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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묘(太廟) 태묘제(太廟祭) 재지정
 김민수_
 2013-04-28 20:19:07  |   조회: 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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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묘(太廟) 태묘제(太廟祭) 재지정,태묘(太廟) 정전(正殿),영녕전(永寧殿)의 신실(神室)을 증축,조선국 최초의 왕대비인 성비 원씨,제헌왕후,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거창군부인 신씨,공성왕후,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문성군부인 류씨,고조 광무제의 친부 흥선헌의대원왕을 조선국 국왕 묘호 추상,대한국 황제 추존,여흥순목대원비와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국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추봉) 의친왕을 3대 황제 추존하여 의친왕비와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에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 민족자결(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본 왕족 마사코와 혼인하고 일본 육군 중장 역임,유럽여행하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마사코의 신주(神主)를 거주(去主)하고 완친왕,영친왕비 민씨를 부묘(祔廟)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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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인 태묘(太廟)에서 태묘제례(太廟祭禮)가 태묘제례악(太廟祭禮樂)에 맞추어 봉행된다. 태묘(太廟) 정전(正殿)에는 대한국 태조 고황제부터 순종 융희제에 이르기까지 19실(室)의 신위를, 별전(別殿)인 영녕전(永寧殿)에는 16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정전(正殿)은 서편을 위로하여 1실이 있고 19실이 동편 끝에 있으며, 영녕전 중앙에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태조 고황제 위의 4대조 신위가 있다.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인 태묘(太廟)의 신실(神室)에 어보를 봉안했으며 신주장 서쪽 우백호(右白虎)의 선왕의 신주는 백저건(白苧巾)으로 덮고 신주장 동쪽 좌청룡(左靑龍)의 선후의 신주는 청저건(靑苧巾)으로 덮었고 어보는 국조보감과 함께 보장(동장)에 국왕,왕후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어책(御冊)을 책장(서장)에 봉안하였다. 대한국 태조 고황제는 1394년 8월 태묘(太廟) 터를 보았고 9월 감산(坎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한 그 곳에 태묘 터를 결정하였고 12월부터 영건(營建)을 시작해 1395년 9월에 1차 영건(7칸)이 끝났으며 1546년(명종 1) 정전을 11칸으로 늘렸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4년(선조 37)부터 중건이 논의되어 선조 41년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등 공사를 개시한 후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가 즉위하던 해인 1608년 5월 중건되었으며 1726년(영조 2) 신실 4칸을 증축하여 15칸으로 되었다가 1836년(헌종 2) 신실(神室) 4칸을 증축하여 19칸 규모가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총독부가 대한국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대한국 고조 광무제,순종 융희제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황제 추존 시 묘호,제호 올리는 예로 잘못 올렸으므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개상(改上)해야 하며 태묘(太廟), 태묘제례(太廟祭禮)로 재지정하고 태묘(太廟) 정전(正殿),영녕전(永寧殿)의 신실(神室)을 증축하고 조선국 최초의 왕대비인 성비 원씨,제헌왕후,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거창군부인 신씨,공성왕후,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문성군부인 류씨,고조 광무제의 친부 흥선헌의대원왕을 조선국 국왕 묘호 추상,대한국 황제 추존,여흥순목대원비와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국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추봉) 의친왕을 3대 황제 추존하여 의친왕비와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에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 민족자결(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본 왕족 마사코와 혼인하고 일본 육군 중장 역임,유럽여행하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마사코의 신주(神主)를 거주(去主)하고 완친왕,영친왕비 민씨를 부묘(祔廟)해야 한다.







전사청(典祀廳)은 태묘 정전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태묘의 제사에 사용하는 제사 음식을 장만하던 곳으로 수라간의 기능을 하였으므로 신주(神廚)라고도 한다. 마당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마당에는 제수를 준비하던 돌절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맡은 집'이라는 뜻인데 제사에 쓰이는 여러가지 용품을 관장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향대청(香大廳)은 태묘의 정문을 지나 망묘루 북쪽에 있는 건물이다. 태묘의 제사에 쓰이는 향(香),축폐(祝幣) 등을 보관하기도 하고, 제향(祭享)을 앞두고 참여할 헌관(獻官)들이 대기하기도 하던 장소이다. 남북으로 자리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두 채가 배치되어 있다.'향대청(香大廳)'은 '향을 보관하는 대청(大廳)'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의 몇 가지 기능 중 향을 보관하는 것을 대표로 들어서 '향'자를 붙인 것이다. 악공청(樂工廳)은 태묘제례 때에 음악을 담당한 악공들이 준비하며 연습도 하고 대기하던 곳이다. 악공청은 두 군데로 정전과 영녕전 밖 서남쪽에 각각 있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의 경우 지금은 개수하여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 있다.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작다. 어숙실(御肅室)은 태묘 정전의 동쪽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며 국왕이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의복으로 차려 입고서 세자와 함께 태묘에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어숙실 마당을 중심으로 앞 쪽에 보이는 것이 어숙실이고, 오른쪽으로 세자가 제사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 세자재실(世子齋室), 왼쪽으로 국왕이 목욕을 하는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어숙실(御肅室)'은 '국왕이 엄숙하게 제사 준비를 하는 집'이라는 뜻이며 국왕이 엄숙한 마음으로 재계(齋戒)를 하는 집이라는 의미로 재궁(齋宮)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부른다. 수복방(守僕房)은 태묘 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 방향으로 자리한 4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태묘를 지키고 청소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집이다.'수복(守僕)'은 태묘서나 향(香)과 축문(祝文)을 보관·관리하던 향실(香室)을 관장하던 교서관을 비롯해 각 단(壇)·능(陵)·궁(宮) 등에 소속되어 청소하는 일을 담당하던 잡직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국 건국 이후 '상소(上所)'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438(세종 20)년에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수복으로 개칭하여 경국대전에서 제도화되었다. 망묘루(望廟樓)는 태묘의 정문을 지나 동쪽에 있는 건물이며 태묘에 제사를 지내러 온 국왕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연못 방향으로 난 한 칸은 다락처럼 높게 지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망묘루 옆 연못은 1443(세종 25)년에 만들었다. 사각형의 연못에 둥근 섬이 들어서 있는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상징한다. '망묘(望廟)'는 '태묘의 정전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태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태묘와 사직의 안위를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칠사당(七祀堂)은 태묘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 서쪽에 있는 각종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사명(司命)·호(戶)·조(竈)·문(門)·여(厲)·행(行)·중류(中霤)라는 신들이 있고 이 모두를 합쳐 칠사(七祀)라 부른다. 계절에 따라 각각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봄에는 사명과 호,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문과 여, 겨울에는 행과 중류를 모셨다. 이 가운데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五祀)라고 한다. '칠사당(七祀堂)'은 '일곱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사명(司命)은 삼명(三命)의 감찰을 주관하고, 호(戶)는 출입을 주관하고, 조(竈)는 음식을, 문(門)은 출입을 주관하고, 여(厲)는 살상과 형벌을 주관하고, 행(行)은 도로의 행작(行作)을 주관하고, 중류(中霤)는 거처를 주관한다. 공신당(功臣堂)은 태묘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 동쪽에 있는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국왕의 생존 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국왕의 묘정(廟庭)에 함께 모셨다. 태조의 공신 조준(趙浚)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 융희제의 공신 서정순(徐正淳)에 이르기까지 모두 19분의 임금 신위에 배향된 83위의 공신이 모셔져 있다. 창건 당시에는 5칸짜리였으나 공신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 규모가 계속 커져 지금은 모두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이 곳에 모신 공신은 이른바 배향 공신으로 생전에 공적이 많은 사람을 해당 임금의 사후에 선정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은 고려국 31대 공민왕(恭愍王)과 그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태묘를 창건할 때 함께 세워졌으며 망묘루(望廟樓)와 향대청(香大廳) 사이에 있다. 신당 안에는 중앙의 벽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함께 그린 영정(影幀)이, 옆면의 벽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창엽문(倉葉門)은 태묘(太廟)의 정문으로 외대문(外大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이며 좌우로 태묘 외곽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창엽문이라는 이름은 정도전(鄭道傳)이 붙였다고 전한다. '창엽(倉葉)'은 '푸른 잎'이라는 뜻이며 푸른 잎처럼 조선국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북신문(北神門)은 임금의 태묘(太廟) 친제(親祭)시에 출입하는 창경궁과 태묘 사이에 있는 문이다.





태묘(太廟)의 단단한 밤나무 율목(栗木)으로 만든 신주(神主)인 율주(栗主)에 혼(魂)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신주(神主)를 모시어 두는 궤인 주독(主櫝)에 혼(魂) 구멍을 뚫어 혼(魂)이 깃드는 곳으로 삼았다.승하(昇遐)한 조선 국왕,붕어(崩御)한 대한국 황제는 묘호(廟號), 시호(諡號), 존호(尊號)를, 왕후는 시호(諡號), 존호(尊號), 휘호(徽號)를 제주(題主)하였는데 밤나무 신주 율주(栗主)를 받들어 향탕(香湯)으로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아서 탁자 위에 눕혀 놓으면 제주관(題主官)이 동계(東階)로 올라가서 탁자 앞으로 나아가 서향하고 서서 검은 글씨 흑서(黑書)로 제주(題主) 쓰기를 마치면 광칠(光漆)로 거듭 칠하였다. 조선국은 명(明)나라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조선국 국왕이 승하(昇遐)하면 명국에 청시(請諡)하여 사시(賜諡)를 받고 나서 제주(題主)하였다. 태조부터 인조의 아버지 원종까지 신주는 먼저 명나라의 사시(賜諡)를 쓰고 다음에 조선국의 묘호, 시호, 존호를 썼고 인조 대부터는 청나라에서 시호를 받았으나 이를 신주에 쓰지 않고 조선국의 묘호, 시호, 존호만 썼다. 묘호(廟號)는 태묘(太廟)의 신주(神主)의 이름 즉, 조(祖)와 종(宗)을 말하며 조(祖)와 종(宗)은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을 기본 원칙으로 하며 조선 1대 태조- 25대 철종,추존 왕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2대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까지 적용되었다. 조(祖)는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장조,정조,순조,문조,고조 광무제 등 건국 또는 새로 대통(大統)을 시작한 왕,황제에게, 종(宗)은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덕이 많은 왕,황제에게 붙여졌다. 일본제국주의 총독부가 대한국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대한국 고조 광무제, 순종 융희제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황제 추존 시 묘호, 제호 올리는 예로 잘못 올렸으므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개상(改上)해야 한다.





시호(諡號)는 승하한 국왕과 왕후가 생전에 행한 업적을 평가받은 이름이므로 대행(大行)이 있는 분은 대명(大名)을 받고, 세행(細行)이 있는 분은 소명(小名)을 받으며 대왕이 8자, 왕후가 2자인 것이 정례(定例)였다. 시호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도감(諡號都監)이 설치하고 승하한 국왕,왕후의 행적에 적합한 시호를 가려 예조(禮曹)에 고하면 예조에서는 의정부(議政府)에 알리고, 의정부에서 적합한 시호를 가려 국왕의 재가(裁可)를 받고 재가를 받으면 공조(工曹)에서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를 제작하며 예조에서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를 행한다. 존호(尊號)는 국왕과 왕후의 덕을 칭송하는 호(號)이며 존호도감(尊號都監)이 국왕이나 왕후가 경하(慶賀)할 일이 있을 때 상존호(上尊號),가상존호(加上尊號)하는데 승하한 후 부묘(祔廟)할 때에 추상존호(追上尊號)하는 일도 있었으며 추존(追尊)도 하며 복위상존호(復位上尊號)하기도 하고 국왕의 존호는 4자, 또는 8자이며, 왕후의 존호는 2자이다. 휘호(徽號)는 조선국 왕후가 승하한 후, 대한국 황후가 붕어한 후에 상시호(上諡號)와 함께 올리는 존호이며 4자(四字)가 정례(正例)이었다.1921년 3월 9일 책보(冊寶)를 받들고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제휘열목(齊徽烈穆)이라는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1928년 5월 3일 순명황후(純明皇后)의 휘호(徽號)를 경현(敬顯)으로 하기로 의논해서 정하였다.





태묘제례(太廟祭禮)는 춘하추동 4시(四時)와 12월 납향절(臘享節)에 오대향(五大享)을 봉행하였으며 영녕전(永寧殿)은 태묘(太廟) 정전과 더불어 봄,가을에 향사(享祀)하였다.제향(祭享)은 대한국(大韓國) 황제가 직접 봉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으며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品階) 또는 축문(祝文)이 다르다. 절차는 홀기(笏記)를 낭독하는 창홀(唱笏)에 따라 진행되고 제기(祭器)는 63기가 있으며, 제물(祭物)은 소, 돼지, 산양의 3생(三牲), 2갱(二羹), 서직도량(黍稷稻梁), 2제(二齊), 3주(三酒), 6과(六果), 6병(六餠), 2포(二脯), 4해(四醢), 4조율료(四俎率膋), 돼지 머리털을 몇 가닥 뽑고 염통의 피를 조금 뽑아 넣은 모혈(毛血)을 쓴다. 제수(祭需)는 매우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차려졌으며 곡식이나 고기는 날 것을 그대로 올린다. 날 것과 맨국을 쓰는 것은 불을 이용하지 않은 선사시대에 생식을 하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서는 취위(就位)·영신(迎神)·신관((晨課:강신)·진찬(進饌)·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음복(飮福)·철변두(撤籩豆)·망료(望燎) 순으로 진행된다. 대한국(大韓國) 황제(皇帝)의 제복(祭服)은 면류관(冕旒冠)과 12장복(十二章服)으로 이루어진 12장면복(十二章冕服)을 착용하였는데, 면류관은 9류(九旒)를 늘어뜨리고 오채옥(五彩玉)을 꿰었다. 면류관의 모(帽) 위에 장방형 판은 짙은 흑색, 안은 홍색이며, 앞뒤에 황·적·청·백·흑·홍·녹색의 주옥(珠玉)으로 구슬줄을 황태자(皇太子)는 9류ㆍ황제는 12류(十二旒)씩 매달고 관 위에는 옥잠(玉簪)을 꽂았다. 9장복은 겉은 흑색, 안은 청색으로 한 대례복(大禮服)으로 상의(上衣) 양 어깨에는 용(龍)을 수놓고, 등에는 오악(五嶽), 양쪽 소매에 화(火:불꽃무늬), 화충(華蟲:꿩), 종이(宗彛:술 그릇)가 각 3개씩 들어가며, 하의(下衣)에 초(藻:수초), 분미(粉米:쌀), 보(黼:도끼), 불(黻:亞자 무늬)가 새겨진다. 1897년 고조(高祖)가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고 제정한 12장복은 9장복에 일(日), 월(月), 성신(星辰)이 추가되었으며 대한국(大韓國) 황제관은 12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9류면(九旒冕)이 되었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0년 황제의 아들인 황자(皇子)인 의친왕(義親王), 영친왕에게 친왕(親王) 책봉(冊封)하였다.1901년 9월 14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국의 비빈(妃嬪)은 후궁의 벼슬인 후궁지관(後宮之官)이라고 하였다. 비(妃)는 제후국 국왕의 아내와 황제국 황태자,황태제,친왕의 아내,으뜸 후궁(後宮)이다.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명성황후 민씨와 후궁인 비빈(妃嬪) 귀인 장씨, 귀비 엄씨, 귀인 이씨, 소의 이씨, 귀인 정씨, 귀인 양씨 등 총 6명의 후궁(後宮)과의 사이에 많은 황자(皇子)들이 있었다. 덕혜옹주는 고조 광무제와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 대한국 황궁 경운궁에서 태어났다. 1925년 3월 24일 덕혜옹주(德惠翁主)에게 도쿄에서 유학하도록 명하였다.1926년 4월 8일 덕혜옹주(德惠翁主)는 순종 융희제의 환후(患候)가 극심하다는 것을 전달받고 영친왕과 함께 유럽여행을 중단하고 돌아와 문후(問候)를 아뢰었다.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대한국(大韓國)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의 대한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국 고조 광무제의 직계 후손은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의 후손인데 의친왕(義親王)과 10여명의 후궁 사이에 13황자 9옹주가 있다. 의친왕은 1893년 12월 6일 의친왕비(義親王妃)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으며 1900년 8월 의친왕(義親王)에 책봉(冊封)되었으며 1906년 대한국 육군 부장(陸軍 副將)이 되었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대한국 황태제(추봉) 의친왕(義親王)은 2대 황제 순종 융희제(1919.1-4)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을사늑약을 불법 늑결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의 방해로 황태제 책봉(冊封)이 되지 못하였고 1910년 8월 경술늑약 불법 늑결 이후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일제 총독부는 대한국 황실 궁내부를 폐지하고 황족에 왕,공의 작위를 주어 일본 왕실에 불법 편입하였다.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대한국령 간도의 안동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다. 황태제(추봉) 의친왕(義親王)은 1948년 8월 15일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붕어(崩御)하였다. 고조 광무제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을 조선국 국왕, 대한국 황제로 추존하고 대한제국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추봉) 의친왕을 대한국(大韓國) 3대 황제로 추존하여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 민족자결(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마사코와 혼인,일본군 중장 역임하고 유럽여행을 다니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마사코 신주를 거주(去主)해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대한국 황족(皇族) 책봉권자로서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책(追冊)하였으며 1907년 민영돈(閔泳敦)의 딸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으며 1910년 8월 일본제국주의의 무력을 동원한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무효이고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중국 상해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황자이며, 어머니는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 후 득세한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었던 귀비(황제국 후궁 중 으뜸 벼슬) 엄씨이고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으며 1901년 9월 14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국의 비빈(妃嬪)은 후궁지관(後宮之官)이라고 아뢰었다.1907년 추봉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되었고 택일하여 가례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이토 일본제국주의 통감이 영친왕을 대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고 영친왕은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마사코와 혼인하여 유럽여행을 다녔으며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된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과의 가례를 기다렸으나 일제의 방해로 영친왕비(英親王妃)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 이후 1912년 동제사(同濟社) 조직, 1914년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결성,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조직,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 등 대한국광복운동이 조직화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의 독립(獨立)을 청원하자 일제 총독부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독살(毒殺)했다.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대한국(大韓國)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로 전환되었으며 대한국 황족의 책봉권자인 고조(高祖) 광무제는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고 영친왕비(민갑완) 9등 적의는 1907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된 후 영친왕과의 가례를 위해 다른 대한국 황족의 적의와 함께 궁내부 직조과(宮內府 織造課)에서 제작되었다.1910년 8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불법 무효이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되어 대한국 황제는 영친왕비(英親王妃)를 책봉(冊封)한 사실이 없었고 대한국 황제의 치세(治世:순종 융희제의 대리청정 기간은 고조 광무제의 치세)는 1919년 4월에 끝났다.1921년 3월 31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명성황후(明成皇后)를 태묘(太廟)의 18실에 부묘(祔廟)하며 부묘대제(祔廟大祭)를 행하였다.









심청색 이화문(李花紋) 적의(翟衣)는 대한국 황족 책봉권자인 고조 광무제가 책봉(冊封)한 황후(皇后), 황태자비(순명황후,순정황후)와 의친왕비(김수덕)가 착용한 대한국 황실 대례복이며 대한국 황실 의례를 폐지하고 궁궐, 황단, 궐외각사, 한성을 철거한 일본제국주의 총독부가 조직적인 대한국광복운동에 위기의식을 느껴 일본 왕족 마사코에게 착용시킨 후 정치선전용 영상을 촬영한 적의는 1919년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대한국이 국상(國喪)중인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제작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대한국 황제가 책봉(冊封)한 대한국 황족이 아닌 일본 왕족 마사코를 일본으로 송환하고 영친왕비(英親王妃:추봉)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릉에 합장(合葬)해야 하며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 황실 연표에 1대 고조 광무제(1897-1919.1),2대 순종 융희제(1919.1- ), 황태제(皇太弟:추봉) 의친왕(이강) 대한국 3대 황제 추존, 영친왕비(英親王妃:추봉) 민갑완(閔甲完)으로 바로 기술하여야 하며 심청색(深靑色) 이화문(李花紋) 12등(十二等) 황후(皇后) 적의(翟衣)를 착용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초상을 전시하고 영친왕비(추봉) 사진을 민갑완으로 교체하고 심청색 자두꽃(오얏꽃) 문양, 이화문(李花紋) 9등 적의(翟衣)를 대한국 황태자비(순명황후,순정황후)와 의친왕비(김수덕)가 착용한 대례복으로 바로 전시 설명하여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3월 4일 경기도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1,4,7,10월 상순의 4시(四時),정조절(正朝節:원일(元日)),상원(上元),중화절(中和節),중삼절(重三節:삼짇날),한식절(寒食節),단오절(端午節),유두절(流頭節),칠석절(七夕節),중원(中元:백중),중추절(中秋節:추석),중구절(重九節),하원(下元),동지절(冬至節),납향절(臘享節)의 영절(令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대한국(大韓國)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御道)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황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석인, 무석인,기린,코끼리,사자,해치,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수복방(守僕房), 재실(齋室), 비각, 망료위(望燎位)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진입부에 원형의 연못인 영천(靈泉)에 원형의 섬이 있다.







대한국(大韓國) 2대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 그리고 순정황후 윤씨(純貞皇后 尹氏)의 능이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국(大韓國)이 건국되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황제로 등극함으로써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다. 一 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황살문까지 문석인·무석인,기린·코끼리·해치·사자·낙타·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능침(陵寢) 주변에는 화문(花紋)을 새긴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이 둘러져 있고 중앙에 혼유석(魂遊石)과 사각 장명등(長明燈)이, 양 옆에는 망주석(望柱石)이 새워져 있으며 황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 남아 있다. 서울시,경기도,강원도에 소재한 조선시대(1393년-1897년) 505년 동안 존속된 조선국 25대 국왕과 왕후 및 사후 추존된 국왕과 왕후의 릉 및 대한제국시대(1897년-1919년) 황제릉을 조선국 왕릉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였는데 문화재청은 조선국 10대 국왕 연조(燕祖),15대 국왕 광조(光祖),26대 국왕 흥선헌의대원왕의 묘호(廟號) 추상 및 왕릉 능제 격상, 성비(誠妃),제헌왕후,공성왕후 왕후릉 능제 격상, 의친왕릉,완친왕릉,영친왕릉의 제후릉 능제 격상, 영친왕릉에 추봉 대한국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합장(合葬) 및 대한국 황제가 책봉한 대한국 황족이 아닌 마사코,진,구를 이장, 영휘원을 귀비(황제국 후궁 중 으뜸 벼슬) 엄씨 묘(墓)로 개칭하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을 3대 황제 추존, 의친왕릉의 능제를 황제릉으로 격상하고 능호를 부여하여야 하며 조선국 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을 구분하여 재지정하고 교육홍보하여야 한다.
2013-04-28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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