 공사관인 아국 공사관(俄國 公使館) 이어(移御)
 김민수
 2013-11-13 16:39:17  |   조회: 2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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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 러시아 공사관인 아국 공사관(俄國 公使館) 이어(移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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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건양(建陽) 1)년 2월 11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 와 왕태자(王太子:이척)는 대정동(大貞洞)의 러시아 공사관인 아국 공사관(俄國 公使館)으로 주필(駐蹕)을 이어(移御)하였고, 명헌태후인 왕태후(王太后)와 왕태자비(王太子妃) 민씨는 경운궁(慶運宮)에 이어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죄가 있으면 반드시 승복시켜 나라 법에서 도피하지 못함은 상리(常理)이다. 아! 지난 8월 20일 사변이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때 은밀히 꾸민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은 구문(究問)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우리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다같이 알고서 함께 분노하는 것이다. 그 우두머리 악한은 사실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오늘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아서 역적의 우두머리는 처단되었다. 도망친 죄인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권영진(權濚鎭),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등은 기일을 정해 놓고 잡아오며, 그 나머지는 당시에 부추김과 사주를 받았던 자라도 사세(事勢)에 구애되거나 권력에 강요당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일체 우리의 대소 신료(大小 臣僚)와 중외(中外)의 군민(軍民)은 각기 그 전과 같이 안착하고 의심을 품지 말라.”하였다.


또 칙령을 내리기를, “이 번에 춘천(春川) 등지에서 백성들이 소란을 피운 것은 단발(斷髮) 때문이 아니라 대체로 8월 20일 사변 때 쌓인 울분이 가슴에 가득 차서 그 것을 계기로 폭발한 것을 묻지 않고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이미 국적(國賊) 법에 의해 처단되고 나머지 무리들도 차례로 다스릴 것이니 지난 번에 교화하기 어렵던 백성들도 아마 틀림없이 알고는 옛날의 울분을 쾌히 풀 것이다. 해당 지방에 주둔하는 군대는 반드시 먼저 이 조칙(詔勅)을 춘천부(春川府)에 모여 있는 백성들에게 보여 각각 귀화하여 생업에 안착하도록 하고, 그 두목 이하에 대해서는 모두 내버려두고 묻지 않음으로써 모두 함께 유신(維新)하도록 하며 너희 군대의 대소 무관(武官)과 병졸(兵卒)들은 즉시 환군하라.”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국적을 잡아서 이미 중형에 처하였으니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시원히 풀었다. 좌우 감옥서(左右 監獄署)에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은 모두 즉시 석방하여 널리 용서하는 은전(恩典)을 보여 주어라.”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칙령을 내리기를, “8월의 변고는 만고(萬古)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명성황후인 왕후(王后)가 붕서(崩逝)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詔勅)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다가 다행히 천벌이 내려 우두머리가 처단당한 결과 나라의 예법이 겨우 거행되고 나라의 체면이 조금 서게 되었다.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만약 하늘이 태묘 사직(太廟 社稷)을 돕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역적 무리들이 물들이고 입김을 불어넣은 자들이 하나둘만이 아니니 앞에서는 받들고 뒤에서는 음흉한 짓을 할 자들이 없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변란을 일으켰다는 오해로 인한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는 을미년(1895) 8월 22일의 조칙은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취소하라.”하였다.


1896년 2월 13일 모든 백성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임금은 백성의 표준이니 임금이 아니면 백성들이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임금은 일거 일동(一擧一動)을 백성들에게 명백히 보이는 것이 귀중하다. 그저께 일은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의 우두머리와 반역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의 진상이 숨길 수 없게 되자 막아버리고 승복시키는 방도가 혹 허술한가 걱정하여 외국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대로 임시 방편을 써서 짐이 왕태자(王太子)를 데리고 대정동(大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 주관(公使 駐館)에 잠시 가 있는 뒤에 왕태후(王太后)는 왕태자비(王太子妃)를 데리고 경운궁(慶運宮)으로 갔으며 짐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든 범인을 잡게 하고 그들이 묶인 다음에 곧 돌아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범인을 묶을 때에 우민(愚民)들이 폭동하여 갑자기 살해하고 나머지 범인은 모두 다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쳐버리니 군중의 심리가 더욱 흉흉하여 안정되지 않고 있다. 이 때를 당하여 짐이 있는 곳을 너희들 백성들에게 명백히 알릴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대궐이 무사하고 민심이 여느 때와 같게 되었으니 짐이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기는 바이다. 며칠 안으로 장차 대궐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명백히 알리니 너희들 백성들은 각각 의심을 풀고 생업에 안착하라.”하였다.
2013-11-13 16: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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