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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궁(梓宮) 칠성판(七星板)
 김민수_
 2013-07-09 17:59:20  |   조회: 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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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궁(梓宮) 칠성판(七星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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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3월 27일 대렴(大斂)하였다. 내시(內侍)가 대렴상(大殮床)을 서계의 서쪽에 두고 지의(地衣)와 욕석(褥席)을 상 위에 진열하고 먼저 염습(殮襲)할 때에 시체를 묶는 데 쓰는 베로 만든 띠 포교(布絞)의 횡포 다섯 개를 아래에 펴되 백세저포(白細紵布) 두 폭을 찢어 여섯 개로 만들어 그 다섯 개만 쓰고 다음은 종포(縱布) 세 개를 위에 펴되 백세저포 한 폭을 찢어 세 개를 만들어 쓰고 다음은 포금(布衾), 그 다음은 포의(布衣)인데, 혹은 뒤집어 놓기도 하고, 혹은 거꾸로 놓기도 하되, 다만 바르고 곧은 방정(方正)만을 취하고, 오직 명복(命服)만은 거꾸로 놓지 않으며, 합계 90칭(稱)이다. 이를 들고 서계로 올라가매 나인이 받아 들어 시체의 남쪽에 옮겨놓는다. 조석전(朝夕奠)을 올리고, 나인이 손을 씻고 함께 시체를 들어 대렴상(大殮床)으로 옮기고는 금(衾)을 거두어 먼저 두 발을 가리우고, 다음은 머리를 가리우고, 다음은 왼쪽을 가리우고, 다음은 오른쪽을 가리우되 바르고 곧은 방정(方正)함을 취한다. 포교(布絞)를 잡아매되 먼저 끝으로써 발을 감추고 올라가며, 뒤에 덮개로써 머리를 감싸고 내려와서, 마침내 7개의 띠를 잡아맨다.

정해진 그 날 전에 아주 부드러운 재를 관(棺) 안의 밑에 4촌 가량 펴고, 칠성판(七星板)을 그 위에 놓고, 두꺼운 종이로써 칠성판의 구멍을 발라서 막고, 욕석을 칠성판 위에 설치하고, 이에 관을 들고 들어와서 전중(殿中)의 조금 서쪽에 두고, 염하고 남은 의상(衣裳)은 적당히 관의 밑바닥에 펴고, 나인이 함께 시체를 들어 관에 들여넣으며, 또 의상을 시체 위에 펴되, 편편하게 꽉 차게 하고, 생존할 때의 빠진 치아(齒牙)·모발(毛髮)과 깎은 손톱·발톱을 소대(小帒)에 담아서 재궁 안의 네 모퉁이에 채운다. 왕세자가 기대어 통곡하기를 슬피 하고, 대군 이하와 공주 이하가 통곡하기를 슬피 한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차(次)로 물러가고, 공주 이하도 모두 자리로 물러간다. 내시가 장인(匠人)을 불러 뚜껑을 덮고 옻칠을 하고서 나비은살대 임(衽) 세 개를 끼운다. 나비은살대는 나무로써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양쪽 머리가 넓다. 먼저 관 가의 양쪽머리과 중앙의 합치는 곳을 뚫어서 움푹 패인 모양인 감형(坎刑)을 만들고는 나비는 살대로써 이를 연결시켜, 밑과 뚜껑이 서로 합친 곳을 튼튼하게 하고, 서로 합친 외면(外面)에 옻칠로써 이를 바르고, 또 흰 생초(生綃)로써 가로세로 이를 묶고는 관의(棺衣)로써 덮는다. 이에 전(奠)을 설치하고, 드디어 시어소(時御所)의 서청(西廳)에 빈소(殯所)를 설치한다. 기일 전에 찬궁(欑宮)을 정전(正殿)안에 지어, 북쪽에 의거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는데 수양대군(首陽大君) 집의 서청(西廳)인데, 청(廳)의 앞과 뒤로써 동서남북으로 삼다.

재궁 평상(梓宮 平牀)의 길이와 넓이를 미리 헤아려 사면에 각각 1척(尺) 5촌(寸)을 더 넓도록 하고, 먼저 벽돌로써 땅에 펴고 석회(石灰)로써 그 틈을 발라서 찬궁의 기지(基址)를 만들고, 다음에 땅에 네모진 나무를 설치하고, 네 개의 기둥을 그 위에 세우고는, 들보를 걸치고 서까래를 걸어 벽을 만들어 집 모양과 같이 하되, 다만 그 동쪽 벽만을 비워서 대자리 죽점(竹簟)으로써 그 안의 삼면(三面)과 위에 붙이고, 편죽(片竹)을 사용하여 가로세로 못을 끼우되, 못의 튼튼한 것으로써 한도로 삼고, 또 두꺼운 종이로써 이를 바르되, 종이로써 주작(朱雀)·현무(玄武)·청룡(靑龍)·백호(白虎)를 그려서 방위에 따라 이를 붙이고, 그 외의 삼면과 상면(上面)에는 먼저 진흙으로써 바르고, 다음은 정포(正布)를 바르고, 그 다음은 두꺼운 종이를 바르며, 유둔(油芚)과 지의를 안에 펴고 발 없는 평상(平牀)을 설치하고 대자리 죽점(竹簟)과 욕석을 그 위에 펴 놓는다. 시각이 되자, 내시(內侍)가 재궁(梓宮)을 받들어 평상위에 안치(安置)하되,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관의(棺衣)로써 덮은 뒤에 유둔(油芚)으로 거듭 싸고, 흰 정포를 사용하여 가로세로 이를 묶는다. 내시 1인은 향탁(香卓)을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다음 2인은 혼백(魂帛)·유의함(遺衣函)과 교의(交椅)를 받들고, 다음 1인은 명정(銘旌)을 받들고, 다음 2인은 책보(冊寶)를 받들고, 내시가 함께 재궁을 들고 그제야 간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이를 따라 빈전에 나아갔다가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차(次)로 물러나온다.

미리 동벽기(東壁機)를 만들어 이를 막아 못을 치되, 튼튼하게 하고, 진흙으로 안팎을 바르고 도배(塗排)하기를 위와 같이 한다. 백초 만정(白綃滿頂)과 백초 장막을 설치하고, 다시 영상(靈牀)을 찬궁의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만정(滿頂)을 설치하여 평상·욕석·병풍·베개·의복·이불의 등속을 그 안에 두되, 남쪽으로 머리를 두게 하고, 조석(朝夕)으로 낯을 씻고 머리를 빗는 도구를 설치하되, 모두 평상시와 같게 한다. 영좌(靈座)를 찬궁의 서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평상·욕석과 병풍을 설치하고, 교의를 욕석 위에 두고, 혼백과 유의함을 교의위에 안치하였다. 명정을 받들어 영좌의 오른편에 세우고, 책보안(冊寶案)을 영좌의 동남쪽에 두고, 덮개와 문짝 각각 두 개를 영좌 앞 좌우에 설치하고, 덮개와 문짝은 모두 백저포(白苧布)를 사용하고, 덮개의 제도는 한 처마이다. 이에 전을 차려 놓는다. 유사(攸司)가 찬(饌)을 갖추어 올리면, 상식(尙食)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이를 전해 받들어 영좌 앞에 드린다. 향로·향합과 초를 설치하고, 또 준(尊)을 지게문 밖의 왼쪽에 설치하고, 술잔 3개를 준소(尊所)에 둔다. 왕세자가 들어와서 빈전(殯殿) 지게문 밖의 동쪽에 나아가서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여 슬픔을 다하고, 대군 이하는 그 뒤에 겹줄로 하여 서쪽을 향하되, 남쪽을 위로 하여 부복하고, 공주 이하는 지게문 밖의 서쪽에 나아가서 겹줄로 하여 동쪽을 향하고 자리에 올라가서 모두 통곡하여 슬픔을 다한다. 상식이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서 상향(上香)하고, 또 술 석 잔을 따라 연달아 안(案)에 드린다. 지게문 밖에는 상시 장막을 설치하여 꼬불꼬불하게 해서 서쪽과 동쪽을 가로 막았다. 나인(內人)이 빈소(殯所)를 모시기를 평상시의 예절과 같이 한다. 왕세자가 상차(喪次)로 돌아오고, 대군 이하와 공주 이하가 각기 상차로 돌아온다.

1659년 5월 6일 미시(未時)에 내관 임우문(林友聞)이 원상 정태화에게 와서 고하기를, “옥체는 장대한데 재궁(梓宮)의 척수가 부족하여 쓸 수 없습니다.”하니, 정태화가 윤강·송시열·송준길 등과 더불어 곧 정선흥을 불러 물었다. 정선흥이 대답하기를, “어깨가 닿는 곳이 가장 넓은데, 재궁의 부족한 척수가 거의 두 치나 되고 길이도 부족한 것이 1푼 정도입니다. 만약 소렴 의대(小斂衣襨)가 과다했기 때문이라 한다면, 어깨가 닿은 곳에 사용한 것은 몇 건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염습(殮襲)할 때에 시체를 묶는 데 쓰는 베로 만든 띠인 교포(絞布)는 처음에는 비록 묶지 않았으나 즉시 묶었고 그 묶은 것이 또 한 그리 느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염습을 잘하지 못한 소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하였다. 원상이 제신과 함께 들어가 봉심한 결과 과연 정선흥의 말과 같았다. 제신이 어찌할 줄 모르면서 물러나와 상의하고, 세자에게 말하기를, “장생전(長生殿)의 예비 재궁들이 모두 그 길이와 넓이가 쓸 만한 판재가 없으니, 외재궁(外梓宮)의 판재를 택하든가, 혹은 성중 및 강상(江上) 여염집에서 찾아서 만약 합당한 판재를 얻는다면 마땅히 을해년 국휼 때와 같이 하여 재궁을 봉안한 후 칠을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끝내 넓은 판재를 얻지 못하면 부득불 황장목 상품(上品)으로 이어 붙여 쓰는 수밖에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하였다.세자가 답하기를, “여염집에서도 오히려 두 조각을 붙여서 만든 부판(附板)을 쓰지 않으니 이는 결단코 할 수 없다. 좋은 나무를 속히 선택하여 대사에 유감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유시(酉時)에 원상이 아뢰기를, “길이와 넓이가 합당한 판재는 품질의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백방으로 찾아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또 좋은 목재로 연판하면 실로 전판의 품질이 나쁜 것보다 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대부가에서도 그 변백(邊白)을 제거하고 이어 붙여서 쓰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사세가 급박하니 결코 부판(附板)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좋은 계책이 없다. 빨리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오늘 밤 안으로 재궁을 조성하여 그 내면 및 송판에 북두칠성 모양의 구멍 7개를 뚫은 관(棺) 속 바닥에 까는 칠성판(七星板)에 여러 차례 칠을 하도록 하라.”하였다.

5월 8일 사시(巳時)에 대행(大行)의 시상(屍床)을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겨 오시(午時)에 대렴하였다. 주서(注書) 이경석·정태화·이시백·심지원·원두표·이후원·윤강·송시열·송준길·이응시·이상진·조형·원만석·김수항·오정원·이은상·유계·김만기·이백린·맹주서(孟胄瑞) · 가주서(假注書) 박순(朴純) · 사관(史官) 정중휘(鄭重徽)·송창(宋昌) 등이 함께 입시하여 시상(屍床)을 전내 동북쪽 모퉁이에 봉안하고 남쪽으로 머리를 향하게 하였으며, 찬궁(欑宮)을 전내 북쪽에 설치하여 그 중앙에 해당시켰으니 일찍이 어탑(御榻)을 설치하였던 곳이다. 재궁은 찬궁 곁에 두고 염상(殮床)에 의대(衣襨)를 진열하여 재궁 남쪽에 두었으며, 명정 선개(銘旌 扇蓋)는 찬궁 밖 서남쪽 모퉁이에 세웠다. 유장(帷帳)은 백색의 명주를 썼으며 선개 역시 백색을 썼다. 차조의 짚을 불에 태운 재인 출회(秫灰)를 재궁 밑에 폈다. 5두를 썼는데 두께는 1촌이다. 재궁 내에는 홍단(紅段)을 바르고 사각(四角)에는 녹단(綠段)을 발랐다. 다음으로 칠성판(七星板)을 더하고 역시 홍단을 발랐다. 다음으로 금욕(錦縟)을 폈다. 옥체(玉體)를 대렴상으로 옮겨 모셨는데, 의대는 17벌이었다. 위에는 면복(冕服)을 쓰고 황금 선금(黃金線衾)으로 염하였다. 대·소렴포(大小殮布)는 모두 백방 사주(白方絲紬)를 썼다. 염이 끝나자 재궁에 봉안하였는데, 통천관(通天冠)과 적석(赤舃)을 가져다가 재궁에 넣었다. 윤강이 규(圭)와 패옥(佩玉)도 넣어야 하느냐고 묻자, 송시열이 말하기를, “불가하다. 주공(周公)의 제례(制禮)에는 썼으나, 노군(魯君)의 상에 공자(孔子)가 전계에 나아가 쓰지 말 것을 청하였다.”하였다. 정태화가 정선흥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기축년에는 어찌 하였는가?”하니, 쓰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정태화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현궁(玄宮)에 넣어야겠다.”하였다. 드디어 빈소를 설치하고 대신 이하가 곡하면서 퇴출하였다.

1776년 3월 9일 대렴(大殮) 때의 의대(衣襨)는 백방사주 횡교(白方紗紬橫絞) 셋 · 백방사주 장교(白方紗紬長絞) 하나 · 다홍 금선 금(多紅金線衾) 안감은 백운 문단(白雲紋緞) · 자적 향직 욕(紫的鄕織褥) 안감은 다홍 광직(多紅廣織) · 다홍 운문단 곤룡포 조복(多紅雲紋緞袞龍袍朝服)·초록 운문단 답호(草綠雲紋緞褡)·보라 공단 장의(甫羅貢緞長衣)·두록 공단 장의(豆綠貢緞長衣)·옥색 공단 장의(玉色貢緞長衣)· 다홍 광직(多紅廣織)이고 불(黻)을 그린 구의(柩衣)이었다. 신시(申時)에 재궁(梓宮)을 내렸다. 1각(刻) 전에 왕세손이 여차(廬次)에서 부축받아 빈전(殯殿)으로 가서 부복(俯伏)하고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승지(承旨)·사관(史官)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차례로 배립(陪立)하였다. 내시(內侍)가 재궁을 받들어 찬궁(欑宮) 안에 넣어 두었다. 집사(執事)하는 자가 엄회지(掩灰紙)를 깔고 차조의 짚을 불에 태운 재인 출회(秫灰)를 까는데,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출회는 경자년의 전례대로 한 치 한 푼을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라.”하였다. 차조의 짚을 불에 태운 재인 출회(秫灰)를 까는 일이 끝나자 칠성판(七星板)을 안치하고 지욕(地褥)을 깔고 재궁 위에 두 개의 강(杠)을 가로놓았다. 내시가 어상(御床)을 받들어 가로놓은 강 위에 놓았다.


이어서 곧 재궁을 내렸다. 두 보에 싸서 봉(封)한 것을 재궁 안에 넣었다. 한 봉은 보 겉에 ‘입재궁(入梓宮)’ 석 자를 썼고, 한 봉은 ‘납우재궁내당중 친필야(納于梓宮內當中親筆也)’라 썼는데, 열 자가 다 대행조(大行朝)의 어필(御筆)이다. 오색낭(五色囊)에 넣고 그 다음에 면(冕)을 놓고 그 다음에 석(舃)을 놓고 의대(衣襨)로 빈 곳을 채웠다.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옥규(玉圭)는 퇴광(退壙) 가운데에 넣어야 한다 합니다.”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라.”하였다. 천금(天衾)을 덮으려 할 때에 왕세손이 재궁을 잡고 소리내어 울므로, 천금을 덮지 못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중대한 부탁을 생각하지 않고 이처럼 지나치게 애훼(哀毁)하시니, 신들이 참으로 몹시 민망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또 시각이 이미 늦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예정(睿情)을 조금 억제하소서.”하니, 왕세손이 조금 물러나 소리내어 울고 자리에 있던 자도 다 곡하였다. 천금을 덮었다. 장생전(長生殿)의 관원이 그 관속(官屬)을 거느리고 천판(天板)을 얹고 은정(銀釘)을 쳤다. 끝나고서 하령하기를, “선(扇)·개(蓋)를 먼저 배립(排立)한 뒤에 성빈(成殯)해야 하는가?”하매, 김상철이 말하기를, “설전(設奠)한 뒤에 배립해야 할 듯합니다.”하고, 낭청(郞廳) 홍원섭(洪元燮)이 상달(上達)하기를, “설전하기 전에 배설(排設)한다 하므로 이미 대령하였습니다.”하니, 하령하기를, “그렇다. 들여오라.”하였다. 내시가 찬궁의 문을 닫고 혼궁(魂宮)을 찬궁 앞에 배설하고 선·개를 좌우변에 설치하고 상탁(床卓)을 설치하였다. 하령하기를, “영침(靈寢)의 처소를 서변(西邊)의 악내(幄內)에 옮겨 설치할 것이니, 화문석(花紋席)·지의(地衣)를 들여와 깔도록 하라.”하매, 낭청 홍원섭이 나가서 화문 등매석(花紋登每席) 2부(浮)를 받들어 들여오니, 내시가 받아서 깔았다.


1800년 7월 3일 묘시에 대렴(大斂)하고 입관하였다. 들어와 참여한 제신들이 차례대로 모시고 서 있는 상황에서 대렴 시간이 되자 내시와 집사자가 대렴상(大斂床)을 휘장 안의 서쪽가에 설치하고 상 위에 베개와 요를 편 다음 먼저 교(絞)를 깔고 그 다음 이불을 깔고 그 다음 면복(冕服) 한 벌을 깔았다. 내시가 대행 대왕을 대렴상 위로 옮겨 모신 뒤에 먼저 발을 가리고 그 다음 머리부분을 가리고 그 다음 왼쪽을 걷어 싸고 그 다음 오른쪽을 걷어 쌌으며, 그 다음 버선을 깔고 그 다음 헌옷으로 교(絞)를 잡아맨 뒤에 그 자리에 있는 제신이 곡하여 애도를 표하고 집사자가 이불로 어상을 덮었다. 입관할 시간이 되어 내시가 재궁을 받들어 찬궁(欑宮) 문 밖에 놓아두자, 집사자가 재궁 안에 회지(灰紙)를 덮어 깔고 그 다음 차조의 짚을 불에 태운 재인 출회(秫灰)를 1치 5푼의 높이로 깔고 그 다음 칠성판(七星板)을 놓고 지욕(地褥)을 깐 뒤에 재궁을 찬궁 안으로 도로 모셨다. 이어 재궁 위에 두 몽둥이를 걸쳐놓고 그 위에 어상을 옮겨 모신 뒤에 집사자가 어상을 받들어 재궁 안으로 내렸다. 그리고 오색주머니를 넣은 다음 면류관을 깔고 그 다음 신을 깔고 그 다음 의대(衣襨)로 공간을 채워넣은 뒤에 제신들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중궁전(中宮殿)이 곡한 뒤에 내전으로 돌아가자 제신이 곡하여 애도를 표하였다. 집사자가 천금(天衾)을 덮고 천판(天板)을 올린 뒤에 은정(銀釘)을 박고 이어 은정에 옻칠을 하였다. 그 다음 내시가 찬궁 문을 닫고 찬궁에 영상(靈床)을 놓아둔 뒤에 또 상탁(床卓)을 설치하였다. 이어 대렴례와 성빈례(成殯禮)를 아울러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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