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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군 수뇌부들과 정보기관장들은 5.18 때 남한접수원정대의 남침사실을 몰랐다
 미스터kore…_admin
 2015-11-25 22:22:43  |   조회: 5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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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군 수뇌부들과 정보기관장들은 5.18 때 남한접수원정대의 남침사실을 몰랐다

아래에 다음의 책들을 통해서 그 증거들을 제시하겠다.

첫 번째 책은 "12.12와 5.18 (上)/2009, 도서출판 시스템"이고, 두 번째 책은 "5.18분석 최종보고서/2014, 도서출판 시스템"이고, 세 번째 책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2009, 자유북한군인연합"이다.

1. "12.12와 5.18 (上)"

오전 9시경, 7공수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 정문으로 학생 250여 명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각진 돌을 던져 부동자세로 서 있는 7명의 공수대원들에게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혔다. 곧 뒤를 쫒으니 저들은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P296 중단)

5.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짐에 따라서-

* 1공수여단 4개 대대-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

* 5공수여단 4개 대대- 모두 고대에 배치

* 11공수 3개 대대- 모두 동국대에 배치

* 13공수 2개 대대- 성대에 배치

* 9공수 3개 대대-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배치

* 7공수 4개 대대- 충남대, 전북대, 전남대, 조선대에 각각 배치되었다.

* 총 20개 대대가 주요 대학에 배치되었으며, 7공수 4개 대대만 지방에 배치됐다.(P296 상단)

(편집자 주: 계엄령하에서 학생 250여명이 모일 수는 없는 일이며, 당시 군이 북한특수군의 남침 사실응 알았다면 공수부대를 달랑 2개 대대만 그것도 비무장으로 광주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7여단은 전북 금마에 있었고, 여단장은 신우식 장군, 33대대장은 권승만 중령으로 전주 출신, 35대대장은 김일옥 중령으로 대구 출신, 그리고 35대대 제3중대장 박병수 대위는 김제 출신이었다. 박 대위는 조선대로 가는 것을 소풍을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여 아무런 진압도구를 챙기지 못했고, 여단에는 전라도 출신들이 매우 많다고 증언했다. 5월 22일부터 전교사 사령관을 맡았던 소준열 장군은 7공수여단의 40%가 전라도 출신이라고 증언했다. (P310 중단)

다음은 김제 출신 박병수 대위의 증언이다

여단본부에서 출발하여 대학에 진주한다는 말을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기에 놀러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실탄은 개인별로 가져가지 않았고, 소나무로 만든 진압봉 하나씩 들고 갔다. 진압봉과 사과탄이 무기의 전부였고, 방석모, 방패, 최루탄 발사기 같은 것도 없었다. 비상 특전 식량만 먹었고, 더운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잠을 거의 못 잔데다가 배가 고파 앉기만 하면 잠이 왔다.

아래는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증언이다

광주출동 당시 실탄은 개인에게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부대가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P311 중)

5월 19일부터 광주시위는 그냥 시위가 아니라 폭력 백화점이었다.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 낫, 곡괭이, 도끼, 휘발유통 등 폭력의 무기도 다양해졌지만 경유를 길에 붓고 불을 지른다거나 차량과 건물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의 행태에도 온갖 지혜가 다양하게 동원되었다. 3~4명 7~8명 단위로 쪼개진 공수대원들은 수백~수천 명에 둘러 싸여 매타작을 당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혈투를 벌였다. 이날부터 공수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전세는 완전히 시위대에 의해 압도됐다.(P319 상단)

(학생시위대는 감히 공수부대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럼, 저들은 누구이며 과연 저들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는가?)

전남대 앞을 지키고있던 3여단 16대대가 이를 구출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시위대로부터 차량돌진 공격을받아 임신한 부인을 두었던 정관철 중사가 즉사했다. 또한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했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밤 10시경 전남대에는 수천 명 단위의 시위대가 100여 대의 차량을 몰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로 인해 3여단 16대대 병사 1명이 즉사했다.(P343~345)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증언

5월 20일부터는 우리가 시위대로부터 계속 당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체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리 병력들은 완전히 의기상실하고 공포강에 눌린 그런 사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대장과 너희들이 여기서 죽는다. 이 자리를 물러날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자리를 지키자"라고 병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음날 새볍 3시 정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여단본부나 우리나 다 같이 자기들을 향한 공격을 막느라고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만약 그 당시 지휘관이나 병사들이 겁을 조금이라도 먹고 물러섰다면 그 자리에서 시위대에게 전부 밟혀 죽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5월 21일 03시까지 계속되었다.(P352~353)

3공수 12대대 김치년 상황병의 진술

그러다가 밤 10시가 될 무렵 드디어 피해상황이 접수됐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16대대의 한 중사다. 우리 대대원도 차량에 깔려 부상당했다." 사망한 군인은 정관철 중사였다. 그는 전역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P353)

이 무렵 무전기에서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초급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 옆 대대와 접촉이 안 되고 있다. 공포탄을 달라. 차량을 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탄을 달라." (P354)

지그재그 차량돌격 작전에 드디어 실탄 지급

약 20분이 지난 후 공포탄 및 실탄을 사용해도 좋다는 여단본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단 유의할 점 몇 가지 사항이 전달되었다.

ㄱ. 실탄은 중대장급 이상에게만 30발씩 지급할 것

ㄴ. 돌진해 오는 차량의 저지용으로만 사용할 것

ㄷ. 인명을 향하여 절대로 쏘지 말 것

ㄹ. 공포용 이외의 용도에 사용할 시에는 엄중 처단한다.

대충 이런 요지와 함께 실탄지급을 명령하는 전통이 날아왔다.(P355)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는 공수부대원들이 실탄도 없이 무장시위대와 싸웠다. 그러다 실탄을 지급하면서 엄격히 유의할 점을 하달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발생한 사망자는 각종 흉악한 유언비어를 만들고, 또한 저들의 주특기인 '시체장사'를 하기 위해서 저들이 죽인 행위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날 내 동료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들은 사람을 향해 쏜 것이 아니라 위협용 사격을 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95년 7월에 발표된 검찰 조사에서도 이날 밤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4명이었고 부상자가 6명이었다. 3공수여단 하사관 1영이 차량에 깔려 사망했고 3명이나 부상당한 이후 총을 가진 군인들이 작심하고 사격했다면 왜 4명에 국한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인자로 몰리는 이유를 필자는 모르겠다. 혹자는 광주사태의 진압을 일반 보병부대에 맡기지 않았음을 논하기도 산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처럼 자제할 수 있었을지 필자는 의심스럽다. 눈에 불이 튀는 상황에서도 무차별 난사를 하지 않았기에 4명만이 불행한 죽음을 당한 걸 왜 모르나?(P357 중)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육사23기)의 회고기

광주의 시위는 공수단의 엄청난 착각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얼룩무늬 복에 베레모만 쓰고 차렷 자세로 투입되기만 하면 시위가 끝나는 것으로 통념화 되어 있던 시위진압이 광주에서는 공수단의 패퇴, 공수단에 대한 공격, 부대의 와해, 사단장 차량의 피탈, 공수단의 무등산으로의 도주 등 실로 6.25전사의 3군단 패배에 못지않은 치욕의 전사가 기록되고 말았다.(P360)

무인돌진차량이 우리대대를 향해서도 5대 가량이 간헐적으로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거기에 16대대 운전병 정광철 중사가 돌진차량을 미쳐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찍힌 채 죽었다는 최초의 피해보고가 구전되어 왔다. 돌진차량이 시속 100키로로 달려들어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30명 정도 죽었을 사고였다는 것이다.(P361)

유인 돌격 차량에 대해서는 가스탄도 곤봉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대대원은 실탄을 휴대하지 않았다. 포승줄과 최루탄도 과잉장비라고 투덜되던 우리가 실탄이 소요되는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총은 군인과 떨어질수 없는 분신의 개념으로 휴대한 것이었지 쏘려고 휴대한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공수대가 출동명령만 받으면 반사적으로 들고 나오는 약간의 탄약은 전남대에 놓고 나온 상태였다. 유일한 총기는 대대장인 나의 45구경 권총과 실탄 14발 뿐이었다.(P362)

광주교도소에 대한 무장시위대의 무력공격은 5월 21일을 전후하여 6차례나 감행되었다. 교도소를 점령하여 2700여 명의 수용자와 170여 명의 좌익수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광주 항쟁을 순수한 민주화 운동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시각에 일조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P370)

광주에는 숨어 있는 지도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강력한 심증을 갖게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38개 무기고의 동시 탈취다. 5월 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10정 내지 46정에 이르는 M-16 소총들이 있었다. 이에대한 근거는 "광주시민 같지 않아 보이는 36인조가 M-16으로 무장한 채 도청에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5.18측 당사자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69~95쪽에는 윤영규(당시 42세/YMCA이사)가 "살육의 낮과 밤"이라는 제하로 쓴 글이 들어있다. 그는 광주사건으로 1년 6월의 징역형을 받은 후 1987년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 초대회장, 1989년에는 전교조 초대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긴급조치9호 위반 등 화려한 운동경력을 가지고 있다.(P371)

08:00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지프차 14대와 4정의 M-16 및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사병 1명이 실종됐다가 나중에 복귀했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P376)

09:00시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탈취했다.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를 12시부터 16시까지 불과 4시간만에 털었다. 2개 연대 분의 무기였다.(P377)

(학생 600명이 단체로 모일 수도 없었지만 무기고를 터는 일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는 각종 무기고의 요해도를 사전에 파악한 간첩들의 협조를 받은 북한특수군의 소행으로 봐야 옳다.)

이날 시민군이 탈취한 차량 수는 1개 사단 규모에 해당되며, 무기는 2개 연대 분에 해당된다.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군 병력은 20사단 308/4778명, 3여단 265/1216명, 7여단 82/604명, 11여단 163/1056명, 31사단 14/461명, 전교사 107/2144명, 계 939/11,198명이었다.

5.18의 모란꽃/전옥주와 차명숙

신동아 1998년 5월호를 비롯하여 여러 인터넷 매체들에는 '5.18의 모란꽃'이라는 두 여인 즉, 전옥주(31)와 차명숙(19)에 대한 소개의 글들이 실려 있다. 전옥주는 원광대학교 무용과 4학년 때 학내시위에 연루되었다 제적을 당했고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5년형으로 확정됐다. 그녀의 본명은 전춘심이다. 차명숙은 당시 19세로 학업을 포기하고 국제양재학원 기숙사에 있다가 5.18을 맞았다. 그녀 역시 1심에서 징역 10년, 2심에서도 10년을 선고받았다. 전옥주는 1981년 4월 3일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고, 차명숙은 12월 24일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P403~404)

계엄군의 광주시 철수 배경

광주소요가 폭도화하여 양측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무기가 피탈되고, 5월 20일 밤에는 3공수여단이 광주시내에서 포위되어 홍역을 치르면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등 사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1일 새벽 4시 40분경 황영시 참모차장, 김재명 작전교육참모부장, 나동원 계엄사 참모장, 계엄사 치안처장, 보도처장, 계엄처장이 참석하는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광주시민과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광주시에 출동 중인 모든 계엄군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시켜 전환 배치할 것, 광주에 1개 연대 병력을 추가로 증파할 것, 그리고 철수한 계엄군이 광주시로 재진입하는 작전은 상황을 고려하여 5월 23일 이후에 실시할 것 등을 결정했다.(P405~406)

5월 22일의 날씨는 맑았다. 무장 시위대들은 거리거리에서 차량으로 질주하며 총을 쏘아가면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장례비에 쓴다며 돈을 뜯어냈고, 여염집에 들어가 집단살인을 저질렀고, 평소 앙심을 갖고 있던 집에 들어가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흠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P420 중)

다음은 치안처 '치안사항보고서'의 특기할만한 내용들이다

ㄱ. 시위의 주동세력이 학생들에서 정체불명의 청년들로 바뀌고 있다.

ㄴ. 폭도들은 시가지 일대에 몰려디니면서 집을 비우라며 침구를 다 가져갔다. 또한 주민들에게 식사제공을 강요했고, 사창가에 들어가 창녀들에게 수혈을 강요했다.

ㄷ. 일부 폭도들은 경찰복을 착용하고 경찰 행세를 했다. 또한 공수부대 복장을 한 폭도들은 경상도 공수단을 없애야겠디는 등 행패를 부렸다.

ㄹ. 시민들에는 공수부대가 재투입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 폭도들을 격퇴시켜 주기를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ㅁ. 자칭 학생대표들이 전남부지사에게 6개항을 제안했고 부지사는 그들에게 무기반납을 권했다.

ㅂ. 시민들은 교도소로 전화를 해 폭도들을 속히 소탕해 줄 것을 관계기관에 연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ㅅ. 신원불상자가 도청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상자가 521명이나 된다고 선동해다.

ㅇ. 폭도들이 군 지프차와 트럭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달리며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눈다.

ㅈ. 도청 정문에는 학생들 상호간에 의견충돌이 있었다.(P422~423)

시민수습위원회의 등장

위원회는 회장 이종기 변호사, 최한영 독립투사, 박윤종 전광주시장, 조비오 신부, 윤영규 YMCA이사, 김상형 전남대 강사, 이석연 전남대 교수, 고문 윤종희 주교, 연락책 장유동, 김재일 등 각계인사 15명으로 구성됐다. 12시 정각에 이들은 도청 부지사실에서 회의를 갖고 다음과 같은 7개 요구사항을 결의했다.

ㄱ. 계엄군 투입금지

ㄴ. 구속학생 전원석방

ㄷ. 과잉진압으로 인한 사태악화 인정

ㄹ. 사상자 부상자 보상 및 치료비 보상

ㅁ. 사후보복 금지확약

ㅂ. 시위내용 사실보도

ㅅ. 상기사항 불응시 계속 투쟁

위 7개항 중에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들어 있지 않았다.(P425~426)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시위에 대한 상황을 이렇게 판단했다. "광주시위가 일어난 이후에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더욱 가증되어 가는 데도 강경파의 반발로 광주시민에 의한 자율적 해결이 기대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전개되어 가는 데다 소요사태는 전라남도 일원으로 확산되고 있어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해를 끼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판단 하에 계엄사령관은 5월 23일 새벽 6시에 육군본부의 참모부장급을 소집하여 긴급계엄대책회의를 개최했다.(P429)

5월 23일 오전 9시경에는 신임 계엄분소장 소준열 중장으로부터 2군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상황분석과 '진압작전개요'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광주재진입작전 보고회의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진종채 2군사령관, 육본 작전교육참모부장, 군수참모부장, 전략기획참모부장, 계엄사 참모장, 군수운영처장 등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보고했다.

"광주지역 극렬시위자 중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자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자 등 신분이 의심스러운 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중에는 불순분자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P430)

(이 부분(대목)이 한국군의 자휘부가 북괴군의 광주 남침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다.)

오전 6시 서울역에서 주민의 신고로 간첩 이창룡(평양시 중구역 계림동 36번지)을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검거했다. 그는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에 잡혔다. 현금 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등 22종 339점을 압수했다.(P433 하)

5월 24일 오전 8시 3개 여단 모두는 광주로 즉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1여단은 장갑차를 선두에 세우고 63연대를 선두로 하여 이동하다가 송암 삼거리에서 매복하고 있던 무장시위대로부터 사격을 받았지만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효천역을 불과 500m 남겨둔 시점에서 도로변에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소속의 교도대로부터 무반동총 4발과 소총 수류탄에 의한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병력 9명이 즉사하고 33명이 중상을 입었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의 오른 팔이 날아갔고, 작전과장인 차정환 소령은 즉사했다. 11여단은 산 쪽의 매복지로 쳐들어가 1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신문해보니 전교사 예하 교도대였다. 이들은 공수부대의 장갑차를 무장시위대가 탈취한 것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한 것이다. 당시 교도대에는 무장 시민군이 군용차량을 탈취하여 그 쪽으로 가고 있다는 역정보가 입수됐다. 이 역정보는 군의 이동사항에 대한 비밀을 교활한 내부자가 흘린 소행이라는 것이 당시의 생각들이었다. 비밀정보가 자꾸만 새나갔다는 것은 군 내부에 간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P442~443)

학생수습위원회 간부들의 인적사항(P445)

위원장 김종배(26, 학생/무기징역)

대변인 윤상원(윤개원 30, 녹두서점/자상 사망)

외무담당부위원장 정상용(30, 사원/무기징역)

내무담당부위원장 허규정(27, 학생/15년형)

기획실장 김영철(32, 사원/7년형)

민원실장 정해직(29, 교사/5년형)

상황실장 박남선(26, 골재운반 운전수/무기징역)

보급부장 구성주(26, 건재상/2년형)

홍보부장 박효선(29, 교사/전남대 국문과 졸)

조사부장 김준봉(21, 사원/5년형)

기동타격대장 윤석루(20, 양화공/무기징역)

경비담당 김화성(21, 종업원/6년형)

5월 26일19시 30분경부터 도청 2층 부지사실에서 시민대표들이 모여 황금선의 사회로 무기반납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무기반납에 반대하는 강경파들이 회의장을 퇴장한 후에 무장한 기동타격대원 7~8명을 대동한 상태에서 권총을 들고 회의장에 난입하여 "왜 우리들을 계엄군에 팔아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무기반납을 주장한 노수남 등 온건파 인사를 구타하고 부지사실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의 출입을 차단시켰다. 그리고 "지금 7함대가 제주도 부근에주둔하여 군부세력을 견제하고 있고 광주사태 때 많은 인명 피해가 있어 결코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입하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계엄해제 등 정치적 요구조건을 정부가 받아드릴 때까지 투쟁할 것을 강요했다.(P457)

한편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윤개원은 YMCA에서 지원나온 48명의 예비군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이들을 4개조로 편성해 광주시내에 배치하면서 "나는 죽기를 각오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고 지시했으며,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은 23시경에 서울 종합청사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계엄군이 선제공격을 해오면 우리도 대응하며 도청을 폭파하겠다"고 통고했다.(P458)

전교사 병기근무대 소속의 배승일 문관(5급갑) 등을 무장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청 지하실로 두 번씩이나 잠입시켜 25일에는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26일에 다시 잠입하여 오전과 오후에 걸쳐 피를 말리면서 뇌관을 제거했다. 광주사람들로 구성된 무장시위군은 광주시민 전체의 생명을 인질로 삼았지만, 광주에 살지 않는 진압군은 목숨 걸고 광주시민을 히로시마의 악몽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이다.(P462 중)

5월27일의 날씨는 화창했다. 이날은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작전을 수행함으로써 6박 7일간의 '해방군천하'에 종지부를 찍어준 날이다.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 재진입작전의 기습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날 0시경 광주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하고 26일 22시경에 열린 작전회의에서는 광주 재진입작전을 무기연기 한다고 발표한 후 작전지휘관에게만 작전개시 직전에 "작전개시일은 27일 새벽 1시"라고 통고하는 등 기밀유지에 노력했다.(P465 하)

5월 27일 08시, 20사단은 광주 시내를 완전 평정하고 지역수색 및 잔여 무장시위대 수색 임무를 수행했다. 광주재탈환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3공수 80명(도청), 7공수 201명(광주공원), 11공수 37명(전일빌딩)이었고, 공격부대는 20사단 4,557명, 31사단 749명이었다. 광주 재지입작전 수행 중 무장시위대 17명이 사망하였으며, 295명이 체포되었고, 총기 2,836정, 탄약 83,724발, 차량 137대, 폭약 300상자, 수류탄 143발이 회수됐다. 이때 계엄군 피해는 사망3명, 부상 10명이었다.(P468)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5월 27일 아침 5시 20분경 주영복 장관에게 보고했고, 주영복 장관은 5시 23분경에 최규하 대통령께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했다.(P469)

사상자 현황

광주사태 전반에 걸쳐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 166명 중 차량사가 12명, 타박상 18명, 자상 4명, 총상131명으로 수사결과에 나타나 있다. 안기부가 작성한 164명은 학생 33명, 신원이 확인된 일반민간인 119명, 신원불상자12명으로 되어 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이들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79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계엄군에는 오직 M-16만 있었고, 당시 시민군에는 10~46정의 M-16이 있었다. 따라서 36명 모두를 계엄군이 쏘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P471)

결 론(結 論)

'5.18작전'은 북한의 남한접수원정대(군-관-민)가 남한(광주)을 접수하기 위하여 일으킨 게릴라 폭동이였다.

그 증거는 11월 22일 현재,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의 특수영상분석팀에 의하여 포착된 '광수'의 수가 260명이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의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광수들이 90여명이나 된다. 나머지 170여명은 북에서 각 분야에 내노라하는 실세 엘리트들과 김일성가의 로열패밀리까지 총 망라 돼 있다. 대남전선부 총책 김중린과 상장의 리을설이 직접 내려와 작전을 총괄 지휘했으며, 김일성의 딸 김경희와 그의 남편 장성택이 세 살된 딸 장금송까지 광주에 데리고 왔었다. 또한 김일성의 4촌 여동생 김정숙과 김정일의 처형 성혜랑 모자도 광주작전에 참여했었다. 그 외에도 '10~20대 미래 그룹'으로 광주에 왔던 탈북광수들이 현재 서울에서 30여명이나 다방면에 진출해 활동 중에 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2. "5.18분석 최종보고서"

5.18일 오전 9:30분경 전남대 정문을 지키던 공수대원 20명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200여 명의 시위대로부터 속수무책으로 돌세례를 받았다.(P22)

(편집자 주: 공수대원은 비무장이었고, 계엄하에 200명의 학생이 모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광주에 미리 침투해 있던 북한특수군이다. 여기서 군 수뇌부가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알았다면 서울의 여느 대학처럼 비무장으로 2개 대대만 달랑 광주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종 유언비어는 누가 작성하여 유포했을까?(P23)

(북한이 국군과 광주시민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 작성-유포한 모략작전이었다.)

대학생들이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계엄군을 조롱하고, 경찰병력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P25)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광주의 '시민작전'을 수행한다 해도 그렇게 정교하고 일사분란하게 수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일옥 35대대 대대장(P26)

5월 21일 8시 정각, 300명으로 구성된 '대학생 시위대'가 광주 톨게이트에 매복해 있다가 이동 중인 20사단 사령부에 기습공격을 가해 사단장 지프차 1호를 포함해 무전기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해 곧장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다.(P27)

학생들이 극비 중의 극비인 '부대이동 정보'를 알 수는 없는 일이며, 게다가 막대기 하나씩 들고 총을 든 부대를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여기서도 계엄군이 비무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 또 다른 300여명의 '학생시위대'가 5대의 대형 버스를 몰고 이시아자동차 공장에 합세했다. 그들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탈취하여 전남 17개 시군에 산재한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곧장 달려가 무려 2개 연대 분의 무기를 털었다. 불과 4시간만의 일이다.(P28)

(이 같은 일을 우리 대학생들이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

그들은 또 탈취한 8톤 분량의 TNT를 전남도청 지하실에 옮겨놓고 순식간에 포탄으로 조립해 놓았다.(P29)

(당시에 이런 조립 및 해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전라도 계엄분소 전체에 오직 한 사람, 5급 문관인 배승일 뿐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생들이?)

5월 21일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는 모두 61명, 이 중에서 28명은 도청과 거리가 먼 곳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다.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13명 모두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이다.(P31)

(그렇다면 이들 61명은 모두 누가 죽였다는 말인가?

광주사태 10일 동안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이다. 이들 중 총상 외의 사망자가 50명, 총상에 의한 사망자가 116명이다. 그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으로 사망했고, 36명만이 M16에 의해 사망했다.(P31 하단)

(그 당시 시위대에도 M16이 10정 내지 46정이 이미 있었다.)

간첩 손성모는 5.18 때 간첩들에게 길을 안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전향장기수로 있다가 2000년 8월 22일 김대중이 북송한 비전향장기수 63명에 끼어 북으로 갔다.(P43)

"광주시가 서울대학생 500여명에 대한 환영식을 거행했다."(P43 하단)/-5.18기념사업회 항쟁일지/타임라인-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의 학생, 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P46) /-1982. 3.20, 조국통일사/"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이민들의 투쟁"-

2013년 5월 15일 채널 A에서 전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김명국(가명)이라는 탈북자가 그의 참전사실을 증언하였다.(P47)

연-고대생 600명 중 단 한 사람도 보상을 받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P63 하단)

(이것은 그들이 곧 북한특수군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닐까?)

북한특수군 600명의 출처

1) 한국 정부측 자료

ㄱ. 1995년 8월 17일자, 대한민국 검찰이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보고서" (P92~93)

"5월 21일 새벽 2시 30분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8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 등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300여명이 이시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 시내로 진출하였음."

ㄴ. 1985년 5월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P40~41)

"5월 18일 14:25분, 유동 3거리에 학생 300명, 광주공원에 학생 300명이 출현, 15:50분, 학생 600여명이 도청방향으로 이동하며 시위, 학생 300명은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인사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산파출소에 투석,-파괴, 또 다른 300명은 16:40분에 지산파출소를 파괴하며 시위- -"

2) 북한 당국 측 자료

ㄱ.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 5월 16일에 발간한 "광주의 분노"(P35~36)

"폭동 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 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7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그들은 이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특히 600여명으로 구성된폭동 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여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 2,240정, M-1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6,400여발이었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 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 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였다. 라주군에 진출한 폭동군중은 괴뢰경찰서 <산포지서>, <노안지서>, 등 5개의 괴뢰경찰서들을 습격하고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조리 빼앗아내였다. 화순군에 진출한 봉기군중은 괴뢰경찰서의 <역전무기고>,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능주장성군, 강진군, 영광군, 승주군, 해남군에서도 무기탈취투쟁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에는 오전보다 더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하여 오후에 이르러 봉기군중들은 일반상용무기들을 대체로 다 장만하였다."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들을 들이치고 수많은 무기들을 탈취하였다.

ㄴ.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P595)

"5월 26일 600여명의 관주 학생, 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3.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임천용 회장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광주사태의 본질은 좌우 논리가 아닌 북한정권과 그들의 사주를 받고 행동한 남한의 치밀한 배후세력들만 알 수 있다. 민주화를 위해서 길거리에 나섰던 광주사람들 자체도 사건의 깊숙한 내부에 은폐되어 있었던 속사정을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그런 사건이었다. 정체가 숨겨진 5.18의 내막은 남한 땅에 북한공화국 정권을 세우려고 했던 김대중과 같은 반국가적인 친북세력들이 영남과 호남의 알력과 마찰을 의도적으로 조성하면서 광주사태를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과 기반에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던 사건이다.

★ 5.18광주사태는 남한 내부의 교란을 대남전략의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북한정권에 의해서 빈틈없이 설계되었고, 그들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배후 교란작전의 작품'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평화도시 광주를 명중시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그는 5.18관런단체 측에 광주사태 당시에 현장에서 발생한 다음과 같은 '미스터리'들을 소상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1)극비 중의 극비사항인 21일 08시에 20사단이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 300명이 미리 매복했다가 이를 습격하여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방산업체로 직행한 사실.

2) 또한그곳에 09시에 어떻게 600명이 일시에 모일 수 있었으며, 어떻게 4시간만에 44개 무기고를 습격해 2개 연대분의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는지?

3) 주로 여자들을 노려 사체를 유린한 점.

4) 광주현장에 출몰했던 정체미상의 복면부대.

5) 6회에 걸친 교도소 습격 문제,

6) 망월동묘역의 12구의 신원미상자 문제.

7) 많은 사람들이 M-16이 아닌 시민군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에 의해서, 그것도 정면이 아니라 등 뒤쪽으로부터 총알을 맞아 사망한 이유 등등--.

★ 임천용 회장은 말머리를 마감하면서 오직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고, 남한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세상을 북한 땅에 만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하였다.

김일성이 대남공작원들에게 내린 비밀지령문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영화감독 신상옥씨와 함께 1978년에 북한에 납치되었던 부인 최은희 여사의 증언이다.

"최 여사, 걱정할 것 없어요. 우리가 일부러 무력행사를 하지 않아도 반드시 통일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남조선의 지식층을섭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들은 젊은 학생층을 포섭합니다. 학생들은 전위대로 나와서 어떤 꼬투리를 잡고 또 만들어서라도 문제를 일으켜 남조선을 혼란에 빠뜨리게 합니다. 남조선이 일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면 미국 놈들도 별 수가 있겠습니까? 미국은 결국 손을 못씁니다. 그만한 공작은 이미 해두었습니다. 두고 보세요. 최 여사는 통일 된 뒤에 서울에 가시면 됩니다."

5.18 광주사태에 대한 탈북자 설문조사 결과

2회에 걸친 설문조사에 총 참여인원 115명, 그중 32명이 답변을 거부 하였고 질문 1과 질문 2에 중복으로 답변한 사람도 있다. 지면 관계상 일부만 추려서 올린다.

질문: 북한에 살 때 1980년 5월 18일 광주봉기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하였다는 말을 누구로부터라도 들은 적 있습니까?

답변 1: 광주에 직접 왔다 간 당사자에게 들었습니까?

(예) 13명, (아니오) 70명

답변 2: 친척이나 친구들한테서 들었습니까?

(예) 61명, (아니오) 22명

전체인원 115명 중 74명, 즉 64%가 북한 특수부대가 5.18광주에 왔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1980년도 남한에 침투한 공작요원 40명 이상이 근무한 부대를 알고 있다. 황해남도 신천군에 있는 정찰국 71, 72대대다. 판정경기를 통해 각 특수전부대별 80년도 남한침투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자가 40명이었다. 조별 부대별로 작성된 '전투기록장'을 보았다. 본인이 근믄한 정찰국 70대대에서 1개조 3명이 침투했으며, 이들은 본인의 상급 장교로 본인과 함께 훈련을 했다." -영등포구 이 모씨(45세)-

"광주에 직접 다녀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당시 무기고를 털어서 총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 북한에서 내려간 사람들은 무장봉기로 통일을 원했지만 남조선 사람들은 통일보다 민주화가 먼저였다. 남조선 사람들은 북한의 선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양천구 엄 모씨(45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다녀온 사람도 보았고, 당시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들이 중심이 돼서 광주인민봉기를 물밑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봉기를 성공시켜 가지고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했다." -노원구 전 모씨(56세)-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보도자료에 의하면 북한의 특수부대와 공작부대가 남한에 침투하여 주요 항쟁시위들과 광주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 -은평구 김 모씨(65세)-

"직접 남조선에 갔다가 온 사람에게 들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들었다. 남조선 사람들은 <같이 협동하여 싸우자고 해도 그들은 오히려 경계하고 무서워했다>고 하였다. 또한 광주봉기에 참가해서 남조선인민 세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4.19 혁명 때도 부분적으로 간첩들의 조종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조선에 숨어서 활동하는 10만 명의 간첩들이 교란작전을 할 것이라고 하더라" -송파구 이 모씨(70세)-

"5.18 광주인민봉기 때 북한 중앙TV에서는 매일 끔찍한 영상물들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들과 복면을 한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천 남동구 김 모씨(53세)-

"친구의 처삼촌에게 들었고, 당시 중대한 방송으로 취급하며 하루 종일 광주봉기를 방영하였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는 멘트로 시간마다 반복하여 보여 줬다. 임산부 배를 가르는 장면과 어린 여대생의 옷을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을 비롯한 끔찍한 살인 장면이 있었다." -노원구 도 모씨(44세)-

"TV에서 보았다. 친구 한 명이 테레비에서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이라고 하였다." -양천구 전 모씨(75세)-

"광주인민봉기에 참가했다가 죽은 사람의 동생한테서 들었다. 광주봉기의 배후자는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고 그들이 봉기를 조종하였다고 하였다." -강북구 최 모씨(35세)-

"큰 언니 형부가 북에서 특별훈련을 받은 미인 아가씨들도 광주봉기에 개입했고 그들이 뒤에서 조종했다고 하였다." -양천구 이 모씨(37)-

"남조선에 직접 갔다 온 군단 정찰대대장한테서 들었다.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사북탄광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 -방화동 기 모씨(49세)-

"남조선에서 북한으로 귀순한 사람이 부대에 내려와서 강연하는 것을 보고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광주봉기 때 시민군 지휘부에 있었고 북한특수부대와 협동해서 통일을 위해 싸웠다고 하였다." -경기 군포시 오 모씨(47세)-

"남조선에 갔다가 부상을 당하고 온 공장 당 위원회 초급당 비서에게서 강연시간에 직접 들었다." -인천시 강 모씨(57세)-

"대학을 마치고 3대혁명소조 기간에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가서 싸우고 온 사람한테서 들었다. 같이 나갔다가 죽은 사람을 불태워서 흔적을 없애버렸다고 말하였다." -송파구 이 모씨(43세)-

"텔레비전을 보면서 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일원동 백 모씨(5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 -경기 광명 신 모씨(67세)-

증언 1) 교육자의 시각에서 본 5.18사건/ 전 함경남도 금야군 고등중학교 교원

교육자에게서 가장 순결하고 소중한 것은 거짓과 진실을 솔직하게 구분해서 말해줄 줄 아는 양심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자가 그 어떤 상황에 막혀 본의 아니게 양심을 비켜가게 되면 한 두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의 기초가 무너지게 되고 대의가 뒤집혀진다는 것을 느낆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북한이 어떤 사회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충성심과 우상화에 목숨을 걸고 체제선전용 교사의 직분으로 마음이 백지같이 하얗고 청순한 학생들의 머리에 거짓을 심어주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5.18사건이 김대중을 비롯한 김일성 부자의 추종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북한과 긴밀히 내통하여 일으킨 국가전복을 위한 반란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나는 1981년 4월, 생활총화에 다녀오신 이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었다.

"작년 5월달에 남조선에서 일어났던 광주인민봉기 때 누가 남조선괴뢰군들 하고 싸웠는지 모르지? 우리 쪽의 특수부대 군인들이 파견되서 직접 싸운거야. 오늘 군당 조직비서가 와서 그 얘기를 한 시간이 넘도록 했어.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정말 대단해. 남조선 놈들 아무리 까불어도 우리하고는 대상이 안 되지. 우리 군대가 세계 최강이야. 그런데 광주에 가서 죽은 사람들도 많은가 봐. 조직비서 동지가 말하는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갔던 사람들을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고 돌봐주라고 말씀하셨대"

다음은 2007년 가을 어느 날, 학생들과 5.18 광주사태를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관전평이다.

"영화 전반에 설정되어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시작부터 끝까지 증오와 적개심을 유발시키게 하는 편견적인 부분이었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분노와 감정이 일지 않을 수 없게 충동질 하는, 다시말해서 노골적으로 이간질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질고 순수함 같은 특유의 '약점'을 끌어내어 미끼로 던지면서 한쪽에는 평화라는 그럴듯한 배경을 세워놓고 다른 한쪽은 그 평화를 탄압하고 짓밟는 잔인한 폭력세력을 세워서 '살인마'라는 진압군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위대한 시민군'간의 치열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 놓았다"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 광주사건은 북한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다.

"광주사건! 그거 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어요."(P59상)

"광주사건이야 북한에서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현한 것 아닌가? 북한의 대남사업 중에 5.18만큼 크게 성공한 작전이 어디 있어. 김일성이도 아쉽다고 인정했잖."(P59하)

"너 지금까지 공화국영웅칭호 받은 사람을 직접 본적이 없지? 이 사람이 바로 5년 전에 김정일 동지를 직접 만나 뵙고 그분 앞에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야."(P65중)

공화국영웅의 탄생 배경

"1970년대 중반에 평안북도 정주, 동림 일대에 남조선 종심에 대한 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정예특수부대인 일명 자살부대라고도 불리던 '당원사단'이라는 최정예부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인 1966년 가을에 자살부대나 다름없는 국가보위부 소속 첩보훈련소에 모집되어갔다. 그가 간 곳은 서해 바닷가의 어느 이름 없는 섬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백여 명의 같은 또래 어린 동료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은폐되어 있는 생체실험장도 있다고 한다. 정신훈련교육은 처음부터 조국을 위해서는 필요하면 부모와 처자식도 죽여야 하고 친구도 무조건 죽여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생전처음 보는 코가 큰 사람들이 와서 미국말을 가르치고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과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의 말들을 어린 훈련병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 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당할 때까지 근 2년 동안 대원들에게 살인적인 훈련을 가르쳤다"(P73)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안내요원이 들고 온 지휘부의 명령서에는 소부대 인원들을 지휘하여 남조선의 후방에 침투해서 현지에서 차후명령을 전달받고 수행하라는 임무였다. 지역은 전라남도 일대이고 육지에 상륙하여 도착장소까지의 안내과정은 별도의 인원들이 맡아서 수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게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먼저 내러 온 7명의 북한요원들은 부마항쟁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원래 계획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안창식을 비롯한 18명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 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2월말을 넘기면서 전라도 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상황판단)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짜여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이 엄격한 원칙이고 각기 자기 분야에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안창식을 비롯한 일행 18명은 교전중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대원을 병원까지 쫒아가 그 시신을 사진 찍던 남한 측 여자정보요원을 끝까지 추적하여 살해하고 그 시신을 빼돌렸다"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안창식을 포함한 11명 중에 한 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부마폭동에 참여했던 7명 중에 3명은 행방불명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광주에 파견되어 내려왔다가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북한정권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배려되지 않았고, 국기훈장 1급만 가족들에게 수여하였다고 한다"

증언 2) 북한군 건설여단 33명의 떼죽음 속에 숨겨진 광주의 비밀/전 함경북도 무산군 도시건설사업소 노동자( 제대군인)

열차 칸에서 잘 못 만난 대남 공작원/P108

--- <생략>--- 참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패륜적이고 군법을 무시하는 일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발샐했다. 바로 그 순간에 좌중을 놀라게 하는 또 하나의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 불한당 같은 새끼들 당장 멈추지 못해?"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탄탄하고 다부지게 생긴 30대 초반의 한 사람이 싸움판의 한가운데로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그는 험악한 기세로 대좌를 구타하는 소대원들을 둘러보더니 가벼운 동작으로 주위에 있는 열댓 명의 인원들을 손쉽게 제압해 버렸다. 그 사람이 소대병사들을 때리는 동작이 얼마나 민첩하게 빠르고 정확하였던지 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도 그의 손발이 움직이는 것을 도저히 눈으로는 읽을 수가 없었다. 기세등등해서 대좌를 짓밟던 소대병사들이 순식간에 영문도 알 수 없는 사람한테 얻어맞고 열차바닥에 모두 쓰러지자 소대장의 몸이 일시에 굳어졌다. 혼자서 열댓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제압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본 일이었지 현실에서는 소대장으로서도 처음 보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대장을 대좌 앞에 불러다 세워놓고 무섭게 호령하였다. "너한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지휘관을 망신시키는 일은 잘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 하나만은 용서해 준다. 그 대신 대좌 동지하고 처녀 안내원들에게 제발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라."

중대를 자살로 내몬 대대장의 실수 (80대 1의 대결)/ P120~127

"대대장 동무! 내용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열차 안에서 잠깐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 화해하고 다 풀었습니다. 대원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저도 이해가 갑니다. 서로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 말고 좋게 해결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화를 푸시고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야, 평양! 너 금방 몸을 놀리는 거 보니까 어디서 몇 동작 좀 배운것 같던데 한번 움직여 보지! 우리가 얼마든지 받아줄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거라고 생각해? 이 거지 같은 새끼야!"

"대대장 동무! 내가 양해를 구했습니다. 병사들한테 손을 댄 것은 제 실수였습니다. 잘못은 무조건 내가 했으니까 여기서 그만하고 서로 화해를 합시다." "이 평양새끼 죽여 버려!" "대대장! 병사들이 다치는데 대해서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오. 책임은 반드시 당신이 진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바로 그때 구대원 한명이 낫을 들고 '평양손님'의 등 뒤로 달려들어 등가죽을 한 뼘 정도나 끔찍하게 찢어 놓았다. 한 순간 방심에 어처구니없는 일격을 당한 것이다. 70여명이 도끼와 톱을 살벌하게 휘두르는 속에서도 평양손님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면서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를 위주로 상대방을 견제하였다.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이 주저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발로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끽소리 한 번 못하고 목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한국의 군 수뇌부들과 정보기관장들은 5.18 때 남한접수원정대의 남침사실을 몰랐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증언 2 후속편>>

그의 발과 주먹은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간 사람들은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내가 죽어도 하지 말았어야 할 싸움이었는데 실수한 것 같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잖아"

'평양사자'나 우리가 죽은 사람들의 처리문제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불시에 인근에 있는 교도지도국산하 특수부대 사람들 수 십 명이 싸움현장에 들이닥쳤다. 바로 그때 싸움판을 피해서 숨어있던 하사관 부분대장 한 명이 잠시 긴장을 풀고 서있는 평양사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등허리 척추를 도끼로 내리 찍었다. 말릴 새도 없이 눈 깜빡 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울면서 죽지 말라고 소리치자 평양사자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소리와 함께 "억울해"라는 말을 비교적 똑똑하게 남기더니 맥없이 머리를 떨구어 버렸다. 싸움은 결국 우리 중대사람 21명이 평양사자의 손에 맞아 죽고, 그도 도끼날에 찍혀서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직승기의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까만 양복차림을 한 30대 중반의 여성이 먼저 내리고 그 뒤로 역시 사복을 하고 똑같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7~8명의 남자들이 뒤따라 내리었다. 잠시 뒤에 여단장은 그의 말을 듣고 꽂꼿하게 차렷 자새를 취하더니 여단 전체에 명령을 내리었다. "여단 차렷! 3대대는 제자리에 그 밖의 다른 대대는 좌우로 돌앗. 3대대를 기준으로 좌우로 각각 100보씩 앞으로 갓"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 있는 너희들 여단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소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이놈들아.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그후과가 막대한지 너희 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권총을 꺼내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 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나머지 열 명에게는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귀가 따갑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댔다. 남조선을 수십 차례씩이나 드나들면서 공을 세웠던 광주의 영웅은 이런 불우한 운명으로 해서 어릴 적 나이에 집을 떠나서 27년 만에 처음으로 밟아보는 고향 길을 끝으로 아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묘지의 높이는 1.5미터가 넘어보였고 묘지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

자서전이라기보다 평양사자의 집안 환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집을 떠나게 된 사연, 15년 동안 무인도에서 특수훈련을 받던 일들과 남조선에 나가서 공작하던 내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 목사를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애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 정권에 위협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증언 3) 한국군은 광주의 살인자가 아니다/전 북한군 항공사령부 소속 여성고사포중대 중대장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제하의 글에서 월간조선의 조갑제씨는 "광주사태를 취재했던 수백 명의 기자들 중 탈북군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북한군특수부대 사람이라고 의심을 할 만한 사람을 단 한명이라도 찾아내거나 본적이 없다" "광주사태 현장에 한 개 대대의 인원이 등장할 무대가 없었다" "나도 직접 현장을 취재했지만 내 눈에도 의심할 만한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참으로 해괴망칙하고 황당한 기사를 썼다. -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께서 전해준 A4용지 두 장의 기사 중에서-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명령 제 0 0호>

최근 남조선에 조성되는 긴장한 정세는 조국통일의 대사변을 주동적르로 맞이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탄광과 광산 및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반정부투쟁은 우리의 공화국인민들과 더불어 그들의 통일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최고의 시기에 도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위대한 통일국면은 우리의 눈앞에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은 사회주의조국을 사수하는 전초전의 보루이며 조국통일의 가장 위력한 전
2015-11-25 22: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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