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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구미(龍頭龜尾) 거북선 창제한 이순신(李舜臣)
 김민수_
 2013-04-28 11:15:07  |   조회: 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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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구미(龍頭龜尾) 거북선 창제한 이순신(李舜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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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 2월 5일 태종이 통제원(通濟院) 남교(南郊)에서 유숙(留宿)하는 차(次)하였다. 이 날 아침에 임금의 자리를 이을 이로 정한 아들인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는 조정(朝廷)으로 돌아가도록 하니 세자가 따라가기를 굳이 청하였다. 태종이 여러 대신에게 말하였다. “세자(世子)가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의 일을 돌보고 군대를 감독하던 감국(監國)하는 것은 예(禮)에 맞는다. 당초는 세자로 하여금 하룻밤만 지내고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세자가 임금이 타는 수레를 호위하며 뒤따르는 호가(扈駕)할 수 없다고 하여 마음에 만족하지 않는 앙앙(怏怏)대고 밥을 먹지 아니한다. 세자는 나의 자식만이 아니라 나라의 임금의 자리를 이을 임금의 아들인 저부(儲副)인데 그 거동(擧動)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천우(李天祐)·이숙번(李叔蕃) 등이 윗사람에게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진언(進言)하기를, “이번에는 목욕(沐浴)을 하고 머리를 감는 탕목(湯沐)의 차리고 나서서 길을 가는 대열인 행차(行次)이니 마땅히 임금이 타는 수레인 거가(車駕)를 따르게 하소서.”하여 태종이 “잠시 동안이다.”하고 그대로 좇으니 세자(世子)가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이나 빛깔인 안색(顔色)이 기쁜 빛을 띄었다. 태종이 임진강변의 나루인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 모양으로 생긴 전함(戰艦)인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1415년 7월 16일 어명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는 승정원(承政院)에 소속된 정3품의 관직인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모든 군사(軍事) 시설(施設)이나 장비(裝備)인 병비(兵備)에 대한 관련된 사무인 사의(事宜)를 올렸다. “첫째는, 각 고을에서 적을 막으려고 성 밖에 임시로 만든 소규모의 요새(要塞)인 성자(城子)를 정하지 않은 곳과 쌓지 않은 곳을 빠짐없이 의논하여 정해서 때때로 단단히 쌓고, 각각 그 성 위의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의 수와 합하여 들어간 품삯을 받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인 인정(人丁)의 수와 들어간 양식 수와 사방 가까운 성(城)의 거리인 이수(里數)와 도로의 험하고 평이한 험이(險夷), 나라에 병란이나 사변이 있을 때 신호로 올리던 불인 봉화(烽火)의 서로 바라보이는 곳을 모조리 책(策)에 써서 나라를 지키는 방도를 갖출 것. 둘째는, 사방 변경(邊境)의 산하(山河)가 지세가 가파르거나 험하여 막히거나 끊어져 있는 험조(險阻)하여서 적은 사람으로 많은 사람을 당할 수 있는 곳, 큰 배가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르는 정박(碇泊)하여 언덕에 의지할 수 있는 곳, 병기를 갈무리하고 많은 사람을 가리울 수 있는 곳을 고루 알아서 군사를 쓸 수효를 헤아리고, 적을 제어할 방도를 갖추어 써서 갈무리하여 어떤 일을 꾸미거나 꾀하는 획책(劃策)의 도구를 삼을 것. 셋째는, 나라 안팎인 중외(中外)의 각 고을의 군적(軍籍)에 있는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정남(丁男)인 군정(軍丁)·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갖춘 배인 병선(兵船)·전투에 쓰는 도구나 기구인 군기(軍器)·적의 창검이나 화살을 막기 위하여 입는 갑옷인 의갑(衣甲)·각색 군대를 지휘할 때 쓰는 깃발인 기휘(旗麾)·징과 바라인 쟁요(錚鐃)·북과 나팔인 고각(鼓角)의 수와 각기 가지고 있는 말의 몇 마리 마필(馬匹), 대중소의 총수(摠數)를 병조(兵曹)로 하여금 호조(戶曹)의 재정(財政)인 전곡(錢穀)예에 의해 회계(會計)하여 시행케 해서 하나는 내전(內殿)에 들이고 하나는 승정원(承政院)에 비치하는 것으로써 항상 따라야 할 정해진 법식(法式)인 항식(恒式)을 삼을 것. 넷째는, 병기(兵器),기치(旗幟),병거(兵車)인 융장(戎仗)을 제조하는 군기감(軍器監)의 화통(火㷁)이 비록 이미 1만여 자루에 이르나 각도의 성자(城子) 1백여 곳과 각포(各浦)의 병선(兵船) 1백 60여 척과 산하(山河)의 험조(險阻)한 데 설비할 곳 등 그 쓰이는 것이 대단히 많아서 1만여 자루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남아 있는 주철(鑄鐵) 2만여 근으로 오는 8월에 녹여 만들기 시작하여 그 용도를 족하게 하고, 기술이나 지식 따위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 익히는 전습(傳習)하는 사람은 나라의 정규군 이외에 따로 조직한 지방군인 별군(別軍) 가운데 개월(箇月)은 이미 차고 아직 임기(任期)가 차서 그 벼슬자리를 떠나는 거관(去官)하지 않은 자를 쓸 것.













다섯째는, 병선(兵船)은 우리나라 연안을 약탈하던 일본 사람인 왜구(倭寇)가 오래 잠잠함으로 인하여 태만하고 해이해져 적을 제어하는 도구를 수리하지 않는데, 매등(每等)의 지방에 파견하여 임시로 일을 보게 하던 벼슬인 경차관(敬差官)이 다만 그 군인의 의갑(衣甲)·군기(軍器)·화통(火㷁)·기휘(旗麾)와 선체의 실하고 실하지 않은 것만을 상고할 뿐이니, 그 나머지 기계(器械)를 어찌 다 상고하겠습니까? 또 화통(火㷁)·화약(火藥) 같은 것은 점화(點火)만 되면 해가 오래 되어도 쓸 수 있고, 배 위에서 또한 점화할 수 있으니 곰팡이가 끼지 않게 하여야 하는데, 근래 각도에서 바다 기운으로 곰팡이가 끼고, 해가 오래 되도록 쓰지 않다가 고쳐 받는 자가 매우 많으니, 그 나머지는 허실(虛實)을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선(大船)·중선(中船)의 쓰는 기계의 수량과 종목을 각도 수군을 통솔하던 정3품 무관의 벼슬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로 하여금 일일이 써서 갖추 병조에 보고하게 하고, 병조에서는 그 수량과 종목을 사람에게 위임하여 명부(名簿)에 하나 하나 점을 찍어 가면서 수효를 조사하는 점고(點考)하게 하고, 아울러 화통의 점화하는 형태를 상고하여 상벌을 가하고, 실하지 않은 것은 다시 갖추어 실하게 하여 생각하지 못했던 재앙인 불우(不虞)에 대비할 것. 여섯째는,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작은 길을 내어서 사람들이 위로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서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다. 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고 입에는 포(砲)를 쏠 수 있는 포안(砲眼)을 만들고 배 뒤에는 거북꼬리를 만들었다. 선수(船首)는 용두(龍頭)이고 선미(船尾)는 구미(龜尾)인 거북선(龜船)은 많은 적선(賊船)과 충돌하여도 적선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승리를 결정하는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탁신(卓愼)이 이 때에 병조를 맡았는데, 태종이 보고 병조에 내리었다.













1592년 6월 21일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군(倭軍)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왜군(倭軍)과 맞서 겨루는 대적(對敵)할 장수(將帥)가 없었다. 대가(大駕)가 이미 평안도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왔는데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 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 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군(倭軍)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군(倭軍)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임금이 대궐 밖으로 거둥하는 행행(行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將帥)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 29일에 이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군 1백여 명이 한 줄로 길게 벌인 군진(軍陣)인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이순신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군(倭軍)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군(倭軍)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군의 적선(賊船)을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군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이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命中)하였다.













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군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고성(固城)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군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 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군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왜군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군을 연안에 인접되지 않은 넓은 바다인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 6일에 이순신이 이억기와 남해 노량(露粱)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거제도 영등포(永登浦)에서 거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군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몹시 좁은 협착(狹窄)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군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이 날개를 펴듯이 중앙으로부터 좌우로 길게 벌리는 진법인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날카롭고 굳세며 적극적인 기세인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군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군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웅천현(熊川縣)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 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2-3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군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말을 달려 와서 아뢰는 치계(馳啓)하고 전투에서 벤 적군의 머리인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국가의 변란 등으로 인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조정인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사스러운 일을 치하(致賀)하는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595년 10월 27일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이 왜적의 흉모(凶謀)는 헤아릴 수 없으니 강사준(姜士俊)이 보고한 바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명년의 일이 이미 근심스럽습니다. 적을 막고 나라를 보전하는 방도는 마땅히 먼저 대계(大計)를 정해야 하고 대계가 정해지고 나면 또 포치(希置)하고 조처하는 일이 있어야 하며, 포치하고 조처하는 일이 있고 나면 또 매우 짧은 동안의 시간인 촌음(寸陰)을 아껴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은 보강해서 한 마디 말이 한 가지 일이 되고 한 가지 일이 한 가지 성과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날로 계산하면 부족하나 해로 계산하면 남음이 있습니다. 옛 사람이 적을 대적할 때는 반드시 적과 나의 형세를 먼저 헤아려서 싸울 만하면 싸우고 지킬 만하면 지켰습니다. 그러나 먼저 적이 이길 수 없는 방비를 하고 나서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으니, 이 것이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왜군과 겨루어서 싸우면 열 번 싸워 열 번 패전하는 형세가 있고 지키면 해볼 만한 희망이 있으니, 이는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날 김시민(金時敏)이 진주성(晉州城)을 지키자 왜군이 감히 격파하지 못하였고, 권율(權慄)이 행주(幸州)를 지키자 우리 군사가 대첩을 거둘 수 있었으며, 이정암(李廷馣)이 황해도 옹진 연안성(延安城)을 지키자 홀로 보전할 수 있었고, 임중량(林仲樑)이 두어 자의 토루(土壘)를 수리하자 한 번 적을 이겼고, 황주(黃州)의 백성이 함경도 원산 선산(蒜山)에 모여 있자 적이 여러 차례 공격하여도 이롭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살펴보면 지키는 것이 야전(野戰)보다는 나은 점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리의 험고함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신들이 전부터 매양 험한 데에 의거하는 한 가지 일로 전후 계달(啓達)하여 사방에 알린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인심이 흩어져서 이미 성루(城壘)를 보호할 의사가 없고, 나라 안팎인 중외(中外) 사람이 적세가 큰 것만 보고 또한 험고함을 베풀어 보수(保守)할 계책을 세움에 뜻이 없는 것입니다. 또 지난 해 이전에는 부상당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이 겨우 삶을 이어 갔습니다. 이 때문에 사역(使役)하고 단속(團束)하는 일에 몰아넣을 수 없었으므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면서 이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지금 사방을 돌아보면 믿을 만하고 지킬 만한 지방이 한 곳도 없습니다. 적이 침략해 올지는 기필(期必)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는 씻은 듯이 공허하여 믿을 곳이 없으니 한심스러움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지금 왜군이 머뭇거리고 떠나지 아니하면서 이미 세모(歲暮)에 박두하였으되 요구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미루고 핑계하면서 시일만 보내고 있으니 강사준이 말한 바를 어찌 다 떠도는 소문으로 여겨 믿기 어려운 것으로만 돌려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사려가 부족하니, 이 큰 일을 당해서 어찌 상달할 만한 변고에 대응하는 좋은 계책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미 지나간 사적에 의거하여 말씀드리면 수전(水戰)은 자못 우리나라의 장점이요, 거북선은 더욱 승첩에 요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이 꺼리는 바가 이 거북선에 있고 강사준의 보고도 그러하였습니다. 왜군이 처음 부산포에 당도할 적에 만일 좌우도(左石道)의 병선(兵船) 수백여 척으로 하여금 제 때에 동래부 부산포 절영도(絶影島) 이남에서 막게 하였더라면 승리를 얻을 수 있었을 듯한데, 이를 실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세가 뒤를 돌아보는 염려가 전혀 없어서 마음대로 창궐하였던 것입니다. 옛 말에 ‘전의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 일의 밝은 경계이다.’ 하였으니, 지금 이 겨울철을 당하여 급급히 배와 기계를 수리하고 수군의 형세를 많이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북선이 부족하면 밤낮으로 더 만들어 대포·불랑기(佛狼機)·불을 붙여 쏘는 화살인 화전(火箭) 등을 많이 싣고 바닷길을 막아 끊는 계책을 하는 것이 곧 위급함을 구제하는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평상시 경상도에 선재(船材)가 생산되는 곳은 거제(巨濟)·옥포(玉浦)·거제 지세포(知世浦) 등처가 있을 뿐인데, 적병이 몇 년을 넘도록 섬 안에 들어가 있으니 선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도체찰사와 통제사에게 비밀히 통지하여 군기(軍機)를 노출하지 말고 유의하여 조처해서 완급(緩急)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육지의 방어에 이르러서는 전에 진달한 바 험고한 데에 의거하는 한 가지 일 이외에 달리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왜군은 진을 치는 데에 능하여 반드시 길가 요충지에서 좌우로 통제하는 공제(控制)하고 장애가 없이 환히 바라보이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또 높은 산 깊은 구렁이나 암석이 험난한 곳을 구하지 않고 다만 산에 초목이 없고 그 형세가 볼록하게 나오고 사면이 민둥민둥하여 막힌 데가 없는 곳을 찾아서 진을 쳤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항복한 왜인도 ‘파주산성(坡州山城)은 돌을 피할 곳이 없으므로 바라보고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실정은 토로한 말이고 헛되어 늘어놓은 말이 아닙니다. 이로써 논하면 곳곳마다 모두 험고함을 설치할 만하고 곳곳마다 모두 보수(保守)할 만하니, 마땅히 적절하게 지시하고 간편하게 조치하여 가까운 백성에게 약속해서 그들로 하여금 들어가 보수(保守)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계와 화포를 많이 구비하여 때때로 백성을 모아 성 지키는 규식을 조련하여 백성으로서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이 곳에 들어가면 참으로 삶을 찾고 죽음을 면할 수 있음을 환히 다 알게 하면 백성의 뜻이 저절로 안정되어 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매우 급작스러운 창졸(倉卒)에 떨어져 흩어지는 이산(離散)하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공사(公私)의 곡식을 거두어 모아 그 안에 다 저장해 두면 이른바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주민들을 성 안으로 들이고 들을 비워서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 물자와 식량 보급을 차단하는 병법인 청야(淸野)의 계책도 또한 함께 시행하는 것이 됩니다. 수원(水原) 독성(禿城)은 성첩(城堞)이 대충 성취되었고 또 포루(砲樓)를 설치하였으므로 와서 보는 백성들은 자못 성을 지킬 의사가 있다 합니다. 여기에서 또한 민심이 믿을 바를 보게 되면 조금은 안정된다는 하나의 징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4년 동안에 이러한 계책을 강구한 것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은 기강이 해이하여 서로 유지하지 못한 데에 있었으니, 이른바 ‘종신토록 의논만 하고 끝내 하루 동안이나마 몸소 실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이에 가깝습니다.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인 하삼도(下三道)는 의정(議政)이 맡은 전시(戰時)의 최고 군직(軍職)인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반드시 조처함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또 염려되는 바는, 제주가 해중(海中)의 절도(絶島)에 있으므로 적이 이곳을 엿보면서 연(燕)·제(齊)·계요(薊遼) 등을 침범하고자 하여 잠시도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쳐 돌아온 사로잡혔던 사람 및 항복한 왜인이 말한 바도 가끔 이러하였으니 방비에 관한 일이 더욱 긴요합니다. 듣건대, 지난해와 금년은 농사가 흉년이 들고 돌림으로 앓는 전염성 열병인 여역(癘疫)이 흥행하여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다 하니 또한 염려스럽습니다. 이 한 주(州) 및 진도(珍島)도 반드시 각별히 경리(經理)한 뒤에야 가합니다. 이 뜻을 아울러 도체찰사 및 본도 순찰사 등에게 통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들이 앉아서 하는 말, 멀리서 헤아린 의견이 이 정도에 불과하며 인용하여 신장하고 유추하여 좋게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도체찰사의 종사관(從事官) 김시헌(金時獻)이 내려가려 하니, 이 사연으로 비밀히 말해 보내어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선조가 따랐다.













1597년 2월 7일 비망기(備忘記)로 김홍미(金弘微)에게 전교하였다. “이러한 때에 힘껏 싸우는 장수는 비록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깊이 책할 것 없이 부리는 것이 가하다. 수군(水軍)인 주사(舟師)는 지금 한창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그 형세가 대단히 긴박하다. 그러나 부득이 통제사는 고쳐 차임해야 하겠고 경상 우수사도 갈아야겠다. 권준(權俊)은 또 배흥립(裵興立)을 논박하여 분분하게 안정되지 않으니 반드시 일을 그르치겠다. 수사로 합당한 인물을 속히 의논하여 아뢰라. 지나간 일은 그만이니 지금 국사에 전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조치한다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좌도의 경우는 주사(舟師)가 매우 미약하니 상도(上道)의 여러 연해안 고을로 하여금 전선을 제작하고 사공(沙工)의 일을 돕던 수부(水夫)인 격군(格軍)을 충당하는 일과, 황해도 역시 솜씨좋은 목수로 하여금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을 많이 제작하는 등의 일을 신속히 조치할 것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1622년 7월 22일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文武合議機構)인 비변사(備邊司)가 하교로 인하여 아뢰기를, “옛날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순신(李舜臣)은 기이한 꾀를 내어 왜군을 막으면서 바다를 방위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이순신이 왜군을 방어하던 법식에 따라 거북선을 만들고 기계를 갖출 일을 전라 좌수사와 우수사에게 명백하게 지시하여 보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하니,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가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빨리 이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士卒)들을 훈련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하기를 한결같이 이순신이 한 것과 같이 하도록 각별히 말해 보내라.”하였다.1639년 7월 14일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畿 水使)로 하여금 거북선을 제조하여 시험해 보도록 하려고 하는데, 이 것은 이순신이 창제한 것입니다.”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하였다.
2013-04-28 1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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