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원년은 이승만(李承晚) 대통령(大統領) 선출한 1919년
 김민수_
 2013-04-13 16:17:01  |   조회: 3123
첨부파일 : -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원년은 이승만(李承晚) 대통령(大統領) 선출한 1919년




http://blog.naver.com/msk7613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岳: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의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1897- )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4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 1904년 2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늑결(勒結)하여 1900년 10월 25일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국령 독도를 1905년 1월 불법(不法) 강점(强占)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영국과 영일동맹,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대한국 독점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하였으며 일제 통감부는 1909년 대륙 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늑약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대한국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19년 1월 21일 아침 조직화,체계화되어가는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 총독부의 독살에 의해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崩御)하였는데 2·8 대한광복선언, 경운궁 대안문·고조 광무제 어극40년칭경기념비전·보신루(普信樓)·원각사(圓覺寺) 터 앞 3·1 대한광복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일본제국주의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양위당한 고조 광무제는 정미대한독립운동,대한인국민회,대한독립의군부,대한광복군정부 등 대한광복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었으며 대동단, 신한혁명단이 고조 광무제를 망명시켜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을 활성화하려 하였고 고조 광무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적극 지원하였다. 최팔용(崔八鏞)이 청년독립단 발족을 기독교청년회관의 재일 대한국 유학생 600여 명 앞에서 선언하고 이광수(李光洙)가 2·8대한광복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백관수(白寬洙)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金奎植)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趙素昻)이 동경에 파견되어 재일 대한국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대한(大韓) 병탄(倂呑)이 대한국인의 의사와 반하는 것이므로 대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대한국인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며 대한국인의 대한광복운동을 촉구하였다. 1919년 1월 일제 총독부에 의한 대한국(大韓國)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에 의해 촉발된 2·8 대한광복선언은 3·1 대한광복운동,6·10 대한광복운동,11·3 대한광복운동,한성정부,대한국민의회,상해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의 기폭제가 되었다.

3·1 대한광복운동은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기초하였으며 최남선의 초안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대한국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泰和館)에서 대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원각사(圓覺寺) 터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 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太極旗)와 독립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한성(漢城)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 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대한광복운동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보신루(普信樓)를 지나 숭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경운궁의 혼전에 나아가 네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대한광복운동 행진은 한성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대한 독립 만세(大韓 獨立 萬歲)", "대한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돈의문을 돌아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 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太極旗)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 독립(大韓 獨立)'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 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 해산하였다. 다음날 일제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국인 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원 회의에서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체(政體)는 민주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으로 각각 의결함으로써 1919년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원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1조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함’이라 천명함으로써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으며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를 선출했다.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법률안 의결, 임시 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國務員)을 구성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 행정수반인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이승만(李承晚)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군무 이동휘,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교통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한성(漢城)에는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9월 상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고 이승만(李承晚)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통치권자 국가 원수(國家 元首)인 대통령(大統領)으로 선출하였다.

국내외 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대한광복운동 계획, 애국 성금 갹출(醵出)하는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 수집, 정부 문서 국내 전달, 인물 발굴 및 무기 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사실과 대한국 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 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대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대한국 국민의 상황을 세계 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의 쑨원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李奉昌)의 도쿄의거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대한국의 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고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간도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大韓光復運動期)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이흥수(李興秀)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圭植),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의 대한국 독립군(大韓國 獨立軍)과 1939년 3월 1일에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당군(黨軍),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요인과 중국의 각계 인사, 외교사절 등이 모인 가운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창설되었다.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는 독자적이고 자주권을 가진 광복군을 창설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한국광복군의 성격과 위상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구국의 의지가 강력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주권과 통수권을 행사하는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위상을 갖는 군대로 마침내 탄생하게 되었다. 한국광복군은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대한국 독립군(大韓國 獨立軍)의 대한국 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하고 대한국 독립군(大韓國 獨立軍)의 전투역량을 흡수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어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大韓光復運動期)에 우리 국군의 군맥이 면면히 이어질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연합국과의 공동 군사작전에 참여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는 등 전과를 올렸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2년부터 미군과의 OSS합동훈련을 기획했고 미군과의 한미 공동으로 국내진입작전을 진행하였으며 이 작전이 실행단계에 접어들 무렵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 의한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갑작스런 무조건적 항복으로 한미공동 국내진입작전은 좌절되었지만 한국광복군은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대한국의 광복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고 노력하였다.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이 미군특수부대(OSS)와 국내침투훈련 중에 8ㆍ15 대한국 광복이 되자 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귀국해 국민의 뜻에 따라 정부를 재수립하기로 결의했다. 미군정(美軍政)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 임정 요인들의 귀국이 지연되었고 결국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 1945년 11월 23일 1차 귀국했으며 12월 1일 임정 요인들이 2차 귀국해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가 12월 3일 경교장(京橋莊)에서 개최됐다. 이후 경교장에서 수시로 국무회의가 개최됐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가 결정되자 12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이 경교장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반탁운동을 주도하며 12월 31일 임시정부 내무부 포고령을 선포하고 미군정에 행정권의 이양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8년 4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단일 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으로 가서 북한 측 정치 지도자들과 협상하였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총선거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하여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1948년 5월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된 후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였다.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되고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2013-04-13 16:17:0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첨부 날짜 조회
공지 [공지] 뉴스타운 자유게시판 이용 안내 (1)HOT 뉴스타운 - 2012-06-06 195225
222 [김황식] 이양반 왜 이러나HOT 서울시민 - 2014-03-29 3482
221 [김관진 국방] 잘못하면 큰일난다HOT 전쟁방지 - 2014-03-29 3510
220 <빅뉴스> 찜질방 충격뉴스HOT 숙박업 - 2014-03-27 3735
219 현 박원순 시장과 천안함 폭침HOT 김 루디아 - 2014-03-27 3385
218 헛소리가 아니었다. - 단거리 발사체, 88발 쏜 진짜 이유HOT 김 루디아 - 2014-03-27 3389
217 대통령의 결단HOT 김 루디아 - 2014-03-25 3448
216 콩가루 집안 세정치민주, 점입가경.......HOT 김 루디아 - 2014-03-25 3416
215 박원순 시장의 핑크 드림 환상곡 (1)HOT 김 루디아 - 2014-03-23 3331
214 폴임박사의 세계사의 Eyewitness,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역사는 질문한다.HOT 사각형 - 2014-03-23 3591
213 정몽준의원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HOT 김 루디아 - 2014-03-20 3465
212 박원순 시장, 하늘이 두렵지않는가?......HOT 긴 루디아 - 2014-03-19 3573
211 갈팡질팡 새정치 신당의 야바위는 아직 끝나지않았다HOT 김 루디아 - 2014-03-19 3608
210 good news! 중공의 북괴로의 원유 공급 일체 중단! (1)HOT 5.18광주폭동 - 2014-03-14 3852
209 <북조선> 미국이 특별히 보호하는 이유 ?HOT 뉴정보 - 2014-03-13 3636
208 박근혜 퇴임후 대통령 다시 출마하라HOT 새물결 - 2014-03-12 3712
207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의 뜻을 아는HOT 미리네 - 2014-03-12 4055
206 [안철수] 방금전 폭탄발언 ~~~HOT 펌글 - 2014-03-03 3734
205 ★ 위기를 위기인줄 모르는 그것이 바로 위기이다★HOT 김루디아 - 2014-03-02 4217
204 무심코 흘려버리기에는HOT 은하수 - 2014-03-01 3982
203 [한국야구] 야구팬 충격발언HOT 야구팬 - 2014-02-28 3915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