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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묘(太廟) 정전(正殿),영녕전(永寧殿)의 신실(神室)을 증축해야
 김민수_
 2013-04-11 16:59:21  |   조회: 2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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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묘(太廟) 정전(正殿),영녕전(永寧殿)의 신실(神室)을 증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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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인 태묘(太廟)에서 태묘제례(太廟祭禮)가 태묘제례악(太廟祭禮樂)에 맞추어 봉행된다. 태묘(太廟) 정전(正殿)에는 대한국 태조 고황제부터 순종 융희제에 이르기까지 19실(室)의 신위를, 별전(別殿)인 영녕전(永寧殿)에는 16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정전(正殿)은 서편을 위로하여 1실이 있고 19실이 동편 끝에 있으며, 영녕전 중앙에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태조 고황제 위의 4대조 신위가 있다.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인 태묘(太廟)의 신실(神室)에 어보를 봉안했으며 신주장 서쪽 우백호(右白虎)의 선왕의 신주는 백저건(白苧巾)으로 덮고 신주장 동쪽 좌청룡(左靑龍)의 선후의 신주는 청저건(靑苧巾)으로 덮었고 어보는 국조보감과 함께 보장(동장)에 국왕,왕후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어책(御冊)을 책장(서장)에 봉안하였다. 대한국 태조 고황제는 1394년 8월 태묘(太廟) 터를 보았고 9월 감산(坎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한 그 곳에 태묘 터를 결정하였고 12월부터 영건(營建)을 시작해 1395년 9월에 1차 영건(7칸)이 끝났으며 1546년(명종 1) 정전을 11칸으로 늘렸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4년(선조 37)부터 중건이 논의되어 선조 41년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등 공사를 개시한 후 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가 즉위하던 해인 1608년 5월 중건되었으며 1726년(영조 2) 신실 4칸을 증축하여 15칸으로 되었다가 1836년(헌종 2) 신실(神室) 4칸을 증축하여 19칸 규모가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총독부가 대한국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대한국 고조 광무제,순종 융희제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황제 추존 시 묘호,제호 올리는 예로 잘못 올렸으므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개상(改上)해야 하며 태묘(太廟) 정전(正殿),영녕전(永寧殿)의 신실(神室)을 증축하고 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15대 국왕 광조(묘호 추상),고조 광무제의 친부 흥선헌의대원왕을 조선국 국왕 묘호 추상,대한국 황제 추존,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국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추봉) 의친왕을 3대 황제 추존하여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에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 민족자결(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본 왕족 마사코와 혼인하고 일본 육군 중장 역임,유럽여행하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 신주(神主)를 거주(去主)해야 한다.





태묘(太廟)의 단단한 밤나무 율목(栗木)으로 만든 신주(神主)인 율주(栗主)에 혼(魂)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신주(神主)를 모시어 두는 궤인 주독(主櫝)에 혼(魂) 구멍을 뚫어 혼(魂)이 깃드는 곳으로 삼았다.승하(昇遐)한 조선 국왕,붕어(崩御)한 대한국 황제는 묘호(廟號), 시호(諡號), 존호(尊號)를, 왕후는 시호(諡號), 존호(尊號), 휘호(徽號)를 제주(題主)하였는데 밤나무 신주 율주(栗主)를 받들어 향탕(香湯)으로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아서 탁자 위에 눕혀 놓으면 제주관(題主官)이 동계(東階)로 올라가서 탁자 앞으로 나아가 서향하고 서서 검은 글씨 흑서(黑書)로 제주(題主) 쓰기를 마치면 광칠(光漆)로 거듭 칠하였다. 조선국은 명(明)나라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조선국 국왕이 승하(昇遐)하면 명국에 청시(請諡)하여 사시(賜諡)를 받고 나서 제주(題主)하였다. 태조부터 인조의 아버지 원종까지 신주는 먼저 명나라의 사시(賜諡)를 쓰고 다음에 조선국의 묘호, 시호, 존호를 썼고 인조 대부터는 청나라에서 시호를 받았으나 이를 신주에 쓰지 않고 조선국의 묘호, 시호, 존호만 썼다. 묘호(廟號)는 태묘(太廟)의 신주(神主)의 이름 즉, 조(祖)와 종(宗)을 말하며 조(祖)와 종(宗)은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을 기본 원칙으로 하며 조선 1대 태조- 25대 철종,추존 왕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2대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까지 적용되었다. 조(祖)는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장조,정조,순조,문조,고조 광무제 등 건국 또는 새로 대통(大統)을 시작한 왕,황제에게, 종(宗)은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덕이 많은 왕,황제에게 붙여졌다. 일본제국주의 총독부가 대한국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대한국 고조 광무제, 순종 융희제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황제 추존 시 묘호, 제호 올리는 예로 잘못 올렸으므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개상(改上)해야 한다.





시호(諡號)는 승하한 국왕과 왕후가 생전에 행한 업적을 평가받은 이름이므로 대행(大行)이 있는 분은 대명(大名)을 받고, 세행(細行)이 있는 분은 소명(小名)을 받으며 대왕이 8자, 왕후가 2자인 것이 정례(定例)였다. 시호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도감(諡號都監)이 설치하고 승하한 국왕,왕후의 행적에 적합한 시호를 가려 예조(禮曹)에 고하면 예조에서는 의정부(議政府)에 알리고, 의정부에서 적합한 시호를 가려 국왕의 재가(裁可)를 받고 재가를 받으면 공조(工曹)에서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를 제작하며 예조에서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를 행한다. 존호(尊號)는 국왕과 왕후의 덕을 칭송하는 호(號)이며 존호도감(尊號都監)이 국왕이나 왕후가 경하(慶賀)할 일이 있을 때 상존호(上尊號),가상존호(加上尊號)하는데 승하한 후 부묘(祔廟)할 때에 추상존호(追上尊號)하는 일도 있었으며 추존(追尊)도 하며 복위상존호(復位上尊號)하기도 하고 국왕의 존호는 4자, 또는 8자이며, 왕후의 존호는 2자이다. 휘호(徽號)는 조선국 왕후가 승하한 후, 대한국 황후가 붕어한 후에 상시호(上諡號)와 함께 올리는 존호이며 4자(四字)가 정례(正例)이었다.1921년 3월 9일 책보(冊寶)를 받들고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제휘열목(齊徽烈穆)이라는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1928년 5월 3일 순명황후(純明皇后)의 휘호(徽號)를 경현(敬顯)으로 하기로 의논해서 정하였다.





태묘제례(太廟祭禮)는 춘하추동 4시(四時)와 12월 납향절(臘享節)에 오대향(五大享)을 봉행하였으며 영녕전(永寧殿)은 태묘(太廟) 정전과 더불어 봄,가을에 향사(享祀)하였다.제향(祭享)은 대한국(大韓國) 황제가 직접 봉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으며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品階) 또는 축문(祝文)이 다르다. 절차는 홀기(笏記)를 낭독하는 창홀(唱笏)에 따라 진행되고 제기(祭器)는 63기가 있으며, 제물(祭物)은 소, 돼지, 산양의 3생(三牲), 2갱(二羹), 서직도량(黍稷稻梁), 2제(二齊), 3주(三酒), 6과(六果), 6병(六餠), 2포(二脯), 4해(四醢), 4조율료(四俎率膋), 돼지 머리털을 몇 가닥 뽑고 염통의 피를 조금 뽑아 넣은 모혈(毛血)을 쓴다. 제수(祭需)는 매우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차려졌으며 곡식이나 고기는 날 것을 그대로 올린다. 날 것과 맨국을 쓰는 것은 불을 이용하지 않은 선사시대에 생식을 하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서는 취위(就位)·영신(迎神)·신관((晨課:강신)·진찬(進饌)·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음복(飮福)·철변두(撤籩豆)·망료(望燎) 순으로 진행된다. 대한국(大韓國) 황제(皇帝)의 제복(祭服)은 면류관(冕旒冠)과 12장복(十二章服)으로 이루어진 12장면복(十二章冕服)을 착용하였는데, 면류관은 9류(九旒)를 늘어뜨리고 오채옥(五彩玉)을 꿰었다. 면류관의 모(帽) 위에 장방형 판은 짙은 흑색, 안은 홍색이며, 앞뒤에 황·적·청·백·흑·홍·녹색의 주옥(珠玉)으로 구슬줄을 황태자(皇太子)는 9류ㆍ황제는 12류(十二旒)씩 매달고 관 위에는 옥잠(玉簪)을 꽂았다. 9장복은 겉은 흑색, 안은 청색으로 한 대례복(大禮服)으로 상의(上衣) 양 어깨에는 용(龍)을 수놓고, 등에는 오악(五嶽), 양쪽 소매에 화(火:불꽃무늬), 화충(華蟲:꿩), 종이(宗彛:술 그릇)가 각 3개씩 들어가며, 하의(下衣)에 초(藻:수초), 분미(粉米:쌀), 보(黼:도끼), 불(黻:亞자 무늬)가 새겨진다. 1897년 고조(高祖)가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고 제정한 12장복은 9장복에 일(日), 월(月), 성신(星辰)이 추가되었으며 대한국(大韓國) 황제관은 12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9류면(九旒冕)이 되었다.





1440년 1월 8일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예조에서 태묘(太廟)에 친향(親享)하는 의주(儀注) 가운데 참신(參神)·사신(辭神)에는 모두 사배(四拜)하고, 신관(晨祼)·전폐(奠幣) 및 헌작(獻爵)·음복(飮福)에는 모두 재배(再拜)하였는데 태종조(太宗祖)에는 사림광기(事林廣記)의 공·후(公侯)와 품관(品官)이 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주에 의하여 신관(晨祼)과 헌작에는 구부렸다 엎드렸다 일어나서 지게문을 나와서, 전각의 앞부분에 있는 기둥 전영(前楹) 밖에 나아가서 모두 재배를 올렸습니다. 그 후에 헌의(獻議)하는 자가 말하기를, ‘선조(先祖)를 제사지내는 의례(儀禮)는 제후 나라의 제도가 아니옵니다.’ 하였으므로, 당(唐)·송(宋)의 옛 제도에 의하여 매 실(室)마다 신관(晨祼)·헌작·음복에는 모두 재배하고, 그 사배하는 것과 재배하는 것을 서로 사이에 섞어서 행례하였습니다. 이제 중국에서 간행(刊行)한 황제시향태묘의(皇帝時享太廟儀)를 상고하니, 전폐(奠幣)·헌작(獻爵)·독축(讀祝) 뒤에는 황제가 재배하는 것이 없고, 다만 부복(俯伏)·흥(興)·평신(平身)만을 행하면, 백관도 같이 하옵니다. 복주(福酒)·조육(胙肉)을 내려 줄 때에, 황제가 꿇어앉아 복주를 마시고 조육을 받은 후에 부복·흥·평신하면 백관은 같이 하옵니다. 중국의 제도에 의하여 태묘의 매 신실(神室)에 신관(晨祼)과 헌작에 전하께서 꿇어앉으면 모든 관원이 모두 끓어앉고, 신관(晨祼)과 헌작·독축(讀祝) 뒤에 전하께서 부복·흥·평신하면 모든 관원도 모두 부복·흥·평신하며, 아헌(亞獻)·종헌(終獻)에도 역시 이 예에 의거하나 다만 백관이 같이 하는 것이 없으며, 음복위(飮福位)에 나아가 전하께서 꿇어앉으면 모든 관원이 모두 꿇어앉고, 음복(飮福)·수조(受胙)한 후에 전하께서 부복·흥·평신하면 모든 관원이 모두 부복·흥·평신하며, 내려와 자리로 돌아와 전하께서 4배(四拜)하면 모든 관원이 모두 4배할 것입니다. 그 외의 제사 의주도 역시 위의 항목에 의거하여 수정해 고치게 하옵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르고, 곧 판승문원사 정척(鄭陟)·판내섬시사 변효문(卞孝文)에게 명하여 태묘에 친사(親祀)하는 의주를 편찬하게 하였다. 11월 9일 의정부에서 예조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지난 정월 초8일의 수교(受敎)를 자세히 참작하오니, 제사(諸司)의 담당 직무 직장(職掌) 안에, ‘교사제(郊祀祭)·태묘제(太廟祭) ·사직제(社稷祭)에는 음복(飮福)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 제관(祭官)이 제사에 쓰고 난 고기를 나누어 받는 수조(受胙)한 뒤에 모두 4배(四拜)를 하고, 산천(山川)·역제왕(歷帝王)·선사(先師) 공자(孔子)·선농(先農)의 제사에는 음복하고 수조한 뒤에 모두 2배(二拜)를 한다. ’고 하였사온데, 태묘(太廟)·문소전(文昭殿)·사직(社稷) 밖의 기타 각 제사에는 음복하고 수조한 뒤에 그 전대로 재배(再拜)하기를 청하옵니다.”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472년 4월 2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 앞서 태묘(太廟)에 초헌(初獻)을 드릴 때에는 각 실(室)의 악장(樂章)이 같지 않았으나, 지금은 제향(祭享) 때 추던 악무(樂舞)인 정대업(定大業)을 사용하게 하여 각 실의 통용(通用)하는 악(樂)으로 삼았는데도, 예전대로 실(室)마다 악을 연주하고 그치는 것이 미편(未便)합니다. 독축(讀祝)할 때 외에는 아헌(亞獻)·종헌(終獻)의 예(例)에 의하여 악을 중지하지 말게 하소서. 이 앞서 당(唐)의 개원례(開元禮)에 의하여 찬(饌)이 문(門)에 들어오면 악(樂)이 연주되고, 태계(泰階)에 이르면 악이 그쳤는데, 악(樂)이 음악이 한 곡 끝나는 일성(一成)이 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그치니, 미편합니다.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하건대, 송조(宋朝)의 태묘(太廟)에 제향하는 의식은 찬(饌)이 정문(正門)에 들어오면 악이 연주되고, 전(奠)을 마치면 악이 그쳤습니다. 이제부터는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무릇 찬(饌)을 올리고 전(奠)을 마치면 악을 그치게 하소서. 세조조(世祖朝) 때 상정(詳定)한 길례의(吉禮儀)에는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殿)·문소전(文昭殿)·제릉(諸陵)에 모두 통행(通行)하는 축(祝)을 사용하고, 기신제(忌晨祭)에는 신실(神室)마다 축사(祝詞)가 각기 다르니 미편합니다. 태묘(太廟)와 각 제례(祭例)에 의하여 통행하는 축을 지어서 사용하게 하소서. 전(奠)의 의주(儀註)에 중사(中祀)의 선농(先農)에 친향(親享)할 때는 모혈(毛血)을 올리고 찬(饌)을 올리는 절차가 있고, 문선왕(文宣王)에게 친향할 때는 이 절차가 없으니, 일반(一般) 중사(中祀)의 향헌(享獻)하는 예(禮)가 각기 다르니 미편합니다. 삼가 중국 상대(上代)로부터 당대(唐代)까지의 제도를 수록한 통전(通典)과 개원례(開元禮)를 상고하건대, 황태자(皇太子)의 석전(釋奠)에 모두 모혈을 올리고 찬을 올리는 절차가 있으니, 이제부터 옛 제도와 선농단에 제사하는 향선농의(享先農儀)에 의하여 모혈을 올리고 찬을 올리소서. 전(奠)의 의주(儀註)에 중사(中祀)의 풍운뇌우(風雲雷雨)의 기우(祈雨)와 문선왕(文宣王)의 선고사유제(先告事由祭)에는 변(籩)·두(豆)·보(簠)·궤(簋)가 각각 하나씩이고, 소사(小祀)의 둑제(纛祭)의 선고사유(先告事由)에는 변·두·보·궤가 각각 둘이니, 중사와 소사의 제품(祭品)의 풍족하고 검약함의 풍쇄(豊殺)가 상반(相反)하니 미편합니다. 뚝섬 둑제(纛島)의 둑제(纛祭)도 또한 변·두·보·궤를 하나씩 진설하소서.”하니, 성종이 그대로 따랐다.





1526년 8월 5일 중종이 전교하였다. “우연히 궁중에 있는 관고(官庫)인 내장(內藏)에 있는 세종조(世宗朝) 일기(日記)를 열람했다. 거기에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선덕(宣德) 10년 정월 12일 창덕궁(昌德宮)에 행행하여 재소(齋所)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재계(齋戒)했고, 13일 3경(三更)에 태묘제(太廟祭)를 거행했다.’고 되어 있었다.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고증해서 아뢰라. 그 사실을 분명히 안 뒤에 의논할 것이 있다.” 8월 6일 중종이 전교하기를,“내장(內藏)에 있는 세종조 일기(日記)에 ‘정조사(正朝使) 전흥(田興)과 권담(權聃)이 선덕(宣德) 9년 10월 15일에 경사에 갔다가 10년 정월 28일에 돌아왔다.’ 했다. 이 사실은 정원일기와 같으니 어제 고증해서 아뢰게 한 일도 틀림없이 같을 것이다. 오늘은 음력 2월과 7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하는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제사지내는 석전제(釋奠祭)의 음복(飮福) 날이어서 삼공(三公)이 반드시 갈 것이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삼공과 의논해서 아뢰라. 전일 성균관(成均館) 뜰의 잣나무가 벼락맞았을 때 몸소 제사하려 했었다. 그러나 자전(慈殿)께서 편찮으셨기 때문에 거행하지 못했었고, 석전제(釋奠祭) 때도 사직제(社稷祭)의 제사 전에 3일간 출입을 금하고 재계(齋戒)하는 치재(致齋) 때문에 몸소 거행하지 못했다. 지금 많은 유생(儒生)들이 한성에 모였다. 그러나 과거(科擧)는 이미 별시(別試)가 있으니 실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달 25일 안에 문묘(文廟)의 별제(別祭)를 몸소 거행하고 이어 유생들에게 제술(製述)을 시험 보여 상격(賞格)을 높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오례의주(五禮儀注)에 ‘대사(大祀)나 중사(中祀)에는 하루 앞서 재소(齋所)에 묵으면서 재계(齋戒)한다.’ 했고, 세종조 일기에는 ‘세종(世宗)께서 이때 경복궁(慶福宮)에 나아가 계셨으므로 하루 전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재계하고 태묘제(太廟祭)를 거행했다.’ 했는데, 이 예문(禮文)을 합쳐 거행하고 싶다. 전일 대신들이 ‘태묘(太廟)에는 재소가 있지만 문묘(文廟)에는 없다.’ 했었다. 그러나 태묘의 재소는 역시 협소해서 묵으면서 재계하기에 합당치 않은데다 눈이나 비가 내리면 아랫사람들이 몸을 의지할 데가 없다. 그러니 태묘와 문묘에 제사지낼 때는 모두 창덕궁에서 재계하고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하였다.





영의정 남곤·좌의정 이유청이 의논드리기를 “전에 벼락친 변 때문에 이미 대신을 보내어 8월 정(丁)자 드는 날 추정(秋丁)에 치제(致祭)했고, 석전제도 이미 섭행(攝行)으로 제사지낸 지가 20일도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몸소 거행하려 하니, 태학(太學)을 시찰하는 시학(視學)이 제왕(帝王)의 성대한 일이기는 하지만 제례(祭禮)에는 번거로운 폐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일 유생들에게 전정(殿庭)에서 제술 시험을 보여 서책(書冊) 등의 물품을 상주어 권장하셨고, 별시를 열 날도 이미 촉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또 유생을 모아 제술 시험을 보이려 하시니 이것이 상격(賞格)을 중히 여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갓 번거로운 일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셔도 유생들을 면려시킬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태묘와 문묘에 직접 제사할 때는 세종조(世宗朝)의 고사(古事)에 따라 창덕궁에서 재계하도록 하자는 전하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하고, 우의정 권균(權鈞)은 의논드리기를, “전에 벼락친 변 때문에 즉시 대신을 보내어 별제(別祭)를 지냈습니다. 또 이달 20일에는 별시(別試)의 초시(初試)가 있는데, 그 전에 또 제술 시험을 보이는 것은 번거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또 태묘에 재궁(齋宮)이 있는데도 다른 곳에서 재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 문묘의 경우에는 창덕궁에서 재계하는 것도 예(禮)에 맞겠습니다.”했는데, 영의정과 좌상의 의논에 낙점(落點)하고 전교하기를, “뒷날 태묘와 문묘에 몸소 제사할 때에는 창덕궁에서 재계하도록 하겠다.”하였다.





1679년 4월 13일 이에 앞서 함흥본궁(咸興本宮)의 신주(神主)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위판(位板)을 종이 대신 나무로 바꾸라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예조 판서 오시수(吳始壽)가 다시 품했는데, 숙종이 제례(祭禮)를 주관하고 국왕의 시호와 묘호를 관장하는 태상시(太常寺) 관원에게 명하여 목수를 데리고 재목을 준비해서 내려가라고 하고, 잇달아 감사(監司)로 하여금 바꿔 쓰도록 명하였다. 대개 함흥에 사사로이 세운 궁묘(宮廟)는 비록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고향 풍패(豐沛)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뜻에서 세웠겠지만 결코 예(禮)는 아니다. 예관(禮官)이 예를 근거해서 파할 것을 청하지 못하고 그냥 순종하여 왔던 것이라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실없는 말로 놀리는 기롱(譏弄)하였다. 오시수가 또 아뢰기를,“태묘(太廟)의 제사 때에 축문을 얹어 놓는 널조각 축판(祝版)은 신주(神主)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인 위판(位版)에 의해야 마땅한데, 위판을 보면 왕후(王后)의 성씨(姓氏)는 다 쓰지 않고 유독 태종의 비 원경(元敬) ·세종의 비 소헌(昭憲) ·세조의 비 정희(貞熹) 3위만 다 썼으니, 위판을 기준한다면 서로 맞지 않는다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또 축판은 4대(代) 안은 반드시 황고(皇考)·조고(祖考)·증조고(曾祖考)·고조고(高祖考)라고 써야 하며 후비(后妃)의 위판 역시 같이해야 하는데, 위판에는 휘호(徽號)만 씌어 있고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위판에만 황조비(皇祖妃)라고 씌어 있을 뿐, 태조의 비 신의(神懿) ·태종의 비 원경(元敬) 양위(兩位)에겐 왕태후(王太后)라고 썼으니, ‘태(太)’자 역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성종의 비 공혜(恭惠) · 중종의 비 장경(章敬) 양위에겐 휘호를 쓰지 않았으니, 또한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입시(入侍)한 제신(諸臣)들 중엔, 마땅히 고쳐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고치지 않아야 마땅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숙종은 이담명(李聃命)의 말을 들어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유신, 그리고 삼사(三司)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태묘 제조(太廟 提調)를 시켜 살펴 조사해 보니, 3위(位)의 성씨(姓氏)와 ‘황조비(皇祖妃)’란 세 글자는 다 위판(位版)에 씌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오시수(吳始壽)는 태묘(太廟)를 기록한 책자만 상고한 탓으로 잘못 아뢰었던 것이 틀림없다. 16일에 제신들이 회의하였는데, 제각기 의견이 달랐다. 숙종이 명하기를, “모두 고쳐 쓰지 말라. 축판(祝版)도 이전대로 놓아두라.”하였다. 잇달아 예관(禮官)을 옛 사적(事跡)을 깊이 조사하여 고찰하는 추고(推古)할 것을 명했다.





1906년 2월 15일 고조 광무제가 효혜전(孝惠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이 아뢰기를, “부태묘제(祔太廟祭)를 직접 행하신다고 명하였는데, 현재 봄추위가 엄동설한과 다름없고 항간(巷間)에는 돌림감기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로이 거둥하시어 새벽 일찍 제사를 받드는 것은 절선(節宣)하고 보양하는 방도에 어긋납니다. 내린 명을 속히 거두고 섭행하도록 허락해 주소서.”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이르기를, “애타는 간절한 마음이 이와 같으니, 억지로라도 따르겠다.”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이번의 부묘(祔廟)의 제향(祭享)은 기필코 직접 제사지내려고 하였으나 대신의 애타는 간청이 이와 같으니 비록 마지못해 따르기는 하겠지만 정리(情理)와 예로 본다면 매우 서운하다. 태묘(太廟)에의 춘향대제(春享大祭)와 겸하여 지내는 부태묘제(祔太廟祭)에 대신을 보내어 임금 대신 일을 행하는 섭행(攝行)하도록 하되 한결같이 직접 제사지내는 예(例)대로 마련하고 제관(祭官)은 그대로 쓰고 모든 벼슬아치 백관(白官)은 참석하라.”하였다. 태묘 정전의 신주장에 이미 봉안되어 있는 태조 고황제 이하 모든 신주들을 신실(神室) 앞에 있는 신탑 위에 꺼내 놓고 부알판위(祔謁版位)에서 태묘 정전에 먼저 부묘(祔廟)한 선황제들에게 부알례(祔謁禮)를 봉행한 후 밤나무 신주 율주(栗主)를 정전에 모시는 의식을 행한다. 부묘(祔廟)시에 선황제(先皇帝) 신위에 배알(拜謁)하는 부알판위(祔謁版位)는 태묘 정전의 신문(神門)에서 정전으로 들어가는 부묘(祔廟)할 때 신주를 봉안하여 모시는 신로(神路)의 중간 쯤의 동쪽에 있는 사각의 검은 전돌을 깐 판위이며 3년상을 치룬 황제나 황후의 신주(神主)를 모신 가마 신여(神輿)를 잠시 내려놓고 부알례(祔謁禮)를 봉행하던 판위이다.
2013-04-11 16: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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