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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북한이 <기획-수행-기록>한 역사라는 증거들
 미스터kore…_admin
 2015-11-15 15:34:10  |   조회: 3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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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북한이 <기획-수행-기록>한 역사라는 증거들

우선 5.18과 관련하여 북한이 발행한 두 개의 책들을 살펴보면 현장에 있지 않고선 도저히 쓸 수 없는 자세한 내용들이 수록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엔 "5.18이 대남공작 역사상 최고봉"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1. 5.18관련 북한책

1)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1982, 조국통일사, 595쪽-)

"5월 26일 600여 명의 광주 학생, 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2) <광주의 분노>(1985, 조선노동당출판사, 35~36쪽-)

"폭동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중들은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 600여 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 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 2,240정, 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6,400여 발이였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 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3)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은 넘어>(1985, 황석영 명의로 발간/1999, 이재의 명의의 영문판)

이 책은 자기가 저자라는 사람이 황석영을 포함해 4명이나 된다. 책의 내용이 위에 열거한 두 권의 북한책을 그대로 복사한 것에 불과하며, 황석영 자신이 자기는 발행하는데 명의만 빌려주었다고 실토했기 때문에 여기에 올렸다.

2. "님을 위한 교향시"

1989년 김일성은 황석영과 윤이상을 직접 불러들여 북한의 5.18영화인 <님은 위한 교향시>를 만들었다. 그 시나리오는 황석영이 쓰고, 배경음악은 윤이상이 작곡했다. 그들은 그 공로로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황석영에게는 상금으로 25만 달러를 주었으며, 윤이상에겐 저택과 15층짜리 윤이상 음악당을 하사하였다. 관련기사 보기---

1) 북한이 5.18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제목이 “님을 위한 교향시”였다 한다. 남한에는 빨갱이들이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치르는데 애국가를 부르는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5.18을 소재로...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blog.naver.com/jmw8282/140094637743 블로그 내 검색

2) 영화 「님을 위한교향시」 황석영이 시나리오를 , 윤이상이 음악을 맡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로엄청난 날조와 과장으로 반미 , 반대한민국을 선동한 영화였다 . 왜곡 , 날조 장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그게 사실은... blog.daum.net/cthwn/15720234 블로그 내 검색

3. 5.18 시체사진 사진첩

1) <아! 광주여!>(1990, 5.18, 북한 '한민전 평양대표부')

4. 북한 최고의 것에 붙여진 5.18 명칭들

1) 5.18청년호(1만 톤짜리 프레스)

2) 5.18무사고 정시견인초과운동(기차역)

3) 5.18영화연구소

4) 5.18 누에고치반

5) 5.18전진호

6) 영예의 5.18청년직장

7) 5.18땅크호

8) 5.18청년제철소 등등

5. 북한이 해마다 5.18을 기념하는 사진

5.18광주에 나타난 북한특수군 사진 특선

6. 601번 외국인 광수 힌츠 페터

힌츠페터,북한정권의 5.18국제선전전 요원(제601광수)증거

7. 자유북한군인연합회장 임천용씨 기자회견 " 5.18민주항쟁과... /보내기

2006년 12월 20일 서울 세실레스토랑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회’가 주최하고 ‘대한민국애국청년단’이 협찬하는 <5.18광주사태에 개입했던 북한군의 실체에 대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8. 시스템공학박사 지만원의 책

1)<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2008. 10, 도서출판 시스템)

2)수사기록으로 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12와 5.18 상/하>(2009. 10, 도서출판 시스템)

3)<솔로몬 앞에 선 5.18>(2010. 8. 도서출판 시스템)

4) 12년 연구의 결과물 <5.18분석 최종보고서>(20014. 10, 도서출판 시스템)

9. 재미교포 김대령 박사의 책

1) <역사로서의 5.18/4권>(2013. 5.12, )

10. 광주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검찰 증언

"5월 22일 15시 08분경 저는 도청 앞 광장에서 취재 중에 있었는데, 항쟁본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 곳곳에 500여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광주항쟁 지원차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이미 20사단 병력까지 동원하여 광주가 철옹성처럼 봉쇄되어 외부 사람들은 한 사람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다수의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11. 신천박물관의 가묘

신천박물관 개관일: 1960년 6월 25일.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신천박물관 (信川博物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황해남도 신천군 에 1960년 6월 25일 건립된 역사 박물관이다. 본래...

https://ko.wikipedia.org/wiki/신천박물관 사이트 내 검색 웹문서 더보기

여기에는 5.18 때 광주에 왔다가 사망한 490명의 가묘와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12. 김명국의 증언/채널A의 '김광현의 탙탙평평'(2013.3. 15)

5.18남파되었던 김명국 동영상 (채널A 탕탕평평)

13.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씨의 증언/황장엽, 김덕홍씨의 발언

채널A 뉴스 와이드 , TV조선 뉴스쇼 판 (2013.1.11)

14.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2009. 9, 자유북한군인연합)

필자는 위와 같은 증거들을 찾기 위해서 탈북군이들이 쓴 수기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증거들이 수록돼 있었다.

증언 1) "1970년대 중반에 평안북도 정주, 동림 일대에 남조선 종심에 대한 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정예특수부대인 일명 자살부대라고도 불리던 '당원사단'이라는 최정예부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인 1966년 가을에 자살부대나 다름없는 국가보위부 소속 첩보훈련소에 모집되어갔다. 그가 간 곳은 서해 바닷가의 어느 이름 없는 섬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백여 명의 같은 또래 어린 동료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은폐되어 있는 생체실험장도 있다고 한다. 정신훈련교육은 처음부터 조국을 위해서는 필요하면 부모와 처자식도 죽여야 하고 친구도 무조건 죽여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생전처음 보는 코가 큰 사람들이 와서 미국말을 가르치고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과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의 말들을 어린 훈련병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 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당할 때까지 근 2년 동안 대원들에게 살인적인 훈련을 가르쳤다"(P73)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안내요원이 들고 온 지휘부의 명령서에는 소부대 인원들을 지휘하여 남조선의 후방에 침투해서 현지에서 차후명령을 전달받고 수행하라는 임무였다. 지역은 전라남도 일대이고 육지에 상륙하여 도착장소까지의 안내과정은 별도의 인원들이 맡아서 수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게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먼저 내러 온 7명의 북한요원들은 부마항쟁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원래 계획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안창식을 비롯한 18명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 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2월말을 넘기면서 전라도 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상황판단)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짜여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이 엄격한 원칙이고 각기 자기 분야에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안창식을 비롯한 일행 18명은 교전중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대원을 병원까지 쫒아가 그 시신을 사진 찍던 남한 측 여자 정보요원을 추적하여 살해하고 시신을 빼돌렸다"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안창식을 포함한 11명 중에 한 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부마폭동에 참여했던 7명 중에 3명은 행방불명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광주에 파견되어 내려왔다가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북한정권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배려되지 않았고, 국기훈장 1급만 가족들에게 수여하였다고 한다"

증언 2)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 있는 너희들 여단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소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이놈들아.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그후과가 막대한지 너희 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권총을 꺼내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 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나머지 열 명에게는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귀가 따갑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댔다. 남조선을 수십 차례씩이나 드나들면서 공을 세웠던 광주의 영웅은 이런 불우한 운명으로 해서 어릴 적 나이에 집을 떠나서 27년 만에 처음으로 밟아보는 고향 길을 끝으로 아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묘지의 높이는 1.5미터가 넘어보였고 묘지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

증언 3)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명령 제 0 0호>

최근 남조선에 조성되는 긴장한 정세는 조국통일의 대사변을 주동적르로 맞이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탄광과 광산 및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반정부투쟁은 우리의 공화국인민들과 더불어 그들의 통일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최고의 시기에 도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위대한 통일국면은 우리의 눈앞에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은 사회주의조국을 사수하는 전초전의 보루이며 조국통일의 가장 위력한 전위부대이고 일당백의 강력한 무장력인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투명령은 하달한다.

가. 인민군무력부 산하 각 군단, 사, 여단 전투부대들은 만반의 전투동원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준전시상태에 돌입할 것.

나. 교도지도국 산하 각 저격 및 경보병여단들은 남조선의 후방을 신속히 장악하고 배후를 교란하여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작전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

다. 공군부대 산하 전투비행단들은 적진에 구축되어 있는 중요군사시설물에 대한 선제타격과 함께 공중작전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의 작전이 원만히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의 전투준비태세에 임할 것.

라. 해군부대 산하 전투함대들은 선제타격으로 해상공격권을 장악하여 신속한 기동력으로 해상육전부대들의 남한침투를 보장하며 육-해-공군 전반무력이 입체작전으로 단시일에 남조선을 공략할 수 있도록 비상전투태세에 돌입할 것.

마. 노동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원들을 비롯한 영웅적인 전체 조선인민들은 조국통일의 대사변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예비전쟁연습에 성실히 참가하며 공화국을 내부적으로 파괴하려는 간첩 및 암해분자들의 준동에 경각성을 높이고 자기의 일터를 철옹성 같이 지킬 것.

<김일성의 남조선을 통일시키는 세 가지 방법>

첫째, 남북이 협력하고 상호존중의 원칙에서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방법

둘째, 남조선인민들이 들고일어나서 북한의 지원을 요청하면 북한이 개입해서 통일하는 방법

셋째, 북한이 무력으로 남한을 선제공격해서 통일하는 방법

"광주현장에서 죽은 것이 확인된 사람들은 일단 부대로 복귀하지 못했어도 영웅칭호를 내신하라!"는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지시에 따라 "비행연대 참모소대 교환수인 처녀 상등병 채영희는 김정일을 접견하고 그가 직접 아버지에게 수여하는 공화국영웅칭호 증서를 받고 국기훈장 제1급 메달을 가슴에 달게 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

증언 4) 아래는 증인이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님의 설교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양심은 인간에게 있는 도덕적인 의식이다. 하나님의 음성자체는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받고 전하는 기관을 양심이라 한다." <중략>

"지금 북한에서 탈북을 한 탈북자 중에 '자유북한군인연합'이라는 조직을 가진 이들이 있어요. 그 분들이 최근에 양심선언을 했어요. 무슨 선언을 했는가 하니 5.18사건 당시에 자기가 있던 부대의 사람들이 여기 남한에 파견돼서 대한민국 국군 복장을 입고 총을 쏘고, 그리고 평민복을 입고 대한민국 국군을 향해 총을 쏘고 이간질을 했다는 거예요. 무기고를 탈취해서 총을 장악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민간인과 국군이 서로 교전하도록 만들어 놓고 이 나라를 뒤집어 엎으려했다고 합니다." <중략>---.

"5.18사건 당시에 북한에서는 실시간 현장 실황중계방송을 했답니다. 광주의 5.18묘지에는 아직도 신원 미상의 시체가 있어요. -----

김일성 부자가 광주사태가 끝난 이후에 우리나라에 파견됐던 북한 특수부대원 62명을 국가영웅으로 추대했다는 이 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들은 국군복장과 민간인의 옷을 나누어 입고 양쪽에 서로 총질을 해서 싸움을 붙이고 교란을 했다고 했어요. --- 오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눈이 어두어지면 양심도 어두어져요. 그러면 역사를 바르게 읽지 못하는 거예요. 사건울 바르게 보지를 못한다는 말이예요. 양심이 흐려지면 진리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이상이 이종윤 목사님께서 그날 설교하신 내용이다.

증언 5)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서 광주사태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으로 돌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직접 발언한데 의하면 광주무장폭동은 그 자체가 전쟁 이상의 성격이었다.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중요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군부가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공수부대들을 진압군으로 대거 투입하는 바람에 무장폭동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문제가 생각외로 불가능해 졌다. 남조선으로 드나들 수 있는 루트는 해상뿐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 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 :

또한 그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인 60,61,62저격 여단에서 상당수의 소부대들이 남조선에 파견되어 있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인솔한 사람은 대대장 이봉원이라고 까지 구체적으로 증언하였다. (필자 주 : 나는 여기서 약100여 명의 특수군이 파견됐으리라 예상해 본다.) 광주사건에 남파되었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비석은 강원도 김화(북한군 5군단 지역) 인근에 안치되어 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책임지고 남파되었던 대대장 이봉원은 광주사건 이후 북한으로 귀대하여 김일성으로부터 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일당백'이라는 별도의 칭호를 받았으며< 태천 군관학교> 소장으로 승진했다고 하였다. 한편, 또 다른 지휘관은 개성에서 잠수함으로 서해안(인천?)까지 와서 서울의 삼각산까지 도보로 6시간 20분 만에 침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광주사건에 참가하였던 '534와 신천복수여단' 등 부대들은 그때 당시에 북한군 특수부대들 중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고 능력이 신비할 정도로 인정받는 최정예 게릴라 부대이기도 하였다고 밝혔다. 본인의 생각이지만 한국군이 광주의 무장폭동을 조기에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방심하였더라면 광주사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남조선정권은 무너지고 국가는 전복되어 북한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증언 6)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 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것에 대해서 지시하였다. 또한 민간인 교도대와 노농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를 포함한 전체 예비역 군사무력은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여 해당 대상에 대한 경비를 철저히 하고 간첩 및 파괴암해 분자들의 책동에 적극적으로 대비할 것을 명령하였다. 바로 이틀 뒤인 5월 19일 아침 노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에는 드디어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이 학수고대하던 전 인민적인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였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의 무장폭동 첫 시작부터 얼굴을 가린 광주의 계엄군들이 부녀자들을 무참히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반복헤가면서 집중적으로 내보내었고 광주무장폭동이 남조선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의 대사변을 맞을 수 있는 기회라고 폭동 전 기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만일 그것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각종 무기가 등장할 이유가 없었고 방송국, 경찰소와 같은 국가기관을 습격하고 불태울 필요가 없으며 죄수들을 탈옥시키려고 교도소를 습격하는 무지막지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증언 7) 아래는 군단 조직부 지도원의 말이다.

"'북한전투원'은 북한의 명령에 따라서 처음에 광주시에 들어가서 대학생들의 시위만 지켜볼 뿐 며칠 동안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주동적으로 나서서 과격하게 이끌어 가면 단번에 정체가 노출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 이유라고 한다. 광주시내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뒤에서 조종을 하면서 광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작전을 수행하였고 광주가 해방된 다음부터 복면을 하고 주동적으로 개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국군의 장갑차와 중무기들을 노획하여 봉기군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무기와 각종장비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시가전에 맞게 주요전투들을 조직하였다고 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당사자 본인의 설명이었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능력적으로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릉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광주작전을 남조선정권과 군부가 조기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더라면 북한의 작전대로 전국적인 반란으로 확대돼서 국가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고, 만약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이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면 제2의 6.25동란이 재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은 광주작전에 참여했던 정찰부장의 말이다.

"5.18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남조선의 서울에서 작은 상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너무 먼 거리였고 남조선 언론 일체가 군사정권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고 있었지만 서울사람들 전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그 사건을 알게 된 것은 광주 시내가 시민군에 의해서 장악된 뒤였다.평양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광주항쟁이 수일 안에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확산될 것을 대비하여 서울에서도 철저히 준비하고 있으라는 지시였다. 그때 우리는 남조선정권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통일은 어떤방법으로든 멀지 않았다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적후에 오래 살면서 그때만큼 긍지를 가져 본적이 없었다."

김일성, 김정일은 물론 , 중앙당 통일 전선부의 고위층들을 비롯해서 영향력이 있는 간부들이 광주사태에 대해서 실패한 작전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은 조금도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다. 광주가 일본시대부터 반항정신의 발원지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 참작이 있었지만 김대중의 기반과 영향력이 그쪽지역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는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5.18광주사태는 철저하게 북한의 모략과 남한 내의 불순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국가전복을 위한 위험천만하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증언 8) 북한은 해방 이후부터 언제나 대남작전에 사용해 왔듯이 치밀하게 계산된 군사적 목적을 바탕으로 조작과 파괴 ,군중혼란과 혼선을 통한 이간질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세상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장치가 없는 젊은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돌격대로 내세워서 반정부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무장폭동의 방법으로 남한사회의 민주국가를 전복시키며 김대중을 위수로 하는 친북정권을 만드는데그 목적이 있다.

나의 외숙모는 15살에 당 기관에서 나온 두 명의 낯선 사람에게 훈련소로 끌려가 일본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전문적으로 일본말과 그들의 생활습성에 대해서만 교육받으면서 전문적인 일본담당 첩보원으로 길들여졌다. 훈련소에서 여성간첩 한 명을 키워내는 품은 남성 10명을 키워내는 것과 맞먹는 비용이 들어갈 정도로 그만큼 댓가가 크다고 하였다.

"오늘 아침에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 사죄드립니다. --생략--

며느리가 될 마화숙 동무(간첩 또는 광수?)는 우리 조국이 가장 사랑하는 전사이며 어버이 수령님의 충직한 딸입니다."

외숙모는 결혼하고 한 달만에 평양으로 올라가 1978년에 대성무역상사 일본지사에 편입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1981년 일본에서 귀국할 때까지 남조선에 일본인 신분으로 세 번 정도를 직접 다녀왔으며 조총련과 연계하여 남조선의 지하조직들에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증언 9) 현재 40대 이상의 북한사람들 90% 이상은 광주사태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큰아버지는 친구믜 사촌형이 복무하던 부대에서 보내온 것이라면서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꺼내 보이면서 남조선에 나가서 사망하고 돌아오지 못한 큰아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언제 한 번은 직장의 부기원 처녀가 당위원회 지도원의 팔목에 새겨져 있는 문신을 가리키면서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하고 다니는지 묻자 "전쟁이 일어나거나 전투 도중에 죽거나 혹은 남조선에 파견되어 나가서 싸우다가 사망하면 팔목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자기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네 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열두 명 중에도 두 명은 죽고 세 명은 지금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행방불명이라는 것이었다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이 사전에 정찰해 두었던 전라도 지역의 무기고 배치도에 근거해서 그들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시민군이라고 위장한 자들이 조직적으로 먼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사람도 그들(시민군)이 먼저 죽인 것이 천하가 알고 있늣 사실인데 국가반란인 광주의 무장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되는 것을 왜서 눈뜨고 보고만 있었는지 답답한 일이다.

증언 10) 내가 창고장에게 광주사건 때 남조선에 나갔다가 왔느냐고 묻자 그는 나를 보고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 해의 자기 생일을 예상치 않게 남조선에 나가서 쇠었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는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니는 수첩 만하게 생긴 새빨간 표지의 공화국영웅증서를 꺼내서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창고장은 북한에서 1970년대 말에 극비밀리에 조직한 특수부대인 당원사단 출신이었다. 그들 조는 1980년 3월 말경에 남조선으로 침투할 임무를 부여받고 한 달 정도의 가상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다음 1980년 4월 말경에 잠수함으로 남포항을 출발해 서해안(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시내로 침투하였다. 그의 일행은 총 12명이었다. 그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자폭훈련'이었다. 부득이한 경우에 적들에게 잡힐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라 하였다. 그들이 은신한 아지트는 2층으로 지어진 단독주택(빌라?) 지하방이었다. 그 집의 주인은 고정간첩이었다.

창고장 일행은 광주 인근지역에 있는 군수풍고장을 습격해서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을 탈취할 때 북한에서 파견되어 나간 알 만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적지 않게 보았으나 적후활동에서 지켜야 할 엄격한 준수사항이 있는 관계로 서로 침묵 속에 무언의 대화만 나누었다고 한다. 탈취한 장갑차는 특수부대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주었다.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불의의 기습을 받아 신의주출신 무남독자 외아들이 복부에 총상을 당했다.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목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 무남독자 외아들은 북한의 잔인한 '당과 수령'을 위해서 뼈 조각 하나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26살 젊은 나이에 남조선 땅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창고장 일행은 백령도로 건너가서 며칠 동안 잠복해 있다가 대남연락소 소속 잠수정에 의해서 남조선을 빠져나갔다고 하였다.

증언 11) 내가 살던 고향에는 내가 가장 친하게 '형'이라고 부르던 김형철(광수)이라고 불리는 이상친구 형이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1980년 5.18광주사건 때 남조선에 직접 내려왔던 사람이다. 그는 광주현장에 직접 참가해서 싸운 사람이 아니고 광주폭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 했던 북한의 의도에 따라 싸움이 한창일 때 지원작전을 위해서 도중에 파견되었던 사람이다. 광주에 들어갈 사람들은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광주에 투입됐다는 것이었다.

그들 23명 일행은 진압군과 시민군이 가장 치열하게 교전을 벌이던 날(5/21) 강원도 철원 쪽에서 땅굴로 내려왔다고하였다. 남쪽 갱도 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한 사람은 두 늙은 내외라고 하였다. 위치는 한밤중이라 알수 없었지만, 충남(?)의 주위가 한산한 농촌마을이었다 한다. 그들은 여러 개 조로 분산해서 전라북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일차 타격목표는 전라북도 지역에 있는 군사시설 및 정부기관들이라고 하였다. 임무 대상이 코앞에 있었지만 상부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도중에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 한다.

한 번은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나눠주는 과정에서 실수로 20대 중반의 여성에게 정체가 노출될 뻔한 위허만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 쌍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뭐하고 서 있니?"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그는 무기를 나눠주다 말고 그 여자의 뒤를 쫒아가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총으로 감쪽같이 죽여버렸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증언 12) 나의 소꿉시절 친구인 김영호의 아버지가 바로 광주봉기 때 그곳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전사해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았다.

광주의 폭도들이 도청과 교도소,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해서 무기와 장갑차를 탈취하고 군인들을 상대로 총을 쐈다면 이것은 오래 전 부터 남파 간첩들과 치밀한 계획하에 북한의 지령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고 밖에 볼 수없는 일이다.

김일성과 김대중이 짜고 친 고스톱에 의해서 역사에 '길이 빛날' 저주스럽고 가증스러운 광주봉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국, 변전소, 방소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 -김일성의 교시 중에서-

증언 13) "네가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 지금 네가 앉아 있는 자리가 그렇게 높아 보여?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한테 한 번 죽어볼래?" "야, 내가 왜 너한테 죽어야 되냐. 그깟 영웅이면 다냐? 조선에 영웅이 너 하나가 아니야. 나도 시켜주면 얼마든지 너 처럼 영웅이 돼" "이 새끼가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너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놈이로구나. 내가 바로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갔다가 괴뢰군 새끼들 죽이고온 사람이야. 집안구석에 틀어박혀서 밥 숟갈질이나 하던 것들이 뭘 얼마나 알아서 주둥아리 질이야?"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운 것에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

그 공화국영웅은 제대하기 전까지 남조선에 세 번씩이나 침투해서 작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는 그 사람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특수부대 전투원들이 참가했는데, 그 사람들은 광주인민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남조선에 침투되어 들어가서 사전 준비작업을 했었다고 했다. 그들은 임무가 서로 달랐는데 남조선인민들을 자극시켜서 봉기에 자각적으로 참가하게 하는 특수 교란작전이라고 했다. 즉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다.

공화국영웅의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전투현장에서 죽은 즉시로 남조선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증언 14)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떼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다.

북한에는 광주사태에 참가했다가 돌아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고, 제가 살던 곳에는 광주에서 죽고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영웅묘지가 있다. 현재 함경북도 청진시 천마산 마루에는 대남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전투영웅들의 묘지가 있다. 묘지 비문에는 '여기에 누워 있는 동지들은 1980년 5월, 남조선에 파견되어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산화하였다'는 식으로 내용이 적혀 있다.

노동지도원의 동생은 일본에서 제일교포 신분으로 남조선의 남쪽에 있는 지방대학에 유학생으로 위장침투해서 공부를 하면서 북한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증언 15) <3대혁명소조란?> 사상, 기술, 문화를 포함한 3대혁명의 구호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대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이 혁명부분에 대해서 완벽하게 숙지하고 준비된 인간으로 사회부문에 진출할 것에 대한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서 1970년대 초반부터 마련된 제도라 할 수 있다.

광주사건 때 비폭력시위가 무장폭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북한의 계획적인 수순 속에서 국가 전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었다.

증언 16) [광주사태에 등장했던 복면부대의 정체]

<이 '복면부대'는 18일과 19일의 시위, 특히 21일 시위대가 계엄군의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이 등장한 것은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른바 '광주공화국' 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이들 복면부대는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을 취한데다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과격한 언사를 거침없이 썼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주최하는 도청 앞 광장의 수습회의나 대책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총을 회수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김씨(수습대책위 부위원장 김종배/35)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납은 안 된다는 강경파들이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이들 강경파 거의가 복면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의 광주는 객관적으로 무정부의 상태였다. 이미 정부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엄격하게 '내란'의 상태였다.>

동아일보 여성동아부 차장대우 /김영택 기자

15. 그러나 가장 확실한 증거는 254명의 광수다.

오늘(11/15)까지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이 포착한 광수의 수가 254명이다. 그 중에는 군인광수가 90여명 되고, 民-官 엘리트 및 김일성가의 로열패밀리, 미술가 그룹이 160여명에 이른다. 또한 이들과는 별도로 제5그룹으로 형성된 10~20대 젊은 광수들 30여명이 현재 탈북하여 서울에서 다방면으로 진출해 활동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정치가도 있고, 교수도 있고, 방송 및 연예인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작금에 이와 같은 수많은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수장들과 국무위원, 국회의원, 안보관련수장들이 오로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직무유기'에 대하여 이 자리를 빌어 공개 고발하는 바이다.
2015-11-15 15: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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