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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松都)의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경덕궁(敬德宮)
 김민수_
 2013-08-12 09:20:41  |   조회: 2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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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松都)의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경덕궁(敬德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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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 12월 14일 태종이 명나라 사신 태복시 소경(太僕寺 少卿) 축맹헌(祝孟獻)에게 송도(松都)의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경덕궁(敬德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축맹헌 등이 대궐에 나와 돌아갈 것을 고하였기 때문에, 태종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 것이다. 영사평(領司平) 하윤(河崙)·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 등이 아뢰기를, “바꾸는 말은 4백 필을 더 바치면 됩니다. 그 4백 필은 뒤따라 들여보내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하였다. 태종이 가하다 하므로, 이 뜻을 축맹헌에게 말하였다. 축맹헌이 말하기를, “그러면, 지금 가지고 온 말값은 6천 4백 80필의 값뿐이니, 우리들이 요동(遼東)에 돌아가서 주문(奏聞)하여 말값을 더 보내겠다.”고 하였다. 축맹헌이 떠나기를 재촉하니 태종이 하루 동안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태종이 관마색(官馬色) 관원을 불러 말값의 수(數)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7천 필은 살 수 있습니다.”하고, 물러가 계산하여 보고 다시 아뢰기를, “오직 6천 4백 80필의 값입니다.”하였다. 태종이 계산이 틀린 것을 노하였으나 역시 죄는 가하지 않았다.







1403년 10월 27일 조정(朝廷) 사신 황엄(黃儼)·박신(朴信), 한림 대조(翰林 待詔) 왕연령(王延齡)·홍려시 행인(鴻臚寺 行人) 최영(崔榮)이 이르렀는데, 면복(冕服)과 태상왕(太上王)의 표리(表裏)와 중궁(中宮)의 관복(冠服)과 원자(元子)의 서책(書冊)을 싸 가지고 왔다. 산붕(山棚)과 결채(結綵)를 베풀고 나례(儺禮)를 갖추었다.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서 맞아 경덕궁(敬德宮)에 이르러 준 것을 받았다. 예(禮)가 끝나매, 엄(儼)이 내전(內殿)에 들어가서 정비(靜妃)에게 관복(官服)을 전하고 나오니, 태종이 예(禮)를 행하고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잔치를 베풀었다. 1405년 8월 9일 도로 경덕궁(敬德宮)에 이어(移御)하였으니, 본궁(本宮)이 좁아서 위사(衛士)가 노숙(露宿)하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兵曹 判書) 남재(南在)·형조 판서(刑曹 判書) 이문화(李文和)·호조 판서(戶曹 判書) 이지(李至)·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 윤저(尹柢)·공조 판서(工曹 判書) 한상경(韓尙敬)과 더불어 한경(漢京)으로 천도(遷都)할 것을 의논하였다.







1410년 9월 21일 어가(御駕)가 유후사(留後司)에 이르러 경덕궁(敬德宮)에 임어(臨御)하고, 각사(各司)에게 명하여 중궁(中宮)을 따라 먼저 송도(松都)에 들어가게 하였다. 태종이 마침내 동강(東江)에서 사냥하였다. 1412년 6월 1일 대언 등에게 일렀다. “송도(松都)의 경덕궁(敬德宮)과 신도(新都)의 창덕궁(昌德宮)은 내가 거처하는 곳이요, 모화루(慕華樓)와 경회루(慶會樓)는 사신을 위한 곳이다” 1418년 4월 2일 경덕궁(敬德宮) 신루(新樓)가 이루어졌다. 7월 8일 경덕궁(敬德宮) 북량정(北涼亭)을 세웠다. 1419년 4월 21일 세종의 어가가 개경(開京)에 당도하여 덕안전(德安殿)에 들러 새로 지은 진전(眞殿)을 구경하고 경덕궁(敬德宮)에 머물렀다. 5월 4일 세종이 태조의 비(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에 거둥하여 제사(祭祀)하고 경덕궁에 갔다. 1425년 11월 29일 이조에서 계하기를, “목청전(穆淸殿)·경덕궁(敬德宮)·제릉(齊陵)·후릉(厚陵)의 주수관도 또한 유후(留後)로 하여금 그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유능함과 무능함을 고찰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1456년 9월 29일 세조가 제릉(齊陵)에 이르러 제사를 행하였다.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니, 노인과 유생(儒生)이 가요(歌謠)를 바치었다. 드디어 경덕궁(敬德宮)에 입어(入御)하였다. 1460년 11월 1일 세조가 경덕궁(敬德宮) 청화정(淸和亭)에 나아가서 여러 재상에게 글을 내리기를,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가 부유하고 충실하여지는 계책은 인공(人功)에 있을 뿐이니, 내년 봄이 되면 하삼도(下三道)의 백성 수만 호를 옮기고 또 각품(各品)의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입거(入居)하게 하되, 송도부터 평양까지 이수(里數)의 멀고 가까운 것을 가지고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복호(復戶)와 면세(免稅)의 연한(年限)을 정하라.”하였다.







1534년 7월 9일 중종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한성에서 가까운 능(陵)에는 직접 제향(祭享)을 올린 것이 두세 차례나 되었고, 1528(중종 23)년인 무자년에는 크게 풍년이 들어서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영릉(英陵)에 직접 제향을 올렸는데, 유독 태조의 비(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만은 빠뜨려서 마음속으로 무척 미안했다. 올해는 평년작은 되므로 곡식이 여무는 것을 보아서 하려고 했는데 곡식이 잘 여물었다. 또 도로 사정도 무척 좋아 교량을 놓아야 되는 폐단도 없으며, 경덕궁(敬德宮)에 숙소를 정할 것 같으면 그 밖으로 울타리를 치고 주변을 보수하고 청소나 하면 될 뿐, 새로 개수(改修)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성종조(成宗朝) 에는 야차(野次)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은 응당 포영사(布營使)를 보내 살피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런 일을 의논하기에는 너무 빠른 것 같기도 하지만, 오늘 대신들이 마침 성균관에서 회좌(會坐)하므로, 이 기회에 의논하는 것이다.”하니, 영의정 장순손, 좌의정 한효원, 우의정 김근사가 의논하여 “올해의 온갖 곡식이 아직 다 익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볼 때 평년작은 될 듯싶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후 아직 제릉(齊陵)에 참배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겨, 10월에 접어들 무렵 친히 참배하여 공경하는 뜻을 펴고자 하니, 인정과 예법에 크게 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포영사를 미리 보내어 경덕궁을 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뢰었다.







1534년 7월 22일 중종이 포영사(布營使) 윤은보(尹殷輔)에게 전교하였다. “경덕궁(敬德宮)이 넓다고 해도 다만 전좌(殿坐)에 자리를 배열하고 숙소만 만들면 되고, 나머지 장소에 대해서는 주위에 울타리를 쳐서 막기만 하면 된다. 노차(路次)의 숙소는 청소만 하면 될 것이니 단청(丹靑)을 다시 할 필요가 없고, 고쳐야 될 곳도 유둔(油芚)으로 차단할 것이요 지붕을 만들어 덮을 필요가 없다. 도로와 교량에 관해서도 편의에 따르도록 하고 민폐를 끼치지 말라.” 또 “출궁하는 날 벽제를 숙소로 하라. 광탄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곳이니, 그 곳을 숙소로 잡으면 울타리 치고 개수·청소하는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다. 통제원(通濟院)을 숙소로 삼는 것이 온당하다. 성균관에서 알성(謁聖)하고 나서 만월대에서 문무과를 함께 시험 보일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 잔치를 만약 한곳에 모이게 해서 베풀면 먼 곳에 사는 노인들로서는 오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개성부의 노인들은 경덕궁에서 잔치를 내리고 각 고을의 노인들에 대해서는 각각 그곳에서 공궤하게 하라. 또 노인들을 공궤할 때에 음식상을 갖추 배열해서 공궤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리고 경덕궁은 영조(營造)할 필요가 없으니 다만 보수하고 청소만 하라.” 전교하였다.







1535년 3월 8일 좌의정 김근사가 의논드리기를, “제릉·후릉과 목청전의 향축을 경덕궁에 보관하였다가 제사지낼 때 내어다 쓰는 것이 정전(正典)은 아니지만 역시 권도(權道)의 일례(一禮)입니다. 다만 비어 있는 궁궐의 불결한 곳에 봉치(奉置)하기가 미안스럽기는 과연 아룀과 같습니다. 먼 곳의 다른 능전의 향축은 임시로 봉치할 곳이 없으니 부득이 재소에 보관하고 제릉·후릉과 목청전의 제사에 쓰는 물품은 개성부 봉상시(奉常寺)에 보관하여 부관(府官)이 관장, 삼가 지키게 하소서. 그리하여 위의 여러 능전의 향축도 함께 봉상시의 정결한 곳에 보관하게 하고 부관으로 하여금 그때그때 내어다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예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하였다.







우의정 김안로가 의논드렸다. “국가의 중대사는 제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제향(祭享)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세세한 절목이라도 공경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제사는 하루 전에 헌관(獻官)이 친히 향축을 받아서 행하는 것은 진실로 예의 큰 절목이니 변경 시킬 수 없습니다. 먼 곳의 능전의 향축을 매년 여름에 미리 재소에 가져다 두는 것은 물에 막힐 것을 염려한 임시적으로 하는 권도에서 나온 조처이지 정례(正禮)는 아닙니다. 경덕궁은 비어 있는 궁궐이기는 하지만 실로 선왕(先王)이 머무르시던 곳으로 똑같이 삼궁(三宮)이니, 친림하신거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릉·후릉과 목청전의 향축은 반드시 이 곳에 보관하고 헌관으로 하여금 그때그때 나아가 받아가게 함으로써 전하가 직접 전하는 공경이 뜻을 드러내게 한 것으로 족히 예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볼수 있습니다. 먼 곳의 능은 달리 임시 안치할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재소(齋所)에 보관하는 것입니다. 재우(齋宇)의 협애함이 어찌 경덕궁의 깊숙하고 넓음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갈무리를 삼가지 않아서 더렵혀졌을 뿐입니다. 이 곳을 청결하게 하지는 않고 도리어 곧바로 향소(享所)에 봉치(奉置)하는 것은 구차하고 간소하게 하려는 폐단이 있어 선조(先朝)에서 예를 중히 여기신 본의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녹사(錄事)는 비록 미천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직분으로 전연사(典涓司)에서 행할 것을 하는 것이며, 궁을 지키는 사람도 상당한 벼슬아치이니 그가 봉전(捧傳)하는 예를 행하는 것이 안 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향축을 봉치하는 곳이 낮고 불결하면 궁내의 정결한 방을 택하여 다시 봉치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겠습니다.”







1535년 8월 7일 중종이 전교하였다. “제릉(齊陵)에 제사를 지낸 뒤에 경덕궁에서 양로연(養老宴)을 열어야 한다. 전에 영릉(英陵)에 행행하였을 적에는 과천(果川)과 용인(龍仁) 지방에 모두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 번에는 개성부와 풍덕(豊德) 지방의 노인은 경덕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장단(長湍)·파주(坡州)·고양(高陽) 지방의 노인은 통제원(通濟院)에서 잔치를 베풀라는 것을 예조에 이르라.” 1536년 2월 24일 헌부가 아뢰기를, “공조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개성부 경덕궁(敬德宮) 수리를 준비하고 또 29칸의 집을 짓기 위하여 황해도로 하여금 자재를 운반하게 했다 하였습니다. 황해도 백성이 배릉(拜陵)하는 일을 막 겪고 나서 다시 이 역사(役事)를 만났으니, 그 수고로움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은 이 다음 풍년을 기다려서 짓게 하고 비가 새어 부득이 보수해야 할 곳은 개성부의 위군(衛軍)으로 하여금 바로 역사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개성부 경덕궁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전교하였다.







1538년 10월 21일 전교하였다. “지금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 송겸(宋㻩)의 계본을 보니, 전 권지 훈련원 봉사(權知 訓鍊院 奉事) 이춘양(李春陽)은 집을 짓기 위해 군졸을 보내어 시중의 포물(布物)을 다수 착취했으며 목청전(穆淸殿)의 소나무를 벌채하고 또 경덕궁(敬德宮) 기와를 걷어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춘양은 이미 출신(出身)한 사람으로 무식한 사람은 아닐텐데 감히 이러한 짓을 하였으니 매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저 목청전은 선왕(先王)의 어용(御容)을 모신 곳으로 벌목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다음에 해야 한다. 경덕궁이 아무리 공개(空開)되어 있다지만 기와를 걷어간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각별히 엄하게 추궁하여 치계(馳啓)하도록 경기 감사에게 하유하라.”
2013-08-12 09: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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