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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모의한 김문기(金文起)
 김민수_
 2013-06-22 12:55:31  |   조회: 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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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 복위(復位) 거사를 선동(煽動)한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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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 4월 25일 세종이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 김문기(金文起)를 보내어 태조실록(太祖實錄)·공정실록(恭靖實錄)·태종실록(太宗實錄)을 충주사고(忠州史庫)에봉안(奉安)하였다.1437년 2월 10일 사간원 좌헌납(左獻納) 김문기(金文起)가 아뢰기를, “근일에 창덕궁(昌德宮) 서쪽에 있는 예전의 이조(吏曹)를 수리하여, 장차 해청(海靑)을 길러서 더위를 피하게 한다고 합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해청을 잡아 기르는 것은 본래 진헌을 위한 것인데, 이제는 이미 이를 정지하였고, 또 흉년으로 비용을 절약하는 때를 당하여 하나의 새를 위해서 집을 영선 수리하는 것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덕을 닦고 반성하는 뜻이 아니오니, 비옵건대, 해청을 놓아 버리게 하소서.”하였다.





세종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간관의 말이 옳다. 그러나 해청을 기르는 것이 오늘에 시작한 것이 아니니, 또한 모두 진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성품이 사냥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강무하는 때를 당하여도 활과 화살을 갖지 아니하고, 음악·여자·개·말·화초 등의 물건도 또한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이 해청은 준일(俊逸)하고 불범(不凡)하여 보통 매와 달라서, 놓는 데도 말달리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보는 데도 눈의 시력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서, 나의 말타고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뜻에 꼭 맞는다. 그러므로 일찍이 길러서 하나의 놀이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가지고 놀되 자신이 팔뚝에 받아 본 적은 없다. 근자에 가문의 재앙으로 인하여 매양 스스로 반성하여, 지난 가을부터 금년 봄까지 한 번도 교외에 나가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이것을 아껴서 머물러 기르겠는가. 지금 큰 재앙을 당하였으니 화복(禍福)을 알 수 없으나, 혹시 안전하다면 나이도 늙지 않았고, 또한 선도 배우지 않았으니 반드시 사냥하는 일을 할 터인데, 지금 곧 놓아버리고 뒤에 다시 구하면 불가한 일이 아닌가. 또 그 기르는 데에 베 한 자나 쌀 한 말도 들지 않으니, 또한 경비에도 손실이 없을 것이다. 사리를 아는 대신이 혹은 권하기도 하고 혹은 금하기도 하였지마는, 오늘의 말과 같이 간절한 것은 있지 않았다. 이 것은 반드시 밖에 비방(誹謗)이 많은 것이니, 내가 대단히 부끄럽다. 언관이 만일 ‘매라면 모두 버려야 한다. ’고 말한다면 가하지마는, 어찌 유독 해청만 불가하다고 하는가. 기르는 것이 다른 매와 다르지 않은데 지금 가리켜 불가하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신하로서도 오히려 매를 기르는 사람이 많은데, 임금만은 새 한 마리도 기를 수 없는가.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경들도 역시 불가하다고 말하면, 내가 응방(鷹坊)을 파하겠다.”하였다.





승지들이 아뢰기를, “간관의 말이 잘못입니다. 대체를 알지 못하여 그 말이 오활(迂闊)하니 책할 것도 없습니다. 임금이 이 것을 기르는 것이 불가하다 하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노시겠습니까. 기르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하니, 이에 세종이 김문기에게 하교하기를, “말한 것이 진실로 옳으니, 내가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해청을 기르는 것이 이제부터도 아니요, 특히 진헌 때문도 아니다. 그 기르는 것이 베 한 자나 쌀 한 말의 비용도 들지 않으니, 만일 매라는 것은 모두 길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가하지마는, 유독 해청을 지적하여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이 물건을 불가하다고 하면 마땅히 선법(禪法)을 구하여야 하겠는가. 만일 선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 물건으로 하루의 희롱거리를 삼는 것이 가하지 않겠는가.”하였다. 김문기가 아뢰기를, “해청은 진귀한 새이고 특이한 산물이니 원래 길러서는 안 되고, 다른 무익한 물건들도 기를 것이 아닙니다. 또 이미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이 같은 쓸데없는 물건을 어찌 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먹는 물건도 또한 말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또 신이 매를 모두 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해청은 잡는 데에 상을 주어야 하고, 기르는 데는 땅을 택하여야 되므로 다른 매와 다르오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끝내 기를 것이 못된다고 여겨집니다.”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이 해청은 우리 지경에서 많이 산출되는 것이니, 진귀한 새와 기이한 구경거리로서 앵무새나 공작새 같은 비교가 아니다.”하였다.





3월 22일 사헌 지평(司憲 持平) 정지하(鄭之夏)·좌헌납(左獻納) 김문기(金文起) 등이 아뢰기를, “신효창의 죄는 일이 반역을 범하였으니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데, 그 생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다행 중의 다행입니다. 이제 도리어 특별한 은총을 입어서 도로 직첩을 받으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또 효창이 왕실과 혼인의 관계를 맺었으니 직첩을 도로 주는 것이 어찌 물의(物議)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의 죄가 크니 상례(常例)로 의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즉위하던 이듬해에 그 직첩을 거두었다.’고 하시오나, 당시의 나라의 대사는 태종께서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어찌 태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문득 이 사람을 죄주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실상 태종께서 하신 일이니 어찌 가볍게 그 일을 바꿀 수 있습니까. 전날 효창의 직첩을 거둘 때에 정용수(鄭龍壽)도 역시 같은 죄로 개국 공신의 녹권(錄券)에서 삭제하고 그 작첩(爵牒)을 거두어 일생을 마쳤는데, 어찌 유독 이 사람에게만 너그럽게 용서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명령을 거두어 신민의 바람을 위로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24일 세종이 말하기를, “신효창과 한때의 사람으로서 효창보다 중한 자가 많은데, 오직 효창에게만 이렇게 심하게 하니 불가하지 않은가. 전일에는 효창의 죄가 이렇게 중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비록 친구의 사이일지라도 범사를 근거없이 추측하여 말할 수 없거늘, 하물며 임금의 앞에서이겠는가.”하였다. 좌헌납(左獻納) 김문기가 대답하기를, “신 등의 말이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닙니다. 전일에 효창을 죄주기를 청한 장문(狀文)에 죄명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는데, 신 등이 그것을 보고 죄명을 열거하여 써서 장을 올린 것입니다.”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효창이 죄가 참으로 그렇다면, 효창의 자손으로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을 받은 자가 몇 사람인가. 내가 직첩을 돌려주는 것은 효창에게 사(私)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직첩을 돌려줄만하기 때문이다.”하매, 김문기가 대답하기를, “효창의 자손에게 금고(禁錮)의 법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고신(告身)을 내준 것이지마는, 효창의 직첩은 이미 회수하였으니 어찌 돌려줄 수가 있겠습니까.”하였다.





1444년 7월 1일 봉상시 윤(奉常寺 尹) 김문기(金文起)를 평안도에 보내어 산양회(山羊會)에 도적이 들어온 상황과 지위원군사(知渭原郡事)가 산양회 만호(萬戶) 등과 군기(軍機)를 잃어 버린 죄를 핵실하게 하고, 이어 김문기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금년에 적(賊)이 두 번이나 침입하였는데 한번도 그들과 싸우지 못한 것은 매우 한스럽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이 상륙(上陸)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도주(逃走)하였으니, 전번의 일에 비교하면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 적정(賊情)을 정탐한 사람들의 공로의 등급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7월 18일 평안도 경차관(敬差官) 김문기(金文起)가 치계(馳啓)하기를, “신(臣)이 이산(理山)에 이르러 친히 접전(接戰)한 곳을 살펴보니, 그 군사를 숨겨 두었던 상태가 매우 소활(踈闊)한 구석이 많았으며, 우리 군대가 웅거하여 있던 곳은 높고 험하거나 초목이 무성한 곳이 아니어서 싸움하기에 매우 편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변장(邊將)이 또 적(賊)을 유인하여 육지 깊숙이 끌어들이지 않고 적이 겨우 육지에 오르자마자 먼저 이쪽에서 급히 공격하였기 때문에 섬멸시키지 못하고 적으로 하여금 도망쳐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또 복병(伏兵)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화포(火砲)를 방사(放射)하여서 모두 군기(軍機)를 잃고 다 무찔러 죽이거나 잡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적선(賊船) 4척이 침몰하고 적병도 죽었으며, 나머지 적병들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패하여 달아났으니, 적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공로가 꽤 현저합니다. 그러나, 공과 과실(過失)이 서로 같으므로 그들의 공로를 사정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엎드려 상지(上旨)를 기다립니다.”고 하니, 유서(諭書)를 내려 회답하기를, “적을 방어한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賞罰)은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정하겠으니, 각 사람의 공과 과실을 자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1445년 4월 23일 전 수 봉상시 윤(守 奉常寺 尹) 김문기(金文起)가 계모의 상(喪)을 만나 옥천(沃川)에 있었는데,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가 추천하여 도진무(都鎭撫)로 삼으니, 김문기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의 어미가 일찍 죽으오매 나이 열 세 살 때부터 계모에게 자랐사오니, 은의(恩義)가 지극히 중하옵니다. 신은 독자이므로 상사(喪事)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먼 지방으로 부임하오면 실로 마음이 아프고 민망스러우며 신은 본디 옹졸하고 약하여 무사(武事)에 익숙하지 못하오니, 신의 임명을 바꾸옵기를 바라옵니다.”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454년 5월 11일 단종이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 김문기(金文起)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경의 계본(啓本)을 보니, ‘알타리(斡朶里)의 다롱개(多弄介) 등이 4월 27일에 죽포기이(竹苞岐伊)에 사는 모당개(毛堂介)의 집 앞에 이르러 강을 건너다가 마침 올적합(兀狄哈) 50여 명을 만나서 8인을 쏘아 1인을 죽였으나, 드디어 알타리의 이귀야(李貴也) 등의 방목(放牧)하여 기르던 말 70여 필을 빼앗아 갔는데, 고령 만호(高嶺 萬戶) 주원우(朱元愚)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쫓아가서 올적합의 군기 및 말 1필, 알타리의 말 8필을 도로 빼앗았습니다.’ 하니, 경은 이제 올적합 추장(酋長)을 달래어 말하기를, ‘너의 관하인이 비록 스스로 서로 원수가 되어 죽였으나, 그러나 국가에 고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경상(境上)에 들어왔으니, 진실로 불가한 일이다. 네가 추장으로서 금하지 못하였으니, 만일 국가에서 들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관하를 엄하게 단속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친신하는 야인을 보내어 빼앗아간 두축(頭畜)을 돌려보내게 해서 알타리에게 도로 주어라. 또한 올적합 등이 뜻을 얻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어 사세가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니, 경은 마땅히 미리 방어를 튼튼히 하고, 공(功)을 탐내어 일을 일으키는 것도 불가하고 약한 것을 보이는 것도 불가하다.”하였다.





12월 19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 김문기(金文起)에게 효유(曉諭)하기를, “지난번에 경(卿)이 아뢴 바로 말미암아 병조(兵曹)에서 수교(受敎)하기를, ‘만약 올적합(兀狄哈) 등이 강(江) 밖에서 난(亂)을 일으키면 그것은 저희들끼리 서로 원수를 갚는 것이니, 마땅히 쫓아가 쳐서 원한을 맺지 말고, 만약 강(江)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변장(邊將)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마땅히 즉시 임기(臨機)하여 쳐서 쫓아버려라. 하물며 지금 경내(境內)의 추장(酋長)들이 한성에 내조(來朝)하였는데, 만일에 올적합이 이들의 빈틈을 타서 침입하면 실로 가긍(可矜)한 일이니, 경은 마땅히 미리 먼저 포치(布置)하라.’ 하였으니, 위의 수교(受敎)에 의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야인(野人)으로 상경(上京)하는 자가 그 무재(武才)가 특이(特異)한 사람은 적당히 헤아려 궁시(弓矢)를 소지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하였다.1456년 4월 15일 세조가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니, 종친(宗親)·재추(宰樞)·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이징석(李澄石)이 아뢰기를, “공조 판서 김문기(金文起)·좌참찬 강맹경(姜孟卿)은 비록 선비라 하더라도 사후(射侯)를 잘 합니다.”하고, 청하여 과녁을 쏘게 하였다. 강맹경(姜孟卿)이 연중(連中)하므로 궁시(弓矢)를 내려 준 뒤에, 김문기(金文起)도 잇달아 맞히는 연중(連中)하니 또 궁시를 내려 주었다. 김문기는 쏜 사주(射籌)가 강맹경보다 많아서 김문기에도 환도(環刀)를 더 내려 주었다.





1456년 6월 2일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하였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6월 6일 8도(八道)의 관찰사(觀察使)·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에게 유시하기를, “근일에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박중림(朴仲林)·권자신(權自愼)·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윤영손(尹令孫)·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꾀하였으나, 다행하게도 천지신명(天地神明)과 태묘·사직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흉포한 역모가 드러나서 그 죄상을 다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소민(小民)들이 두려워할까 염려하니, 경 등은 이 뜻을 선유(宣諭)하여 경동(驚動)하지 말게 하라.”하였다. 세조조의 세조 친국 기사에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모의한 난신(亂臣)은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박중림(朴仲林)·성승(成勝)·박쟁(朴崝)·권자신(權自愼)·유응부(兪應孚)이다.





6월 8일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 提調) 윤사로(尹師路)·강맹경(姜孟卿)·이인손(李仁孫)·신숙주(申叔舟)·성봉조(成奉祖)·박중손(朴仲孫)·어효첨(魚孝瞻)과 승지(承旨)·대간(臺諫) 등을 불러서 입시(入侍)하게 한 다음,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윤영손(尹令孫)·권자신(權自愼)·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이휘(李徽)·노산군(魯山君)의 유모 봉보부인(奉保婦人)의 여종 아가지(阿加之)·권자신의 어미 집 여종 불덕(佛德)·별감(別監) 석을중(石乙中) 등을 끌어 와서 장(杖)을 때리면서 당여(黨與)를 신문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개·하위지·성삼문·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송석동·권자신·윤영손·아가지·불덕 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할 것을 꾀하여, 6월 초1일에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아울러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아가지와 불덕은 연좌시키지 말고, 나머지 사람들은 친자식들을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고, 나이 16세 미만인 자는 외방에 보수(保授)하였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안치(安置)시키며,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하고, 드디어 백관(百官)들을 군기감(軍器監) 앞 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이개 등 난신(亂臣)을 환열(轘裂)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세조조의 의금부 신문 기사에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모의한 난신(亂臣)은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이다.





성삼문(成三問)은 성격이 출세에 조급하여 스스로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이름은 남의 앞에 있으나 오래도록 제학(提學)과 참의(參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아비 성승(成勝)은 본래 이용(李瑢)과 가까이 지냈는데,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사람을 죽이고 관직이 떨어져 고신(告身)과 과전(科田)을 거두었으나, 이용(李瑢)이 자기 당류(黨類)들에게 말하기를, “성승이 가장 나를 따르고 있다. 만약 변(變)이라도 있게 되면 의당 내 말 앞에 설 사람이다.”하고, 바로 계청(啓請)하여 환급(還給)하였다. 이 말이 남들에게 퍼졌으므로 성삼문이 그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였다. 박팽년은 사위 이전(李瑔)의 연고로 항상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하위지(河緯地)는 일찍이 세조에게 견책을 받았으므로 원한을 품었었고, 이개(李塏)와 류성원(柳誠源)은 품질(品秩)이 낮은 것에 불평 불만하여 진달(進達)하려는 생각에서 마침내 서로 깊이 결탁하여 급급히 왕래하였는데, 정적(情迹)이 이상하여 남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난신(亂臣)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과 족친(族親)이 되었고, 또 친밀히 교제하였는데, 그때 김문기가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난신(亂臣)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起)가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모의하기를,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하였다.





6월 9일 세조가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이개(李塏)가 흉악한 마음을 품고 감정을 풀고자 하여 난(亂)을 일으킬 계략(計略)을 앞장 서 주장하는 창모(唱謀)하고 그의 무리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허조(許慥)·박대년(朴大年)이 같이 악한 난신(亂臣)으로 서로 부추겨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선동(煽動)하였다. 장신(將臣)인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성삼고(成三顧) 등과 비밀히 결탁하여 우익(羽翼)을 삼고 권자신(權自愼)·윤영손(尹令孫)·조청로(趙淸老)·황선보(黃善寶)·최사우(崔斯友)·이호(李昊)·권저(權著)와 연결하여 몰래 궁금(宮禁)에 연통하고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날짜를 정해 거사(擧事)하여서 장차 과궁(寡躬)을 위해(危害)하고 어린 임금을 옹립하여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흉포한 모략과 간악한 계략을 꾸며 그 죄역(罪逆)이 하늘을 뒤덮었다. 다행히 천지신명(天地神明)과 태묘사직의 도움을 받아 대악(大惡)이 스스로 드러나 모두 그 죄를 받았다.” 세조조의 교서(敎書) 기사에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모의한 난신(亂臣)은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이다.





1778년 3월 3일 정조가 고 판서 김상성(金尙星)에게 문헌(文憲)을, 고 판서 김문기(金文起)에게 충의(忠毅)를, 고 판서 이창수(李昌壽)에게 문헌(文憲)을, 순화군(順和君) 이보(李보)에게 희민(僖敏)을,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에게 효희(孝僖)를, 해안군(海安君) 이억(李億)에게 정의(靖毅)를 증시(贈諡)하였다. 1791년 2월 21일 정조가 단종(端宗)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단종(端宗) 복위(復位) 모의 거사를 선동한 다른 난신(亂臣)들과 함께 죽었는데, 영조조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하였다. 정단(正壇)에 배식한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이어(李어), 영풍군(永豊君) 정렬공(貞烈公) 이전(李瑔), 판 중추원사 이양(李穰),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충민공(忠愍公) 송현수(宋玹壽),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돈녕부 판관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도총부 도총관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 병조 판서 행 별운검(行別雲劒) 충강공(忠强公) 박쟁(朴崝), 형조 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 증 병조 판서 행 도총부 부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백(河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집현전 수찬 허조(許慥),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순흥부사(順興府使)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도진무 정효전(鄭孝全), 증 공조 참판 영월부 호장 엄흥도(嚴興道)의 32인이다. 정조조의 기사에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모의한 난신(亂臣)은 김문기(金文起), 박중림(朴仲林),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류성원(柳誠源)이다.
2013-06-22 12: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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