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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興天寺) 흥덕사(興德寺) 원각사(圓覺寺) 원형 복원해야
 김민수_
 2013-05-18 15:16:09  |   조회: 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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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興天寺) 흥덕사(興德寺) 원각사(圓覺寺) 원형 복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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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7년 2월 19일 정릉(貞陵)에 거둥하여 흥천사(興天寺)의 역사를 살폈다. 태조가 처음에 정릉에 절을 세운 것은 조석의 향화(香火)만을 받들기 위함이었는데,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이 잔재주와 영리한 것으로 예쁘게 보이기를 구하여 사치와 화려한 것을 극진히 하였다. 10월 16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최용소(崔龍蘇)를 흥천사(興天寺)에 보내어 재앙을 제거하는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11월 15일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고, 드디어 지천사(支天寺)로 갔다. 1398년 5월 1일 태조가 흥천사(興天寺)에 가서 사리전(舍利殿) 3층을 흥천사의 북쪽에 건축하도록 명령하고, 각영(各領)의 대장(隊長)과 대부(隊副)로 자원하는 사람 50명을 모집하여 식량을 주어 부역(賦役)에 나오게 하였다. 7월 14일 음력 7월 보름날 조상님의 넋에 공양하고, 아울러 부처님·승려·중생에게 공양하여 부모의 장양자애(長養慈愛)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올리는 우란분재(盂蘭盆齋)를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었다. 1398년 8월 9일 태조가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여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천신(薦新)하는 재회(齋會)인 천회(薦會)를 관람하였다. 8월 13일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대상재(大祥齋)를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었는데, 도당(都堂)에서는 흥복사(興福寺)에서 별도로 행하였다.







1406년 7월 27일 태종이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을 보내어 우사단(雩祀壇)과 원단(圓壇)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회암사(檜巖寺)와 흥덕사(興德寺)에서 도량(道場)을 베풀게 하고, 또 각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에게 명하여 두루 봉내(封內)의 산천(山川)에 빌게 하였다. 1408년 5월 25일 흥덕사(興德寺)에 참경(懺經)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8월 17일 화엄 삼매참 법석(華嚴三昧懺法席)을 빈전(殯殿)에 베풀었다. 태종이 사재(私財)를 들여 법회(法會)를 판비(辦備)하고 흥덕사(興德寺) 주지住持) 설오(雪悟)를 강주(講主)로 삼았다. 검은 치의(緇衣)를 입은 승려(僧侶)인 치도(緇徒)가 무릇 1백 8명인데 각각 옷과 바리를 내려 주고, 상왕(上王)이 또한 각각 가사(袈裟)를 내려 주었다. 9월 5일 대행 태상왕의 백일재(百日齋)를 흥덕사(興德寺)에 베풀었다. 10월 21일 흥천사(興天寺)의 원속 전민(元屬田民)을 속공(屬公)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각종(各宗)의 사사(寺社)를 당초에 상정(詳定)한 것이 그 액수(額數)가 있사온데, 지금 새로 창건한 개경사(開慶寺)를 조계종(曹溪宗)에 가속(加屬)시켰으니, 비옵건대, 조계종에 속한 흥천사(興天寺)를 화엄종(華嚴宗)에 이속(移屬)하고, 화엄종에 속한 지천사(支天寺)는 태평관(太平館)에 가까워서 승도(僧徒)들이 모여 살기에 마땅치 않으니, 전민(田民)을 모두 흥천사에 붙이고 사신(使臣)의 반인(伴人)의 관사(館舍)로 삼고, 흥천사의 원속 전민(元屬田民)은 속공(屬公)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1410년 5월 19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흥덕사(興德寺)에서 읽었다. 태조(太祖)께서 일찍이 사시던 궁(宮)을 희사(喜捨)하여 흥덕사를 만들고, 또 명하여 육백반야경을 써서 이 절에 간직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태조의 기신(忌辰)이 장차 가까워 오므로, 전기(前期)하여 회(會)를 베풀고 승도(僧徒)로 하여금 경(經)을 읽게 하였다. 상왕(上王)과 태종이 함께 절에 올라갔다. 1411년 5월 23일 태조(太祖)의 기신재(忌晨齋)를 흥덕사(興德寺)에서 베풀고,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모두 흥덕사(興德寺)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의정부에 명하기를, “금후로는 태조의 기신(忌晨)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기신에는 태조의 소상(小祥) 예(例)에 따라 행하고, 불전(佛前)에 시주하는 것은 초(綃)로써 사용하되, 항식(恒式)으로 삼으라.” 하고, 또 명하기를, “공신(功臣)들이 태조의 기신재(忌晨齋)를 베푸는 것은 공신들이 주상(主上)을 향한 정성인 것이다. 나에게 향(香) 꼽기를 청하는 것은 미편(未便)한 일이니, 금후로는 다시는 청하지 말라.”하였다. 태종이 이 날부터 이 달 그믐에 이르기까지 육선(肉膳)을 들지 아니하였다.





1411년 7월 11일 태종이 예조에 명하여 산천 제신(山川 諸神)에 비를 빌고, 또 무속인을 백악(白岳)에, 맹인(盲人)을 명통사(明通寺)에 모이게 하여 빌게 하였다.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공부(孔俯)를 불러서 광연루(廣延樓) 아래에 석척(蜥蜴)으로 비를 빌고 승도(僧徒) 1백으로 하여금 흥천사(興天寺) 사리전(舍利殿)에 빌고, 또 명하여 비를 기도할 때 사용하는 흙으로 만든 용(龍)인 토룡(土龍)에게 제사하였다. 9월 22일 신의왕후(神懿王后) 기신재(忌晨齋)를 흥덕사(興德寺)에서 베풀었는데, 태종이 “이제부터 태조(太祖)와 신의왕후 기신재에는 의정부(議政府) 대언사(代言司)가 모두 참여하라.” 명하였다. 1413년 7월 5일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 등을 북교(北郊)·백악(白岳:북악산)·목멱(木覓:남산)·양진(楊津)·한강(漢江)에 보내어 기우제(祈雨祭)를 행하고, 승려 1백 명을 흥천사(興天寺)의 사리탑(舍利塔)에 모아서 조계종(曹溪宗) 판사(判事) 상형(尙形)에게 향(香)을 받들어 비를 빌게 하고, 또 여러 무속인에게 한강에서 기도하게 하고, 검교(檢校) 공조 참의 최덕의(崔德義)를 보내어 저자도(楮子島)에서 용(龍)을 그려 물 속에 넣으면서 지내는 기우제(祈雨祭)인 화룡제(畫龍祭)를 행하였다. 1416년 7월 22일 기신재(忌晨齋)를 흥천사(興天寺)·흥복사(興福寺)에 베풀라고 명하였다. 태종이 “전에는 선후(先后)의 기신재를 장의사(藏義寺)에서 행하였으나, 지금은 장의동(藏義洞) 문을 폐쇄하여 쌀을 운반하는 것과 왕래하는 것이 폐단이 있으니, 성내(城內) 두 절에서 서로 베풀어 행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으라.”말하였다.1418년 1월 26일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이 완두창(剜豆瘡)이 나서 병이 위독하였다. 태종이 총제(摠制) 성억(成抑)에게 명하여 향(香)을 받들고 흥덕사(興德寺)에 나아가서 승려나 무속인을 모아서 정성을 드려 비는 정근(精勤)하고 기도(祈禱)하게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점을 잘치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이종(李褈)의 길흉(吉凶)을 물어보게 하니, 맹인(盲人) 한각운(韓覺云)·정신오(鄭信悟) 등이 점을 치고 모두 말하기를, “길(吉)합니다.”하였다.





1419년 8월 23일 전에 태조께서 속설로서 전하는 석가여래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이에서 나온 사리(舍利) 네 개와 두골(頭骨)과 패엽경(貝葉經)과 가사(袈裟) 등을 흥천사(興天寺) 석탑 속에 두게 하였는데 세종이 내시 김용기(金龍奇)에게 명하여 밤에 석탑에서 옮겨다가 내불당에 두게 하고, 그 대신 석가여래 두골에서 나온 사리 네 개를 탑 속에 두게 하였다.1421년 4월 9일 영의정 류정현 등이 세종의 탄일을 위하여 흥천사(興天寺)에서 축수재(祝壽齋)를 올렸다. 1422년 1월 24일 세종이 도총제 권희달·동지총제(同知摠制) 이수(李隨)를 보내어 두 전하의 선온(宣醞)을 가지고 흥덕사(興德寺)에 가서 축성(築城)하는 동면(東面)의 여러 제조(提調)를 위로하게 하고 총제(摠制) 이순몽(李順蒙)·변이(邊頤)에게는 지천사(支天寺)에 가서 서면(西面)의 여러 제조를 위로하게 하였다.8월 3일 진제소(賑濟所)를 한성 안에 있는 흥복사(興福寺)에 두어 굶주리는 자를 모아 구휼하였다.1423년 4월 18일 사신이 흥천사(興天寺)를 구경하고 법당(法堂)에 들어가 세 번 절하여 예불(禮佛)하고, 사리각(舍利閣)에 나아가서도 세 번 절하였다. 높은 데 올라 경복궁(景福宮)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산세(山勢)나 물 흐름이 모두 음양(陰陽)의 이치에 맞으니 참으로 하늘을 만든 도읍이라.”하였다. 승려 60여 명이 가사(袈娑)를 입고 사신을 영송하니, 사신도 읍(揖)하여 예하였다.





1425년 4월 19일 흥천사(興天寺)의 종(鍾)을 옮겨다가 남문에 달게 하였다. 6월 25일 태일(太一)에게 비를 비는 기도를 소격전(昭格殿)에서 하고, 기우하는 치성을 흥천사(興天寺)에서 드렸다. 1427년 5월 29일 사직(社稷)에 비를 빌고, 또 동자(童子)들을 광연루(廣延樓) 아래에 모으고, 승려들을 흥천사(興天寺)에 모으고, 무녀(巫女)들을 흥인문(興仁門) 밖에 모아서 비를 빌었다. 6월 20일 승려들을 흥천사(興天寺)에 모으고 무속인들을 한강에 모아 기우하고, 맹인들은 각자 명통사(明通寺)에 모여 기우하였다. 1433년 1월 30일 문소전(文昭殿)에 불당(佛堂)을 걷어 없애기를 명하고, 그 불상(佛傷)과 잡물(雜物)을 흥천사(興天寺)에 옮기게 하였다.1436년 윤6월 1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전일에 계달하온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일종(一宗)으로 하여 한성 밖으로 내쫓을 것과 남녀의 무당을 기외(畿外)로 물리칠 것의 일들을 아직도 윤허를 받지 못하여 신 등은 몹시 실망하고 있습니다.”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교종(敎宗)의 흥덕사(興德寺)는 태조(太祖)께서 건물을 시사(施舍)하신 곳이며, 선종(禪宗)의 흥천사(興天寺)도 역시 태조께서 창건하신 것인즉, 모두 훼철(毁撤)할 수 없으며, 무당은 옛날의 삼대(三代)에도 있었으니 믿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멀리 추방할 것이 없다.”하고, 드디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437년 7월 18일 세종이 교서하기를, “흥천사(興天寺)와 흥덕사(興德寺)의 두 절은 모두 태조께서 처음 세운 것이다. 이제 세월이 오래 되어서 비가 새고 기울어지니, 만일에 중수하지 않으면 후손이 삼가서 지키는 도리가 되지 않는다. 지금부터 선공감(繕工監) 4품 이상 관원 2인으로 하여금, 창덕궁 종루(鍾樓)의 예에 의하여 나누어 맡아서, 석 달마다 친히 가서 살펴보고 혹 비가 새거나 기울어지는 일이 있거든, 즉시 수리하도록 하는 것을 영구히 일정한 법식으로 하라. 또 이 두 절 안에는 모든 도감의 일정한 업무나 책임을 맡은 개별 색관(色官)인 각색(各色)과 각 관청에서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하였다. 1438년 5월 27일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병이 위독하매, 드디어 동부승지 정충경(鄭忠敬)에게 명하여 승려 33명을 흥덕사(興德寺)에 모아서 구명(救命)의 불공을 베풀어 정성을 다하게 하고, 임금이 친히 소문(疏文)에 서압(署押)하였다. 1447년 9월 24일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에게 명하여 불골(佛骨)을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에 간직하게 하였다. 불골은 본디 이 각(閣)에 있었는데 일찍이 대궐 안에서 들여왔던 것이었다. 외인(外人)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었는데 이번에 돌려간 것이었다. 1449년 10월 26일 우참찬 정갑손(鄭甲孫)·예조 판서 허후(許詡)·숭덕 대부 이정녕(李正寧)에게 명하여 태묘·사직·소격전(昭格殿)으로 나누어 가 빌게 하고,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도승지 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관음정근(觀音精勤)을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게 하였다. 12월 3일 세자(世子)의 병이 나았으므로, 보사제(報祀祭)를 태묘와 사직에 행하고, 또 보공재(報功齋)를 불당(佛堂)과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되, 향악(鄕樂)을 연주하여 받들게 하였다.





1454년 7월 27일 단종이 승려(僧侶)를 모아 흥천사(興天寺) 사리각(舍利閣)에서 기우(祈雨)하고 동자(童子)를 모아 경회루(慶會樓) 못에서 용과 비슷하다 하여 도마뱀을 잡아 물에 잠그고 지내던 기우제인 석척 기우(蜥蜴 祈雨)를 행하였다.1464년 5월 2일 세조가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 명(命)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근일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 법회(圓覺法會)를 베푸니, 여래(如來)가 현상(現相)하고 감로(甘露)가 내렸다. 황가사(黃袈娑)의 승려 3인이 탑(塔)을 둘러싸고 정근(精勤)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또 빚이 대낮과 같이 환하였고 채색(彩色)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 분신(舍利分身)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舍利)를 함원전(含元殿)에 공양(供養)하였고, 또 분신(分身)이 수십 매(枚)였다. 이와 같이 기이(奇異)한 상서(祥瑞)는 실로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興福寺)를 세워서 원각사(圓覺寺)로 삼고자 한다.” 하였다.





6월 5일 세조가 원각사(圓覺寺)에 거둥하여,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이조 판서(吏曹 判書) 한계미(韓繼美)를 좌상(左廂)·우상(右廂)의 대장(大將)으로 삼고, 안요경(安堯卿) 등 13인을 부장(部將)으로 삼아, 군사(軍士)들을 검찰(檢察)하여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때 군사(軍士)로서 역사에 나온 자가 2천 1백여 인이었고, 무릇 근방 인가(人家) 2백여 채를 모두 철거(撤去)하였다. 6월 12일 와요 제조(瓦窯 提調)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을 불러 원각사(圓覺寺) 법당(法堂)에 덮을 청와(靑瓦)를 의논하니, 모두 8만 장(張)이라 구워서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경비가 매우 컸었다. 은천군(銀川君) 이찬(李禶)·옥산군(玉山君) 이제(李躋)를 원각사(圓覺寺)의 감역(監役) 독찰관(督察官)으로 삼으니, 그 의물(儀物)이 대헌(臺憲)과 같았고, 각각 지인(知印) 1인, 나장(螺匠) 2인, 영사(令史) 1인, 소유(所由) 2인을 거느렀다. 6월 16일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원각사(圓覺寺)의 대종(大鐘)을 주조(鑄造)하여 만드는 동(銅)이 5만 근(斤)이라야 가능한데, 한성과 외방(外方)에 현재 있는 동(銅) 2만 4천 1백 64근(斤) 8냥(兩) 3전(錢)을 제(除)하고, 그 나머지 부족한 동(銅)은, 청컨대 개성부(開城府)에서 1만 4천 7백 14근(斤) 5냥(兩) 8전(錢)을, 경기(京畿)에서 1천 2백 10냥(兩) 5전(錢)을, 충청도(忠淸道)에서 1천 5백 91근(斤) 6냥(兩) 1전(錢)을, 경상도(慶尙道)에서 6천 6백 54근(斤) 15냥(兩) 9전(錢)을 전라도(全羅道)에서 1천 6백 72근(斤) 1냥(兩)4전(錢)을 시가(時價)에 따라 무역(貿易)해서 올려 보내게 하소서.”하니, 세조가 그대로 따랐다.





1464년 6월 19일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가 아뢰기를, “이 달 13일에 원각사(圓覺寺) 위에 황운(黃雲)이 둘러쌌고, 천우(天雨)가 사방에서 꽃피어 이상한 향기가 공중에 가득 찼습니다. 또 서기(瑞氣)가 회암사(檜巖寺)에서부터 경도사(京都寺)까지 잇달아 뻗쳤는데, 절의 역사(役事)하던 사람과 도성(都城) 사람, 사녀(士女)들이 이 광경을 보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하였다. 7월 12일 처음에 원각사(圓覺寺)의 장인(匠人)은 항상 90인을 궤향(饋餉)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인력(人力)이 많으니 일이 태만하여 그 폐단됨이 매우 심하다. 40인을 도태(陶汰)하고 다만 50인만을 궤향하고, 그들에게 성공(成功)을 책임지우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 이루지 못하면 마땅히 중죄(重罪)를 가(加)하라. 이러한 뜻을 원각사 제조(圓覺寺提調)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고, 또 정원(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광흥창(廣興倉)인 태창(太倉)의 설치에 여러 고을로 하여금 스스로 재목(材木)을 수송하게 한다면 각각 다투어 먼저 하려고 힘써서 소요(騷擾)가 막심(莫甚)할 것이니, 공가(公家)에서 스스로 준비하도록 하여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도록 하고자 하는데, 경(卿)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선공 제조(繕工 提調)에게도 물어보라.”하였다.





7월 24일 호조(戶曹)에서 경시서(京市署)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시서(京市署)가 원각사(圓覺寺)의 기지(基地)로 들어가 일찍이 이미 철거(撤去)하였습니다. 경시서(京市署)는 본래 시전(市廛)을 위한 것인데, 그 설치를 반드시 시전(市廛) 가까이 하여야만 물가(物價)의 하락과 앙등과 저자 물건의 상품이 견고하지 못하고 진짜가 아닌 행람(行濫)을 살필 수가 있으니, 청컨대 경시서(京市署)를 통례문(通禮門)에 옮기고, 통례문을 전선색(典船色)으로 옮기고, 전선색을 삼간 병문(三間屛門)으로, 하행랑(下行廊)으로 차례 차례 옮겨 설치하여서 직사(職事)에 편하게 하소서.”하니, 세조가 그대로 따랐다. 1465년 1월 16일 원각사(圓覺寺)의 대종(大鍾)이 이루어졌다. 4월 7일 원각사(圓覺寺)가 낙성되었다. 세조가 원각사(圓覺寺)에 나아가 불상을 새로 만들었거나 법당을 새로 낙성하였을 때에 그 기념으로 여는 법회(法會)인 경찬회(慶讚會)를 베푸니 부회(赴會)한 승려가 1백 28이고, 어정 구결(御定口訣)하고 번역(飜譯)한 원각수다라료의경(圓覺修多羅了義經)을 펴 보고, 외호(外護)의 승려 2만(萬)을 먹이었다. 1466년 7월 15일 원각사(圓覺寺)의 백옥 불상(白玉佛像)이 이루어지니, 함원전(含元殿)에 맞아들여서 불상을 만들거나 그릴 때 최후로 그 눈을 박거나 찍는 점안(點眼)하는 법회(法會)를 베풀었다. 1467년 4월 8일 원각사(圓覺寺)의 탑(塔)이 이루어지니, 연등회(燃燈會)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 1468년 8월 12일 세조의 병이 심하므로 세자(世子)가 명하여 조신(朝臣)을 나누어 보내어 사직(社稷)과 소격전(昭格殿)·명산대천(名山大川)의 여러 영험(靈驗) 있는 곳과 원각사(圓覺寺)에 기도(祈禱)하게 하였다. 8월 24일 세자(世子)가 세조가 오래도록 평복(平復)되지 못하므로 근심하고 걱정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조신(朝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원각사(圓覺寺)와 장의사(壯義寺) 및 명산대천(名山大川)에 기도하게 하였다.





1468년 12월 16일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사람이 죽은 지 백일되는 날에 불공드리는 백일재(百日齋)인 백재(百齋)를 원각사(圓覺寺)에서 베풀고, 예종이 영창전(永昌殿)에 나아가서 상식(上食)하고, 돌아오다가 원각사(圓覺寺)에 이르러서 향(香)을 태웠다. 태비(太妃)가 중궁(中宮)·수빈(粹嬪)과 윤 소훈(尹昭訓)과 더불어 또한 원각사에 나아가서 불사(佛事)를 보고, 명하여 원각사 중에게 쌀 50석(石)을 내려 주고, 강도(强盜)·절도(竊盜) 외에 유형(流刑) 이하의 죄인(罪人)을 석방하고, 위사(衛士)에게 별사(別仕) 3일을 주었다.1469년 1월 6일 예종이 족질(足疾)이 있은 지 오래 되어도 낫지 아니하여, 목멱산(木覓山)과 백악산(白岳山)·한강(漢江)·원각사(圓覺寺)·복세암(福世菴) 등에 기도(祈禱)하게 하였다. 도승지 권감(權瑊)은 또한 향(香)을 받아 가지고 내불당(內佛堂)으로 갔다.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임금을 문안(問安)하고 말하기를, “지난번에 전지하시기를, ‘족질(足疾)로 인하여 인견(引見)하지 못한다.’고 하시었는데, 지금 기도를 드리니,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릴 적부터 발에 조금 헌 양처(痒處)가 있었는데, 추위가 심해지면서부터 아프기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좀 나았다.”하고, 곧 술을 먹이게 하였다.5월 17일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지금 장마가 그치지 아니하니, 원각사(圓覺寺)와 흥천사(興天寺)에 기청 불사(祈晴佛事)를 행하게 하라.”하였다.7월 11일 예종이 북교(北郊)에서 기우(祈雨)하고, 흥천사(興天寺)·원각사(圓覺寺) 등에서 기우 불사(祈雨佛事)를 베풀었다. 7월 13일 예종이 기우 초제(祈雨 醮祭)를 소격전(昭格殿)에서 행하고, 또 기우 불사(祈雨 佛事)를 내불당(內佛堂)·흥덕사(興德寺)에서 베풀었다. 11월 26일 행향사(行香使)를 나누어 보내어서 태묘(太廟)·사직(社稷)·영창전(永昌殿)·소격서(昭格署)·숭은전(崇恩殿) 및 원각사(圓覺寺) 등의 절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기도하였다.





1474년 윤6월 21일 성종이 흥천사(興天寺)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고 또 도봉산(道峯山) 진암(辰巖)에서 나무를 태워 불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번시(燔柴)하였다.1489년 5월 19일 성종이 한성부(漢城府)에 전지(傳旨)하기를, “만약 우리나라에서 풍수설(風水說)을 사용하는 것은 오늘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다. 흥덕사(興德寺) 뒤의 고개는 곧 창경궁(昌慶宮)의 외청룡(外靑龍)이니, 폐쇄함이 마땅하다. ‘성(城)으로 막고 길을 내어 끊는 것은 풍수지리에서 꺼리는 것이다.’ 하니, 흥덕사 북쪽 길은 막도록 하라.”하였다. 1504년 7월 15일 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가 전교하기를, “흥덕사(興德寺)를 원각사(圓覺寺)에 옮기라.”하였다.1505년 2월 21일 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가 전교하기를,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圓覺寺)에 옮기어, 가흥청(假興淸) 2백, 운평(運平) 1천, 광희(廣熙) 1천을 여기에 상사(常仕)케 하고, 총률(摠律) 40인으로 하여금 날마다 가르치게 하라.” 하였다.





1541년 6월 1일 중종이 정원에 “오늘 도성(都城)의 사면(四面)을 둘러 싸고 있는 사산(四山)을 조사(調査)하는 적간(摘奸)할 때에 동대문 쪽과 남대문 쪽인 동남도(東南道) 내관(內官)의 말에 의하면, 김안로(金安老)가 건백(建白)하여 동남 근처에 종각(鐘閣)을 짓고 그곳에 큰 종(鐘)인 홍종(洪鍾)을 달았었는데, 그 뒤에 종각을 헐어버렸으나 종은 아직도 그곳에 버려두고 군사(軍士)를 시켜 지키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군사에게 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항상 숙직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리고 남대문의 종은 중국 황제의 사신(使臣)을 일컫는 칙사(勅使)인 천사(天使)가 왔을 때 중국 사신 일행 중 무역하러 따라온 북경 상인(北京商人)인 두목(頭目) 등이 만약 보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 대답하기가 또한 곤란할 것이다. 요즘 유위군(留衛軍)들이 모두다 한가하게 놀고 있으니 그들을 시키면 이 종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옮겨 놓을 곳이 없으면 남대문의 종은 군자감(軍資監) 안에 옮겨 두면 된다. 그렇게 하면 군사가 지키는 폐단도 없을 것이니 그 일을 병조와 공조에 말하라. 동대문의 종도 둘 만한 곳이 없으니 훈련원(訓鍊院)에다 옮겨 놓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군사가 많지 않으면 옮길 수 없을 것이니 이 뜻을 모두 공조 등에게 말하라.”전교하였다.
2013-05-18 15: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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