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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국왕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
 김민수_
 2013-08-23 23:24:13  |   조회: 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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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국왕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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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왜국(倭國)이 요동(遼東)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고 14대 국왕 선조(宣祖)가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왜국(倭國)이 군사를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4월 29일 광해군(光海君)을 세워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가 동궁(東宮)으로 나오니 요속(僚屬)과 백관들이 진하(陳賀)하였다.1608년 2월 2일 대신과 정원(政院: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홍문관(弘文館))이 다섯 번 달하여 속히 어좌에 나아갈 것을 청하니 재삼 사양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세자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경운궁(慶運宮))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고 나서 신하들의 하례(賀禮)를 받았다.경시(庚時)에 15대 국왕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이 면복을 갖추고 대정(大庭)의 배위(拜位)로 나아가 어좌에 오르니 대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부른 다음 머리 조아려 절하고 하례(賀禮)를 끝마쳤다. 1608년 4월 1일 이항복(李恒福)을 4도(四道)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았다. 5월 7일 전교하기를 “사친(私親)의 신주(神主)를 역모한 자의 집에 오래 둘 수 없으니 효경전(孝敬殿)에 옮겨 두도록 하라.”하니, 대사간 최유원(崔有源)이 아뢰기를, “효경전은 바로 별궁(別宮)이니 사친의 신주를 봉안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왕이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예조가 아뢰기를, “사묘(私廟)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 봉안하는 것은 참으로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감궁(監宮)이 효경전 안에 있으니, 비록 임시로 한때 안치하는 것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되고 마니 절대로 이곳에 옮겨 봉안할 수 없습니다. 병화(兵火)를 입지 않은 연지동(蓮池洞)의 옛 궁이 아직도 한두 청사(廳舍) 남아 있으니, 이곳에다 옮겨 봉안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제사를 주관하는 문제는 사체상 중대한 일이어서 참으로 해조에서 쉽게 강정(講定)하기 곤란하니, 대간이 아뢴 것에 따라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여 품의해 결정하여 시행하소서.”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5월 8일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였다.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進上)하는 공물(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 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따랐다.그런데 전교 가운데에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청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의정(議政)을 도제조(都提調)로 삼고, 호조 판서가 부제조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낭청 2원(員)을 두었다.이 뒤로 수령이 못된 자일 경우 정해진 법 밖에 더 거두어도 금할 수 없었고, 혹은 연호(烟戶)를 침탈해서 법으로 정한 뜻을 다 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전의 전결에 대한 역(役)은 이에 힘입어 조금 나아졌다.







5월 30일 태묘(太廟)를 중건(重建)하여 낙성(落成)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예조가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의논해 보았습니다. 아성부원군 이산해, 좌의정 이항복, 중추부의 으뜸 벼슬 판부사(判府事) 윤승훈, 청평부원군 한응인이 말하기를 ‘옮겨 봉안하는 것은 크게 경사스러운 일이고 어느 것을 먼저 옮기고 어느 것을 나중에 옮기냐 하는 것은 사소한 순서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소한 순서 때문에 크게 경사스러운 일에 인색하여 뭇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면 영녕전(永寧殿)과 태묘(太廟)가 본래 다른 전(殿)이니, 구분해 별개의 행사로 하여 차례대로 옮겨 봉안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삼가 전하께서 헤아려 정하기 바란다. ’ 하였습니다.”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날 태묘와 영녕전의 신주를 옮겨 봉안하는 묘전이안례(廟殿移安禮)를 마쳤다.7월 4일 예조가 아뢰기를,“태묘(太廟)가 중건되어 의절을 갖추어 이안(移安)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국가의 전에 없었던 경사입니다. 정원이 아뢴 대로 한성과 지방에 포고하소서.”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8월 4일 궁중(宮中)의 기름ㆍ꿀ㆍ과일을 관리(管理)하는 의영고(義盈庫)를 다시 설치하였다.9월 5일 전라도의 전세선(田稅船) 17척이 영흥도(靈興島:인천 옹진)에 정박하였는데, 폭우가 물을 들어붓듯이 오고 미친 듯이 사납게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침몰하였다고 경기 수사 김거병(金去病)이 보고하였다.



1609년 1월 1일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이 영모전(永慕殿)에서 정조제(正朝祭)를 친히 지내고, 이어 인정전(仁政殿)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이 전(殿)은 선조(先朝) 때 건립하기 시작하여 완공을 보지 못했던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낙성(落成)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예를 행하였다.1월 18일 전교하였다. “근자에 북쪽의 보고를 보건대 우려할 만한 사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먼저 방어할 계책을 세우되 엉성하고 느슨하게 하지 말라. 전일에 함경도 북병영(北兵營:경성(鏡城))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인 북병사(北兵使)가 계청한 방비에 첨보(添補)할 군사와 화기(火器) 등의 물건을 이미 조달해 보냈는가? 만약 급한 일이 생길 경우 남병(南兵)이 달려가 구원할 계책도 미리 강구해 놓고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니, 이 뜻을 비변사에 이르라.”1월 21일 능 위의 병풍석(屛風石) 등이 갈라졌다는 수릉관(守陵官)의 서목(書目)으로 입계하니, 치계(馳啓)에 대하여 전교하기를,“산릉에 역사를 마친 지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능 위에 기울고 무너진 곳이 이처럼 심하고 많으니 지극히 미안하다. 서둘러 봉심(奉審)하고 수리할 것을 예조에 이르라.”하였다.











2월 13일 묘시(卯時)에 자전(慈殿)이 친제하기 위해 영모전(永慕殿)으로 나아가는데, 중궁(中宮)이 배행(陪行)하고 선왕의 후궁들도 그 뒤를 따랐다. 자전이 궁을 나아갈 때 왕이 차비문(差備門) 밖 막차(幕次)에 거둥하여 있다가 자전이 탄 연(輦)이 지날 때 왕이 막차에서 나와 몸을 굽혀 지송(祗送)한 뒤에 대내(大內)로 돌아오니 중전이 지나갔다.1610년 3월 29일 사친(私親)인 공빈(恭嬪) 김씨를 추존하여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삼았다. 전(殿)의 이름은 봉자(奉慈)라 하였고, 능(陵)의 이름은 성능(成陵)이라 하였다. 윤3월 22일 전교하였다.“우리나라의 서적(書籍)은 전질(全秩)을 제대로 갖춘 것이 전혀 없다. 그 중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내훈(內訓)·서전언해(書傳諺解)·시전언해(詩傳諺解)·유선록(儒先錄) 등의 책은 좌전(左傳)의 인쇄가 끝나는 뒤에 즉시 계속 인쇄할 것을 교서관(校書館)에 말하라.”1614년 1월 15일 전교하였다. “실록(實錄)을 편집하는 일에 있어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실로 심하여 그 일이 언제 끝날지 기한이 없으니 대신은 특별히 더욱 엄하게 독책해서 속히 완료하도록 하라.”1617년 3월 11일 한찬남(韓纘男)이 아뢰기를,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의 원질(元帙) 18권을 공홍(公洪)·평안(平安)·황연(黃延)·경상(慶尙)·전라(全羅) 등 5도에서 나누어 간행해서 50건(件)을 인출해서 진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공홍도에서 2백 권, 평안도에서 50권, 황연도에서 1백 50권, 경상도에서 2백 권, 전라도에서 3백 권 등 총 9백 권을 다 들였습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1617년 7월 29일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이 전교하였다. “피우처(避寓處)의 이름을 ‘경덕궁(慶德宮:경희궁(慶熙宮))’으로 정하라고 도감에 말하라. 그리고 ‘홍정(弘政)’은 조하전(朝賀殿)에다 쓰고 ‘광정(光政)’은 시사전(視事殿)에 쓰는 일을 도감으로 하여금 살펴서 하게 하라.”8월 3일 전교하였다.“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과 경덕궁(慶德宮:경희궁(慶熙宮)은 반드시 내가 직접 가서 여러 번 상의하고 살펴본 연후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한두 번 가서 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光政殿)·홍정전(弘政殿) 두 궁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린 후에 내당과 외당 중 한 곳을 서둘러 먼저 지어놓으면 내가 수시로 거둥하여 직접 대내를 볼 것이니, 그리하면 분부하는 대로 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을 잘 알아서 되도록 빨리 조성할 일로 도감에 말하라.” 8월 6일 전교하였다. “경덕궁(慶德宮:경희궁(慶熙宮))의 동쪽이 허술한 듯하니, 신순일(申純一)과 진산군(珍山君)의 집 근처에 누각 하나를 축조하고 큰 연못을 깊게 판 다음 가운데에다 한 개의 섬을 쌓아서 동방을 진압시키되, 아무 공망일(空亡日) 모여 지형을 살펴보고 여러 술관(術官)에게 상세히 물어서 아뢸 것을 도감에 말하라.”9월 5일 전교하였다.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은 비록 명년까지라 하더라도 공사를 마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피우처(避寓處) 경덕궁(慶德宮:경희궁(慶熙宮))의 공사는 방대하지 않으니 잘 상의해서 요리한다면 명년 내에 공사를 마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각별히 공사를 감독해서 경덕궁의 공사를 먼저 끝낼 수 있도록 도감에 말하라.”하였다.







1618년 4월 4일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이 전교하였다.“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을 장차 푸른 기와로 덮고 근정전(勤政殿)의 예에 따라 단청에 쓰는 진한 채색으로 칠하려 하니 특별히 더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외방에서 올려 보낸 은자(銀子)를 이번에 부경(赴京)하는 세 차례 사신 행차에 따라가는 화원(畫員)들에게 똑같이 나눠주어 채색(彩色)을 골라 무역해 오도록 하라고 도감에 이르라.”4월 9일 전교하였다.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정문(正門) 명화문(明化門)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중층문(重層門)으로 조성하고, 경덕궁(慶德宮)은 그저 잠시 피해 거처하는 피우처(避寓處)일 뿐이니 단층문(單層門)으로 알아서 조성하도록 하라. 그리고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은 곧바로 급히 처치했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결정하지 않았는가.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4월 28일 영건도감이 아뢰기를,“황와(黃瓦)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석자황(石雌黃)을 창졸간에 많이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시기에 맞춰 구워내야만 장마가 닥치기 전에 홍(弘)·정(政) 등 양전(兩殿)의 지붕을 덮을 수가 있는데 여러 곳에서 무역해 얻는 숫자가 매우 약소한 데다 무역해 올 즈음에 걸핏하면 열흘이나 한 달을 넘기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잡물소(雜物所)와 채색소(彩色所)에서 입수하여 구비해 놓은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용도가 급하지 않다 하니 10여 근(斤)을 우선 가져다 쓰고서 선득리(宣得李)가 무역해 오면 빌린 만큼 상환(償還)토록 했으면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윤4월 16일 영건도감이 아뢰기를, “전교하시기를 ‘인경궁(仁慶宮:서울시 종로구 장동,누각동,필운동)에 금천교(禁川橋:체부동,내자동)를 들일 경우 철거해야 할 각사(各司)와 인가의 수 및 집 주인의 성명을 서계(書啓)하고, 금천교를 들이지 않을 경우 철거해야 할 각사와 인가의 수 및 집 주인의 성명을 일일이 그림으로 작성해서 녹계(錄啓)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금천교를 궐내에 들일 경우에는 당연히 물려서 쌓아야 하는데 그때 담 내외로 철거해야 할 인가는 모두 76호(戶)입니다. 그리고 궐내로 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별로 물려서 쌓을 일은 없고 단지 어로(御路)만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철거해야 할 집은 34호입니다. 상기 두 조목에 대해 모두 녹계드립니다.”하니, 답하기를,“알았다.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에 금천교를 들여서 짓지 않는다면 보기에 형편없을 듯하니, 승려 성지(性智)와 중국에서 귀화한 술인(術人) 시문용(施文用)에게 자세히 물어보고서 좋은 쪽으로 선처하도록 하라.”하였다.5월 15일 전교하였다. “근일 대내(大內)에 요망스러운 변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 입직(入直)한 상하 인원이 잇달아 병으로 죽고 있다. 구례(舊例)를 가지고 말한다면 조종조에서는 즉각 이어(移御)했었고 민간의 사대부들 집에서도 조금만 사고가 생기면 모두 백성들을 쫓아내고 그 집을 피하는 장소로 삼아 점유하곤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군상(君上)으로서 불안한 장소에 고집부리며 있어야 하는가. 사정이 온당치 못하다.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자니 그 곳도 깨끗하지가 않아 옮겨 갈 수가 없다. 그런데 피우처(避寓處) 경덕궁(慶德宮)의 공사가 반 이상 진행되었으니 잘 감독만 하면 올해는 완공을 못하더라도 내년에는 공사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대내와 동궁(東宮)을 각 아문에서 각별히 감독하여 조속히 끝내도록 하라. 그리고 제조와 도청은 일찍 출근해 종일 감독하고 일찍 퇴근하지 말도록 한 일을 각별히 더 착실하게 거행하라고 도감에 말하라.” 6월 19일 인시(寅時) 초에 왕이 인경궁(仁慶宮)에 가서 공사의 진행 과정을 살피고 형세를 두루 훑어보면서 공사 일정을 독촉한 뒤 해가 지자 환궁하였다.





1619년 4월 19일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이 전교하기를, “진주문(陳奏文) 중에 후금 한(後金 汗)의 인보(印寶)를 후금 황제라고 진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비변사로 하여금 전교에 따라 자세히 살펴 아뢰게 하라.”하니, 회계하기를, “노추(奴酋)의 서신 가운데 인보 글씨는 전자(篆字)를 아는 신여도(申汝櫂) 및 몽학 통사(蒙學 通事)에게 풀어보라고 하였더니, 전자 모양의 번자(番字)는 모두가 후금 천명황제(後金 天命皇帝)라는 여섯 글자였다고 하므로 진주문 중에 이 뜻을 갖추어 써넣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이처럼 번역하여 풀 것이 아니라 범연하게 알아볼 수 없다는 뜻으로 삭제하고 고치는 것이 합당할 것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8월 25일 신궐영건도감이 아뢰기를,“경덕궁 터에 있는 사복시(司僕寺)를 이전하고 담장을 물려 쌓는 일로 신들이 오늘 전하의 행차를 따라 들어가서 사복시의 청사를 지을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동궁의 별당, 봉상시의 별당과 서로 근접하여 있으나 이 지역은 햇살이 잘 비치는 곳이어서 짐승들이 번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 이 때문에 애당초 입계하여 터를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복시의 관원들은 ‘지형이 협소하여 절대로 그대로 짓기가 곤란하다. 만약 남문 안의 널찍한 곳으로 이전한다면 매우 편리하겠다.’라고 하였고, 풍수를 보는 관원도 ‘이 곳이 태양을 정면으로 받는 위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햇볕을 측면으로 받는 간방(間方)으로 터를 잡는다면 또한 다음 가는 길지(吉地)가 되며 이전하는 것이 무방하다. ’ 하였으니, 이들의 의견에 따라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그리고 장악원(掌樂院)의 빈터는 대내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굳이 대내로 편입할 필요가 없으며, 각 전당(殿堂)과 대소 아문이 모두 이미 서로 적당하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비록 대궐 안으로 편입한다 하더라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더구나 풍수를 보는 관원의 말도 ‘동방이 허(虛)한 듯하나 이곳의 지형이 우뚝하게 돌출하여 궁궐 담장 밖에 낮은 담장을 둘러치고 수목을 많이 심어서, 마치 함춘원(含春苑)·상림원(上林苑)과 같이 한다면 지리적인 여건이 가장 좋다.’고 하였습니다.대개 새로운 궁궐을 지을 때에는 오로지 길(吉)한 자리를 잡아야 되니 풍수지리를 보는 자의 말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전하의 결재를 바랍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전에 지은 사복시 건물이 동궁과 매우 가까우니 대내로 들여보내도록 하라.”하였다.







1620년 3월 22일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이 경덕궁에 거둥하여 후원을 두루 보고 인왕산(仁王山) 아래 초천(椒泉)에까지 이르렀다.1621년 9월 13일 전교하기를, “앞으로 대례가 연거푸 있는데, 날씨가 일정치 않다. 오랫동안 비가 내릴 때 날이 맑기를 기도하는 기청제(祈晴祭)를 다시 속히 지내도록 하라.”하였다.10월 28일 4경에 왕이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예를 마친 뒤 경덕궁(慶德宮)으로 돌아왔다. 사시 초에 대궐로 돌아와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고 한성과 지방에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하는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1621년 12월 14일 한성부가 아뢰기를, “내빙고(內氷庫)의 얼음을 저장하는 장빙(藏氷)을 이제 실시하려 하는데 금년에는 천사(天使)가 왕래할 때 침학이 자못 많아 연안의 방민(坊民)이 거의 도망하였습니다. 반드시 특별히 조처하여도 오히려 일을 마칠지 걱정되는데, 더구나 여러 도감의 상사(上司)가 전일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부득이 전의 규례 중에 마땅히 시행해야 할 조목을 하나하나 거행하여야만 전도되는 폐단을 면할 수 있겠습니다.본부에 소속된 수레는 모두 영건 도감에 들어가고 한 대도 남은 것이 없으니, 장빙을 마칠 때까지 남김없이 덜어내서 얼음을 운반하는 데 쓰게 하소서. 수레꾼과 마부 및 연안의 방민들로서 궁가(宮家)나 사대부가에 부탁하고 위세를 빙자하여 얼음을 운송하지 않는 자는 법사(法司)로 하여금 가두어 엄히 다스리게 한 후, 그 본래 주인도 계청하여 파직하고 추고하게 하소서.포수(砲手)·살수(殺水)·사수(射手)·조례(皀隷)·나장(羅將)·상사(上司)의 하인·어부·진부(津夫)·빙부(氷夫)·악공(樂工)·악생(樂生)·역리(驛吏)·여러 종류의 공장(工匠)·율도(栗島)의 산직(山直) 등을 모두 장빙에 부역시키되, 그중 거역하는 자는 법사로 하여금 가두어 엄히 다스리게 하소서.



강 연안의 각 고을 중에서 계(契)가 깨졌다고 하면서 부역에 불응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이 또한 방민(坊民)이니 전례대로 적발하여 포도청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게 하소서.내빙고 빙정(氷丁)의 가미(價米)는 호조에서 해마다 깎아서 지불하기 때문에 항상 백성들이 원망합니다. 금년은 여러 도감의 부역이 전보다 열 배나 더하여 백성의 고통과 원망이 크니 전례에 따라 깎지 말고 지불하소서. 그리고 내빙고의 장빙을 마칠 때까지 여러 도감에서 시행하는 모든 공사의 물자 수송은 우선 중지시키소서.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빠져 승전(承傳)을 받든 일이라 하더라도 도리어 개인집의 청탁만도 못하게 여깁니다. 지난해 장빙할 때 여러 곳에서 침학을 받아 지연되어 간신히 장빙을 마쳤습니다. 이제 변통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지난해보다 심할 것이니 매우 우려됩니다. 해당 각사의 관원과 서부 주부(西部 主簿) 장흔(張昕), 남부 주부 남변(南忭), 북부 참봉 이제현(李濟賢) 등을 외빙고의 규례에 의거하여 따로 벌빙관(伐氷官)으로 차정하여 날마다 강에 나가 감독하게 하고 직접 얼음을 인수하여 즉시 장빙하게 하소서. 만약 태만한 부관(部官)이 있으면 먼저 파면한 후에 추고하소서. 위의 모든 사항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일체를 구례에 의거하여 살펴 장빙해야 할 것이며, 사한제(司寒祭)를 거행한 후 시작하되 작년처럼 하지 말고 열흘 내내 벌빙과 장빙을 마치도록 하라. 장빙을 마치기 전에 벌빙을 감독하는 관리가 마음대로 먼저 들어오면 잡아다 추고할 것이다. 이 일을 검칙하여 시행하라.”하였다.



1622년 2월 26일 신궐영건도감(新闕營建都監)이 아뢰기를, “비망기에 ‘삼가 듣건대, 경복궁 터 안에 각 아문(衙門)을 조성하는 일에 대하여 한성과 외방에서 모두들 또 이 궁을 지어 요망한 말을 선동한다고 한다 하니 각 아문을 이 궁의 터 안에 지어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인경궁(仁慶宮) 남문 밖 빈 대지에 3, 4아문을 지을 만하니 남쪽 담장을 물려서 쌓게된들 어떻겠는가. 연고와 마랑을 관리하는 내사복(內司僕)의 경우는 사직천(社稷川)의 물을 끌어다 쓸 수 있고, 승문원(承文院)은 5위(五衛)의 군무(軍務)를 총괄한 총부(摠府) 근처에 조성할 수 있으니, 빨리 상의하여 미리 터를 닦기 시작하여 초석을 놓고서 재목을 올려 온 후에 즉시 기둥을 세워 짓도록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경복궁에 각 아문을 짓지 말라는 전교는 실로 뜬 말을 진정시키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남쪽 담장을 물려서 쌓도록 하겠습니다. 물려서 쌓을 터는 반드시 도제조 이하가 회동하여 살펴서 정한 후에야 미진하다는 후회가 없을 수 있으니, 무고한 날 빨리 다같이 모여 중사(中使)와 함께 살펴 정하여 계하한 후에 물려 쌓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인가가 또 들어가게 되면 남쪽 담장 밖 내자시의 터에 아무 아문만 지어서 인가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 내사복(內司僕)은 경복궁 터 안에, 승문원과 상의원은 이 궁의 아무 곳에 조성할 일을 빨리 의논하여 처리하라.”하였다.



또 아뢰기를, “인경궁 안의 지세가 원래 좁은 것은 아니지만 서북쪽 담장 근처는 응당 금원(禁苑)에 들어가기 때문에 다섯 아문을 지을 만한 곳이 없어서 부득이 경복궁 안에 다섯 아문을 지으라는 하교를 내리신 것인데 이 하교가 한번 내려짐에 유언비어가 선동하였으니 어찌 너무도 상서롭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성상께서 이 것을 염려하여 남쪽 담장을 물려 쌓고서 네 아문을 아울러 지으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경복궁의 공사는 없던 것으로 하라고 하셨으니, 이 말을 보고 들은 자들 가운데 누가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의 의혹이 이로부터 진정되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남쪽 담장 밖 내자시의 빈 땅에는 세 아문을 들일 수 있고, 사복시(司僕寺)의 물줄기를 끌어들이는 곳의 경우는 여염의 집을 헐어야 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또 옛 재상의 유기(遺基)와 내관의 집도 그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 박홍도(朴弘道)의 생각으로는 명나라 감군(監軍)이 한성에 도착하게 되면 영선(營繕)하기가 불편하니 여러 공사를 아울러 끝마치는 것이 하루가 급하며 경복궁의 침역(寢役)은 오늘날의 막대한 거조이니 여염집이 헐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는 따질 것이 없다고 합니다. 신의 소견도 여기에서 나왔는데 진실로 이 말을 하면 원망의 소리가 모여들 줄 압니다만 중요한 바가 여기에 있으므로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성상의 결단에서 비롯되어 비망기로 이르셨던 말씀이 정녕하니, 다시 계하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인가가 들어오지 않게 하고서 네 아문을 짓는다면 남쪽 담장을 물려 쌓아도 될 것이다. 상세히 살펴 잘 처리하라.”하였다.







7월 20일 비변사에 전교하였다.“세 곳의 보장(保障)을 비록 정하더라도 하삼도는 의당 우리나라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곳이다. 적의 예봉이 가득차 삼도까지 짓밟히게 된다면 다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수원(水原)의·독성(禿城)·공주(公州)의 금강(錦江) 등지에 미리 요새를 만들어 굳게 지키어 적의 흉악한 공격을 막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7월 22일 비변사가 하교로 인하여 아뢰기를, “옛날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순신(李舜臣)은 기이한 꾀를 내어 왜적을 막으면서 바다를 방위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이순신이 왜적을 방어하던 법식에 따라 거북선을 만들고 기계를 갖출 일을 전라 좌수사와 우수사에게 명백하게 지시하여 보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빨리 이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들을 훈련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하기를 한결같이 이순신이 한 것과 같이 하도록 각별히 말해 보내라.”하였다.

8월 28일 광종(光宗:광해군 묘호(廟號) 추상(追上))이 전교하기를, “이 번에 문희현(文希賢)이 가는 것은 나라의 안위가 달려 있으니, 경들은 희현이 거기에 가서 대답할 말을 뽑아내어 자세히 가르쳐주어 보내도록 하라.”하니, 좌의정 박홍구(朴弘耉)가 아뢰기를, “문희현이 갈 때에 가지고 갈 국서(國書)는 이미 마련하였으나 문서의 격식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비국(備局)의 당상과 오랫동안 상의하였으나 아직까지도 결정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왜국에 보내는 서계(書啓)의 규식대로 하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서두에 낮추는 말을 하지 않고 끝에 국호(國號)도 쓰지 않는다면 저들이 반드시 화를 낼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비록 국서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좋은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오직 전하께서 처결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하고, 우의정 조정(趙挺)은 아뢰기를, “전날 적에게서 온 편지에 ‘후금국(後金國) 오랑캐 추장인 가한(可汗)’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만약 앞에 저들의 국호를 쓰지 않는다면 필시 오랑캐들이 전보다 갑절이나 화를 낼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서두에 ‘건주위(建州衛) 후금국 가한’이라고 써도 무방하다고 여겨집니다.”하고, 도승지 이덕형(李德泂)이 대신의 말로 아뢰기를,“국서를 쓰는 격식에 대해 삼사의 장관에게 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대사헌 남근은 아뢰기를, “이미 이웃 나라로 대우한 이상 국서의 서두에 국호를 쓰는 것이 왜 안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부제학 정조(鄭造)는 아뢰기를, “왜인을 대접하는 예대로 대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남쪽 오랑캐나 북쪽 오랑캐나 무슨 다른 점이 있습니까. 어보(御寶)를 찍어 보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하고, 대사간 유대건(兪大建)은 아뢰기를, “이웃 나라를 대하는 예로 대하는 것이 합당합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9월 10일 영건도감이 아뢰기를 “인경궁의 정문(正門) 명화문(明化門)이 벼락의 재해로 무너졌는데 개조하는 공사를 20일 이내에 이미 끝마쳤고 단청도 선명하므로 사람들이 모두가 공사를 속히 완성한 것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 이진영(李震英)은 감역관으로 6품으로 승진하는 포상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번 일로 보건대 칸 수는 다르지만 며칠 사이에 완성한 것에 있어서는 실지로 지난 날의 공사보다 더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사용하고 남은 물품은 단청이 13종류이고 철정(鐵釘)이 4백여 개이고 목제(木梯)는 무려 3백여 동(同)이나 되는데 이것으로 포목을 무역할 경우 한 달 경비의 수요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 낭청 전 판관 이여척(李汝惕), 감역관 이여항(李汝恒)을 각별히 포상하여 다른 사람을 권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이여척은 가자(加資)하고 이여항은 6품으로 전직시키라.”하였다.9월 23일 어명을 받들어 중죄인을 신문하는 의금부(義禁府)에 전교하였다. “근래에 병이 중한 죄인들을 뽑아 아뢰고 보증인을 세우고 죄수를 방면하는 보방(保放)하라고 하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유사(有司)들이 거행하지 않고 있다. 한 차례의 형을 받고 곧바로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는 형을 받지 않고도 병으로 죽는 사람도 있으니 이것이 어찌 날씨가 추운 탓이겠는가. 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모두가 타당치 않다. 즉시 모두 뽑아 아뢰고 보방하였다가 조금 낫거든 도로 가두도록 하라.”9월 25일 전교하였다. “공성왕후(恭聖王后)의 증조부모·조부모를 추증한 뒤에 석물과 비석을 세우고 신주를 다시 쓰게 할 것을 공홍 감사(公洪 監司)에게 하유하라." 12월 3일 전교하기를 “인경궁(仁慶宮)의 못을 판 곳에 경회루(慶會樓)의 제도에 따라 조성하되 높이와 크기는 경회루처럼 할 필요 없이 간략하게 하나의 누대(樓臺)를 지어 조정 신하들을 접견하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며 무사들을 시험보이는 장소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담당 제조 박홍도가 내일 그곳에 가서 중사(中使) 및 성지(性智)와 상의하여 아뢰도록 할 것을 도감에 이르라.”하였다.













1630년 3월 20일 인조가 인경궁(仁慶宮)에 거둥하여 자전을 문안하고, 이어 “풍정(豊呈)을 끝낸 뒤에 환궁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정원이 별궁(別宮)은 지존(至尊)이 여러 날 묵으실 곳이 못 된다는 이유로 환궁하기를 계청하였으나, 인조가 따르지 않았다.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앞으로 여러 날 이 궁에 머무르실 경우, 훈련도감의 군사들을 옛날 관례대로 합번(合番)하여 시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합번하게 하지 말고, 경덕궁(慶德宮)의 안팎을 수직(守直)하는 군사들을 이 곳으로 데리고 와 시위하게 하라.” 하였다. 1632년 6월 28일 인목대비 김씨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였다.대행대비의 빈전(殯殿)을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인조가 하교하기를, “이 곳에 빈전을 설치할 수 없으니 어둠을 틈타 경덕궁으로 옮겨 모셔야 한다. 초8일 이어(移御)할 때의 전례대로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도로에 포장을 높게 쳐서 가리게 하고, 내관이 매게 하라.”하였다. 예조가 옮겨 모실 때에 대전·중전·왕세자·세자빈궁은 소여(小輿)를 타고 뒤따르면서 상여를 에워쌀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수레를 타는 것은 심히 미안하니, 걸어서 따라가야 한다.”하였다.
2013-08-23 23: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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