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2년 3월 25일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대궐에 나아가 조선국 10대 국왕 연조(연산군:묘호 추상)에게 아뢰기를, “관청의 땔감 채취를 위하여 특별히 지정된 삼림지역인 시장(柴場)은 백성에게 폐가 너무 많습니다. 임금이 비록 높지만 사직에 견준다면 임금이 경(輕)하고 백성이 중합니다. (순자(筍子) 왕제편(王制篇)에 “임금은 배요 서인은 물이니 물은 배를 싣기도 하고 엎기도 한다. 군자주야 서인자수야 수즉재주 수즉복주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하였다.) 순자(筍子)가 물은 백성에 비유하고 배를 임금에 비유한 것은 물이 능히 배를 뜨게 할 수도 있고 또한 능히 배를 뒤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기를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친애스러운 것은 임금이 아니며 두려운 것은 백성이 아닌가? 백성들은 임금이 없다면 누구를 떠받들며, 임금은 백성이 없다면 누구와 나라를 지킬것인가? 가애비군 가외비민 중비원후하대 후비중망여수방(可愛非君 可畏非民 衆非元后何戴 后非衆罔與守邦)”고 하였다.) ‘두려운 것은 백성이 아닌가? 가외비민(可畏非民)’하였으니, 그들이 이반(離叛)하면 나라가 임금의 나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 등이 전하께 의심을 두는 것이 어찌 과실이겠습니까? 마음속에 의심을 품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는다면 이 것이 과실일 것이며 죽어도 여죄(餘罪)가 있는 까닭으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과실이 있으면 마땅히 면전(面前)에서 직언(直言)할 수 있는 것인데, 후원의 나무를 어찌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조종(祖宗) 때에는 더러 편복(便服)으로 여러 신하를 후원에서 접견하셨고, 더러는 대전과 중전인 양전(兩殿)께서 함께 납실 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시므로 신 등이 또한 일찍이 시종한 적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무슨 감출 바가 있겠습니까? 비록 감춘다 하더라도 바깥 사람들이 모를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 임금의 덕(德)은 다만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사람을 알아보아 잘 맡길 뿐이요, 그 풍월(風月)의 창수(唱酬)·활쏘기 같은 것은 임금의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신 등이 성은(聖恩)을 입어 외람되어 중임(重任)에 있으니, 아래로 백성들을 생각하여 근심과 고민을 견딜 수 없으므로 감히 생각한 바를 말씀드립니다. 전하께서는 받아들이기를 꺼리지 마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관청의 땔감 채취를 위하여 특별히 지정된 삼림지역인 시장(柴場)은 여러 군(君)들에게 주지 말라. 후원의 일은 (시경 대아(大雅) 영대편(靈臺篇)에, “왕이 영유에 계시니 우록이 거기 있도다. 우록은 탁탁하거늘 백조는 학학하도다. 왕이 영소에 계시니 아! 그득하게 고기가 뛰논다. 왕유영유 우록유복 우록탁탁 백조학학 왕재영소 어인어약(王有靈囿 麀鹿攸伏 麀鹿濯濯 白鳥鶴鶴 王在靈沼 於牣魚躍)”하였는데, 맹자(孟子) 양 혜왕(梁 惠王) 상(上)에 맹자가 양 혜왕(梁 惠王)과 이야기하면서 “백성이 싫어한다면 비록 ‘대와 못, 새와 짐승’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홀로 즐길 수 있을 것입니까?”고 하였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비록 대(臺)와 못 지(池), 새와 짐승 조수(鳥獸)가 있더라도 어찌 혼자 즐길 수 있으랴.’하였으니, 경들의 말이 옳다.”하였다.
숙종대왕 묘지문(墓誌文)에 이르기를, “왕이 처음에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저술하여 대신(大臣)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군주는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연후에 배가 안정되고 신하가 현명한 연후에 군주가 편안하다.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도(圖)의 뜻을 본받아 보필(輔弼)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고 말하였다.”하였다. 숙종대왕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일찍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주수도(舟水圖)를 제작하게 했는데, 친히 글을 짓고 그 위에 써서 좌석 옆에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어느날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뒤에 배가 편안하고, 신하가 현명(賢明)한 뒤에 임금이 편안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그림의 의미를 체득하여 보필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하였다.”하였다. 1779년 8월 3일 정조가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한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 느끼는 것은 흔히 사물을 만날 때에 있거니와, 옛 사람이 이른바 유(類)를 따라서 부연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 성조(聖祖)께서 주수도(舟水圖)를 만들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그 명(銘)을 짓고 그 일에 대하여 서문(序文)을 쓰게 하셨다.” 하고, 이어서 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음식을 베풀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