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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사(左史)와 우사(右史)
 김민수_
 2013-08-19 18:10:07  |   조회: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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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사(左史)와 우사(右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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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년 9월 16일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등이 상서(上書)하여 편전(便殿)에 입시(入侍)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상서(上書)는 이러하였다. “예전에 열국(列國)에서는 각기 사관(史官)이 있어서, 무릇 군상(君上)의 일이라면 크게는 언행(言行)과 정사(政事)를, 작게는 동정(動靜)과 언동(言動)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지 않은 것이 없었으로, 권계(勸戒)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 것이 선왕(先王)이 관직(官職)을 설치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傳)에 이르기를, ‘움직이면 좌사(左史)가 이를 쓰고, 말하면 우사(右史)가 이를 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의 행동거지는 반드시 적는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옛 선철왕(先哲王)은 좌우를 두어 그 견문(見聞)을 밝게 하고, 기주(記注)를 상세히 하고자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천종(天縱)의 학문으로 고금(古今)에 두루 통하고, 천조(踐祚)하신 이래, 무릇 시행하시는 바는 움직이면 옛 선철왕(先哲王)을 본받으십니다. 그 정전(正殿)에 임어(臨御)하여 대신을 접견하시고, 만기(萬機)를 청단(聽斷)하실 때에는 반드시 신 등으로 하여금 전(殿)의 섬돌에 입시(入侍)하게 하여, 신 등이 천일(天日)의 광명(光明)과 가언(嘉言)·선행(善行)의 선포(宣布)와 대신·대간(臺諫)의 계사(啓事)를 몸소 보고, 모두 견문할 수 있게 하여, 신 등의 직책을 덜 막으신다면, 옛 선철왕(先哲王)의 사관(史官)을 대우한 것이 어찌 이에 지났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청화정(淸和亭)에 임어하기도 하고, 혹은 편전(便殿)에 임어하기도 하여, 만기(萬機)를 청단(聽斷)하고 대신을 예(禮)로 접견하면서도, 신 등으로 하여금 입시(入侍)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니, 그 사이에 언어(言語)와 정사(政事)가 가히 본받을 만하고, 가히 권계(勸戒)할 만한 것이 많을 터인데, 신 등이 바깥에 있으므로, 비록 일의 전말과 사유를 기록하고자 하더라도 그만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오로지 성시(盛時)의 한 가지 흠일 뿐만 아니라, 우러러 후대의 사군(嗣君)이 이를 또한 본받아 드디어 사신(史臣)의 입시(入侍)를 폐지하게 된다면, 작은 실수가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특별히 삼부(三府) 대신으로 하여금 매일 입시(入侍)하여 치도(治道)를 돕게 하시니, 이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부주(敷奏)하고 문답하는 것도 또한 의당 신 등이 갖추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만기(萬機)를 청단(聽斷)하고 대신을 예(禮)로 접견할 때이면, 비록 청화정이나 편전(便殿)에서라도 반드시 신 등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도록 하소서.”





1413년 1월 16일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조계(朝啓)에 입시(入侍)토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다. “예전은 천자가 동(動)하면 좌사(左史)가 이를 쓰고, 말하면 우사(右史)가 이를 쓰게 되니, 일을 쓴 것이 춘추(春秋)》가 되고, 말을 쓴 것이 상서(尙書)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임금은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늘 좌우에 모시게 하여 일언일동(一言一動)을 쓰지 아니함이 없음이, 후세의 법이 된 지 오래입니다. 공경하여 생각하건대, 전하는 짐짓 옛 것을 본받아 문사(文士) 8인을 뽑아 이름을 ‘사관(史官)’이라 하여 실록을 전장하게 하고, 또 대언(代言)·시신(侍臣)으로 하여금 모두 사직(史職)을 겸하게 하여 날마다 좌우에 모시게 하였으니, 그것이 시사(時事)를 기주(記注)하는 직임이 넓다 할 만한 소이이나, 그러나, 사관을 겸직한 자는 각각 직사의 번거로움이 있어, 그 실록의 상세한 것은 사관이 전장하여 극진히 함만 같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전하가 사관이 진퇴에 실수하였다 하여, 드디어 근시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신 등은 전하의 가언(嘉言)과 선행이 후세에 다 전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전하는 어리석은 이 마음을 굽어 채택하시고 옛 법도를 따라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청정(聽政)하는 곁에 모시게 하여 만세의 법이 되게 하소서.”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1441년 윤11월 20일 성균 생원 조변륭(曹變隆) 등 4백여 인이 세종에게 상소하기를, “옛 제왕(帝王)들은 허물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항상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허물을 뉘우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면, 그 정치를 잘하지 못하는 이가 없고, 또 간하는 말을 물리치고 스스로 옳다고 하오면, 그 종말을 능히 보전하는 자가 있지 아니하옵니다. 임금의 한 가지 말을 좌사(左史)가 쓰고, 임금의 한 번 행동을 우사(右史)가 기록하오니, 전하의 몇 가지 말씀은 한때의 들음에 누(累)가 있을 뿐 아니오라, 실로 천년의 역사에 더러움을 남길 것이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 말씀을 드러내지 마시옵소서. 신 등이 맹자(孟子)의 글을 그윽이 보옵건대, ‘옛적 군자(君子)는 그 과오가 있을 적에는 일식(日食)과 월식을 하는 것처럼 백성들이 모두 보고, 과오를 고칠 적에는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본다. ’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에 매양 이미 안다고 하시고는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니, 능히 과실을 고치지 못하실 뿐 아니라, 또 뉘우칠 줄을 못하시고 도리어 허물과 그름을 꾸미고 덮으시니, 이는 허물을 들이는 실수가 부처를 숭상하는 실수보다 더하옵니다. 이제 우리 국가의 억만년 무궁한 업(業)이 겨우 세 성왕(聖王)을 전하였사온데, 전하께서 생각지 않으심이 이처럼 극진함에 이르시면 자손 만세의 모양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아무쪼록 고치시기를 전하께 깊이 바라옵니다.” 하였다.





1451년 5월 9일 예문 봉교(藝文 奉敎) 이인전(李仁全) 등이 문종에게 상언(上言)하기를, “가만히 살피건대 옛적에는 좌사(左史)·우사(右史)를 두어, 거동은 좌사가 쓰고 말은 우사가 썼으므로, 임금의 언행(言行)·정사(政事)와 대신(大臣)의 시비(是非)·득실(得失)을 모두 바로 써서 후세에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성명(聖命)이 예문(藝文)·춘추(春秋)의 사관(史官) 8인을 두어, 매양 경연(經筵)·조계(朝啓)에 윤차(輪次)로 들어가 참여함은 옛 제도를 모방하여 기사(記事)를 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근자에 대신 및 근신(近臣)에게 두루 의논하는 연방(延訪)하되 혹 사관(史官)을 막아서 참여하여 듣지 못하게 하고 또 조계·경연에서도 예에 따라 먼저 나가게 하여 역시 뒤에 의논한 일을 듣지 못하게 하시니, 신 등은 그 의의(擬議)한 것이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 예전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즉위한 처음에,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임금에게 비밀히 뵙기를 청하였는데, 중위(中尉) 송창(宋昌)이 진언(進言)하기를, ‘말한 바가 공변된 일이라면 공연히 말할 것이며, 말한 바가 사사로운 일이라도 왕자(王者)에게는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임금의 말과 거동에 어찌 사신(史臣)이 미처 알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기밀의 중대한 일이라 듣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에 사신을 둔 본의에 어긋납니다. 혹시라도 사관을 막고서 일을 의논하였다고 쓴다면, 어찌 후세의 의심하는 바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이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지금 이후로부터는 모든 크고 작은 의사(議事)에 다 사관으로 하여금 들어가 참여하게 하고, 경연·조계에서까지도 뒤에 나가게 하여, 시사(時事)를 갖추어 기록하게 하셨으면 더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1489년 8월 27일 검열(檢閱) 이주(李胄)가 아뢰기를, “신 등은 직책이 일을 기록하는 데 있사온데, 무릇 신료(臣僚)들이 일을 아뢸 때에 땅바닥에 엎드리어 머리를 들지 못하므로, 다만 그 음성(音聲)만 듣고 용모(容貌)를 보지 못하니, 어찌 능히 그 사람을 분변(分辨)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인하여 일을 기록한 데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신(史臣)은 직필(直筆)을 귀(貴)하게 여기는 것이온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서도 감히 기록하니, 신은 미안(未安)한 바입니다. 또 옛일을 가지고 상고하면, ‘발연(發然)히 얼굴빛이 변하였다.’ 함이 있고, ‘용모(容貌)가 태연자약하다.’ 함이 있고, ‘성색(聲色)이 모두 노기(怒氣)를 띠었다.’ 함이 있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함이 있고,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함이 있으니, 옛날의 사신(史臣)은 용색(容色)과 언모(言貌)를 모두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전하였으니, 땅에 엎드리어 일을 기록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엎드려서 일을 기록하면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고, 또 옛날에는 좌사(左史)가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가 일을 기록하였으니, 옛날의 사관(史官)은 반드시 좌우(左右)로 나눈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또 듣자오니, 중국의 사관(史官)은 지필(紙筆)을 잡고 황제(皇帝)의 좌우(左右)에 선다고 합니다. 중국의 제도도 이미 이와 같으니, 땅바닥에 엎드리어 일을 기록하는 것은, 신은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극균(李克均)은 아뢰기를,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좌우로 나누어 입시(入侍)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하고, 검토관(檢討官) 김전(金詮)은 아뢰기를, “사신(史臣)이 땅에 엎드리는 것은, 신은 불가하게 생각합니다. 고사(古史)에 ‘관(冠) 옆에 붓을 꽂은 이필자(珥筆者)’라고 한 것을 어느 사람이 ‘사관(史官)’이라고 하였으니, 옛날의 사관은 엎드리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뜻으로는, 사관 두 사람이 지필(紙筆)을 가지고 좌우에 꿇어앉으면 조의(朝儀)에도 문란(紊亂)하지 않을 듯합니다.”하고, 동지사(同知事) 이경동(李瓊仝)은 아뢰기를, “사관으로 하여금 지필(紙筆)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일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사관은 앉아서 일을 기록하라.”하였다.





1539년 10월 20일 정원에 전교하기를, “주서(注書) 이사필(李士弼)이 기록한 것이 사실이 아닌 일에 대해 사헌부에서 추고하고 있으나 이사필이 잘못 알고 한 일이다. 내가 전에 보니 말을 받아 기록할 때 형세가 다 받아 기록할 수가 없었다. 위에서 말을 하면 아래에서 대답하기도 하고 혹 아래에서 하는 말에 위에서 대답하기도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말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동쪽 혹은 서쪽에서 일시에 함께 말하기도 하니, 어떻게 다 받아 기록할 수 있겠는가. 고사(古史)를 보니 ‘좌사(左史)는 아무 일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아무 일을 기록한다.’고 하였으니, 사관(史官)이 각기 기록을 분담했던 것이다. 지금도 사관 두 사람에게, 한 사람은 앞에서 말을 기록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한 사람은 옆에 따로 않아 별도로 기록하게 하여 서로 참고하여 빠뜨림이 없게 하면 어떠하겠는가? 그것을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정원이 회계하기를, “전하의 분부가 진실로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 주서(注書) 1명, 사관(史官) 2명이 다 기록하게 하는 본뜻은 빠뜨리는 것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기록할 바를 각각 분담시키면, 그것이 도리어 기록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세 사람이 똑같이 기록하고 나서 서로 견주어 보고 빠진 말을 갖추어 써 넣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중종이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1595년 9월 10일 사헌부가 아뢰기를, “좌사(左史)·우사(右史) 및 상·하 주서(注書)가 입시(入侍)하면 일을 주달할 적에 반드시 탑전(榻前)에 일제히 나아가서 일을 기록하는 것은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거둥 때에 주서(注書) 남탁(南晫), 사관(史官) 성이문(成以文)은 버젓이 자리에 앉아 있고 함께 달려가지 않았으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추고(推考)하여 치죄하게 하소서.”하니, 선조가 따랐다.
2013-08-19 1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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