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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리(塞門里)의 정원군(定遠君) 집 터에 영건한 경덕궁(慶德宮)
 김민수_
 2013-08-11 21:16:55  |   조회: 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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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리(塞門里)의 정원군(定遠君) 집 터에 영건한 경덕궁(慶德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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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1월 1일 예조가 계청하기를, “3월 12일에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기소서.”하니, 15대 국왕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답하기를, “법궁(法宮)에 영원히 옮기는데 좋은 날을 잘 가리지 않을 수 없다. 각전(各殿)과 모두 날짜를 협의하여 다시 별도로 택일하여 아뢰라.” 하였다.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일찍이 지관(地官) 이의신(李懿信)에게 몰래 묻기를 “창덕궁은 큰일을 두 번 겪었으니 내 거처하고 싶지 않다.” 하였는데, 이는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이 폐치되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신이 답하기를 “이는 고금의 제왕가(帝王家)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고입니다. 궁전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운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빨리 옮기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이로 말미암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는데, 군신들이 거처를 옮기기를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따르지 않았다. 그 후 행궁에 변괴가 나타나자 비로소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더욱 꽃과 돌 같은 물건으로 꾸몄지만, 오래 있을 뜻이 없었다. 이에 창경궁(昌慶宮)을 짓도록 재촉하고는 궁이 완성되자 또 거처하지 않고, 드디어 서궁 인경궁(仁慶宮), 피우처 경덕궁(慶德宮)을 짓도록 하였다. 완성시킨 후에 거처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피우처 경덕궁(慶德宮)을 먼저 완성하였는데 서궁 인경궁(仁慶宮)이 채 완성되지 않아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폐위되었으니 모두가 이의신이 유도한 것이다.





1615년 11월 17일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이전(李佺)을 위리안치된 곳에서 죽였다. 이전이 위리안치에 나아가자 수장(守將)이 찬 돌방에서 자게 하고, 또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을 지어 주니, 이전이 먹지 못하였다. 그러자 관동(官僮) 수생(壽生)이 옆에 있다가 항상 그가 먹던 밥을 나누어 올렸다. 수장이 그 일을 알고 관동이 그 안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가시문 밖에 앉아서 먹도록 하였다. 관동이 몰래 이전과 약속하여 옷을 문 안에 펴 놓게 하고 관동이 때때로 숟가락에 밥을 떠 지나가면서 던져주면 전이 한두 숟가락씩 얻어서 먹었다. 이전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하루 저녁에는 글을 써서 관동에게 부쳐 부모와 결별을 고하고는 관동이 문을 나서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전은 호탕하고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궁마술(弓馬術)이 남달리 뛰어나고 외모도 훤칠하였다. 어떤 사람이 광조(광해군:묘호 추상)에 참소하기를 “정원군(定遠君:원종) 및 이전에게 특이한 상(相)이 있고 그들이 사는 곳인 새문리(塞門里)의 집 부근에 왕성한 기운이 있습니다.” 하니, 광조(광해군:묘호 추상)가 이전을 시기하여 죽이고 그 집을 빼앗아 허물어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처음에 관동이 감히 이전의 편지를 내놓지 못하고 사합(沙盒)에 넣어 흙속에다 묻어 두었다가 인조가 반정(反正)한 후에야 비로소 올렸는데, 필적이 완연하여 비로소 그가 죽은 날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1617년 4월 27일 전교하기를, “앞으로 법궁(法宮)을 중건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완도와 변산의 재목을 이와 같이 많이 베어 내었으니, 함부로 베어낸 제목을 선전관을 보내어 상세하게 적간해 오라.”하였다. 법궁은 바로 경복궁이다. 비록 들보와 기둥이 장대하기는 하였으나 칸수가 많지 않고 또 별당과 별전, 후정(後庭)의 방이 없었으므로 편안히 거처하기에 불편하였다. 이에 조종조부터 법궁에서는 대례(大禮)만 행하고 평상시에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지금 서궁 인경궁(仁慶宮)을 짓고 계속해서 피우처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는데, 들보와 기둥은 비록 작았으나, 칸수는 법궁보다 10배는 되었고 별전이 열 채가 넘었으며, 인왕산을 휘감고 있어서 토목공사의 장대함과 장식의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없던 바였다.





거기에 소용되는 재정은 먼저 각도에서 부조한 쌀과 포목을 쓰고 또 중외의 군량미를 가져다가 썼다. 그러고서도 계속해서 조도사(調度使)·조도장(調度將)·조도관(調度官)·벌목관(伐木官)·매탄관(埋炭官)·취철관(吹鐵官) 등의 관원 1백여 명을 팔도에 나누어 보내어 그곳에서 긁어모아 마련하게 하였다. 혹 한두 동(同)의 포목을 한 도의 민결(民結)에다 나누어 주어, 1결에서 받는 것이 몇 촌(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을 일러 사들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배로 갚기를 요구하였다. 또 사명(使命)을 받든 사람들은 대부분 시정의 노예들을 썼는데, 거두어들인 재물은 태반을 자신이 차지하여 몇 달 사이에 큰 부자가 되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도 왕은 항상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어서 부득이 이 역사를 하고 있으나, 모두 별도로 마련한 데서 내어 쓰는 것으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조만간에 법궁을 중건할 것인데, 그 때는 민력(民力)을 써야만 하니, 중외에서는 이 점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1618년 4월 4일 영건도감이 아뢰기를, “비망기로 ‘경덕궁 각 아문의 칸수를 위에 물어보고 결정지은 뒤 지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째서 서계(書啓)하지 않는 것인가? 도감으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런데 각 아문의 칸수에 대해서는 ‘찬성 이충(李沖)이 출사(出仕)하기를 기다렸다가 여러 제조들은 탈이 났다고 핑계대지 말고 일제히 모두들 모여서 상의한 다음에 속히 짓도록 하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신들이 바야흐로 이충이 출사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하교를 받들었기에 각 아문의 칸수를 별단(別單)으로 서계드립니다. 그런데 액정서와 사옹원과 내반원(內班院) 등 아문의 칸수는 일체 차지 중사(次知中使)가 말한 대로 하였는데 마련되어 있는 간가(間架)가 무려 2백 3칸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지금 이 경덕궁은 원래 일시적으로 피우(避寓)하기 위해 짓는 것인만큼 아문의 모양새가 법궁(法宮)의 그 것과는 본디 같지 않으니 구조를 간략하게 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지금 마련되어 있는 칸수가 무려 2백 칸이나 되고 보면 들어갈 재목과 기와가 엄청나게 많을테니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신들의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번을 서서 드나드는 내관청(內官廳)은 내반원에 포함시켜 세워도 되겠고 곳간도 줄이거나 다른 것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들이 또한 많습니다. 전항(前項)의 사옹원·내반원·액정서의 칸수를 도형으로 작성해 입계하니, 한 번 보시고 전하께서 특별히 명해 그 간가를 줄이도록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궁시 별조청(弓矢別造廳)같은 것은 인경궁(仁慶宮) 안에 지어야 마땅한데, 두 궁궐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이 궁 안에 꼭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덕응방(德應房)과 내사복(內司僕)은 인경궁 안에 짓고 있는 이상 그것 역시 경덕궁 안에 꼭 지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감히 결재하시기 여쭙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정원 이하 각 아문 역시 많은 것 같으니 경운궁(慶運宮)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내사복·승문원·내주방(內酒房)도 인경궁에 아울러 설치되어 있으니, 통합하거나 줄여야 할 곳들을 다시 의논해 결정해서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4월 5일 전교하였다. “두 궁궐의 공사가 날이 갈수록 더욱 해이해지고 있다 하는데 만약 요포(料布)가 떨어지고 나면 말할 수 없이 될 것이다. 경덕궁(慶德宮)은 단지 잠깐 피하려고 머무는 곳인데, 현재 대전(大殿)과 내전(內殿) 건물은 짓고 있으니 아문 같은 것들은 작은 재목들로 간략하게 속히 짓는 것이 편할 듯하다. 그리하여 금년 이내에 공사를 끝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년에는 미루지 말고 완공토록 하라. 그리고 암석을 캐내는 작업 역시 매우 해이해지고 있다 하는데 각별히 감독하여 속히 공사를 끝내도록 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4월 9일 전교하였다. “서궁 인경궁(仁慶宮)의 정문(正門) 명화문(明化門)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중층문(重層門)으로 조성하고, 경덕궁(慶德宮)은 그저 잠시 피해 거처하는 피우처(避寓處)일 뿐이니 단층문(單層門)으로 알아서 조성하도록 하라. 그리고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은 곧바로 급히 처치했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결정하지 않았는가.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4월 22일 전교하였다. “경운궁(慶運宮) 누각의 재목·기와·연석(鍊石)을 헐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송하는 동안만 새 서대문을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에 닫되, 수문장이 각별히 엄하게 지켜 역군(役軍)과 장인(匠人)들만을 출입하게 하라고 분병조(分兵曹)에 이르라.” 5월 16일 형조 판서 조정(趙挺)이 상차하였는데, “양궁(兩宮)의 공사를 정지하여 인심을 수습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과인이 즉위한 뒤 경운궁(慶運宮)에 임어(臨御)해도 충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오래도록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경운궁에 변고가 생겨 억지로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피해 갈 곳 역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창경궁(昌慶宮)을 수선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창경궁 공사가 막 끝나자마자 요귀(妖鬼)의 재앙이 이 궁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창덕궁에까지 옮겨지고 말았다. 사세상 요귀가 작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착수했던 것인데 그것도 다만 공사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궐(小闕)만 우선 짓도록 한 것이다.





11월 23일 전교하였다. “경덕궁(慶德宮)의 융정전(隆政殿)의 철망과 금천교(禁川橋)의 돌난간 등의 공사를 1월 보름 뒤부터 속히 시작할 것이며, 경덕궁은 거의 다 건축했으니 내년 여름이나 가을까지 물리지 말고 모두 공사를 마무리 지으라고 도감에 말하라.” 1620년 3월 22일 경덕궁에 거둥하여 후원을 두루 보고 인왕산(仁王山) 아래 초천(椒泉)에까지 이르렀다. 6월 3일 전교하였다. “경덕궁(慶德宮)의 목수로서 응당 내보낼 자가 무려 2백 60, 70 명이나 되지만 내보내지 말도록 하라. 인경궁의 정문인 명화문(明化門)은 이미 역사가 끝나 높게 우뚝 솟아 있는데, 앞뒤가 모두 큰 길이어서 길을 가는 사람들이 그 앞뒤로 통행하고 있다. 이 장인(匠人)을 데려다 좌우의 월랑(月廊)을 급히 독촉하여 만들되, 바깥 담장에 붙여 지어 안팎의 경계를 엄하게 하라. 그리고 강상(江上)에 남아 있는 재목이 아직도 1천여 개가 된다고 하니, 이것을 사용한다면 재목이 부족하지는 않을 듯하다. 반대하여 가로막지 말고 하루 이틀 사이에 급히 거행할 일로 도감에 말하라.”





1629년 8월 3일 자전과 중전이 인경궁(仁慶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1630년 3월 20일 인조가 인경궁(仁慶宮)에 거둥하여 자전을 문안하고, 이어 “풍정(豊呈)을 끝낸 뒤에 환궁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정원이 별궁(別宮)은 지존(至尊)이 여러 날 묵으실 곳이 못 된다는 이유로 환궁하기를 계청하였으나, 인조가 따르지 않았다.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앞으로 여러 날 이 궁에 머무르실 경우, 훈련 도감의 군사들을 옛날 관례대로 합번(合番)하여 시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 “합번하게 하지 말고, 경덕궁(慶德宮)의 안팎을 수직(守直)하는 군사들을 이 곳으로 데리고 와 시위하게 하라.” 하였다. 1632년 6월 28일 인목대비 김씨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였다.대행대비의 빈전(殯殿)을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인조가 하교하기를, “이 곳에 빈전을 설치할 수 없으니 어둠을 틈타 경덕궁으로 옮겨 모셔야 한다. 초8일 이어(移御)할 때의 전례대로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도로에 포장을 높게 쳐서 가리게 하고, 내관이 매게 하라.”하였다. 예조가 옮겨 모실 때에 대전·중전·왕세자·세자빈궁은 소여(小輿)를 타고 뒤따르면서 상여를 에워쌀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수레를 타는 것은 심히 미안하니, 걸어서 따라가야 한다.”하였다. 1760년 2월 28일 영조가 돈의문(敦義門) 안의 궐호(闕號) 경덕궁(慶德宮)이 정원군(定遠君:원종)인 장릉(章陵)의 시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대신과 관각 당상에게 명하여 빈청에 모여서 대책을 의논하여 들이도록한 바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2013-08-11 21: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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