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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 리을설, 남일 제거하며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앞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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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8 14:32:53  |   조회: 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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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시기의 '영웅'이 수수께끼의 죽음
"세습은 있을 수 없다"며 공개적으로 반대한 이후 의혹으로 가득한 '사고' 당해

김정일이 수중에 넣은 권력은 실무 레벨에서는 부친 김일성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권력 장악 과정을 옆에서 보아왔던 황장엽이 "김정일이 당 기구를 즉흥적으로 움직이게 되자 제멋대로의 정치를 비방하는 목소리가 높았다"라고 회고록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독단 및 전횡에 대한 불만이 조선노동당 내부에서 부각되었다.

그러한 반감에 대해서 김정일은 "비밀 경찰의 수를 늘리고 나를 중상하고 있는 의혹이 있다는 밀고를 받으면 용서없이 체포하여 처단하라"(황장엽의 기록)고 하며, 힘으로 밀어부쳤다. 그러한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였지만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간부가 있었다.

그 대표격이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남일과 부주석 김동규, 그리고 대남 공작 담당의 당 비서 유장식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전쟁 시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던 북한 정권의 중진이었던 남일은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북조선에서 봉건 왕조와 같이 세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김정일 후계체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를 표명했다.

<"적(敵)은 미남자"라고 한국 신문이 보도해>

과거에 소련이 파견하여 소련 국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 위에 북한 정권 내부에서도 인망이 두터웠던 남일은 간부의 생사 여탈권을 장악하고 있는 당 조직지도부장 김정일조차도 마음대로 배제할 수 없었다. (남일은) 김일성이 소련과 연계를 지닌 '소련파'를 숙청하는 가운데에서도 결코 손을 쓸 수 없었던 인물이다.

남일의 본명은 남정욱이다. 1913년 6월, 현재의 한국 남서부 지역인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출생했다. 초등학교까지 고향에서 지낸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소련군에 입대해서 독일에 대한 전쟁에 참가하여 대위로 승진했다. 스탈린이 1946년에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한반도 출신자의 1명으로서 북한에 돌아가 이듬해에는 소련군 대위의 신분으로 잠정 정부수립에 대해 협의하는 미소 공동위원회의 일원이 된다.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한국전쟁의 정전 회담에서 북한 측 수석대표를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1951년 7월 8일, 정전에 대해서 협의하는 예비회담에 등장한 남일의 모습이 국내외의 신문이 대서 특필했다.

인민군 대장의 직책으로 각이 잡혀 있는 군복을 입고 2개의 선으로 된 황금색의 자수가 깃들여진 바지와 흰백색의 부츠가 독특한 존재감을 자아냈다. 상아로 만든 파이프를 손에 들고 180cm 이상의 키를 자랑하는 듯이 총총 걸음으로 회담 장소에 나타났다. 부츠와 파이프는 김일성이 증정한 것으로 그 이후에 판명되었다. 직책은 인민군 총참모장이었다.

한국 신문이 "적의 수석대표는 미남자였다. 탄력이 있는 근육, 태양에 그을린 얼굴, 통찰력이 말해주는 눈,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이 굳게 다문 입이 인상적이었다."(<동아일보>, 7월 10일 자)라고 전했던 바와 같이, 한국 국민이 "적 진영의 영웅"이라고 규정했다. 남일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 7월까지 120회 이상이나 한국 신문에 등장한다. (남일의) 투박해보이면서도 강인한 교섭술에 유엔군 측이 크게 농락당했다.

<홍콩 신문이 "김일성이 살해"라고 의혹 보도해>

김일성은 남일의 재능을 높이 사려는 듯이 휴전협정 체결 이후 외국을 향한 얼굴마담 격인 외상(外相)에 발탁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돌아온 '연안파'와 '소련파' 숙청의 계기가 된 1956년의 종파 사건에서 숙청은 당하지 않았지만 1959년에 실권이 없는 부수상으로 좌천되었다. 1966년에는 철도상, 1972년에는 정무원의 6명의 부총리 가운데 1명으로 '격하'된다.

'신사'로 일컬어졌던 남일은 북한 정권 내부의 시시콜콜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김정일의 원한을 샀던 것은 김정일의 이복 동생으로 후계자 경쟁의 라이벌로 간주되었던 김평일을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군의 중진 오진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1970년대 후반까지 군 내부에서는 김정일과 적대했던 김성애의 아들에게 호감을 지닌 자가 적지 않았다.

기회를 포착하는 데에 민감했던 김정일은 후계 체제에 공개적으로 칼을 빼들었던 남일을 그냥 나둔다면 정권 중추에서도 반대 분위기가 만연하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중진의 배제를 결의한다.

남일의 '사고에 의한 사망'이 갑작스럽게 공표된 것은 그가 후계 체제에 반대를 표명한 이후인 1976년 3월의 일이다. 차량의 왕래가 거의 없는 대로에서 "승차한 벤츠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는 발표를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홍콩 신문 <사우스 모닝 포스트>는 "김일성, 남일을 살해"라고 예견하며 "김일성이 창문에서 던져버렸다", "차량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라는 모살 의혹을 전했다. 그렇지만 김정일의 이름에 대해 언급했던 보도는 없었다.

<시끄러워지면 당신도 나도 끝장이다>

남일의 사망에 대한 김정일의 관여를 엿 볼 수 있는 증언은 최근이 되어 부상하고 있다. 2000년대에 탈북한 전임 고위관료가 말한 '진상'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부총리의 직책에서 북한 서부의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남흥 청년화학공장의 지배인으로 좌천된 남일은 1976년 2월 김정일로부터 불려져 야간임에도 평양에 돌아오게 되었다. 승차한 관용 벤츠가 평양 근교의 순안 공항 부근을 통과했을 때 군용 트럭과 충돌하여 남일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사고 현장에 갔던 사회안전부 교통조사과 부과장의 보고를 읽어보았는데, 의혹 투성이였다"(북한의 전임 고위 관료의 발언).

사고를 일으킨 트럭은 '91'로 시작하는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 '91'은 김정일의 호위를 담당하는 호위 2국(당시) 소속의 차량만이 붙일 수 있는 번호이다. 사고 현장을 규제했던 호위 2국의 장교들은 질문하고자 하는 부과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용히 해라. 시끄러워지면 당신도 나도 끝장이다"

남일이 사라졌다고 해도 세습 체제에 반대했던 것은 그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남일이 사망한 해의 6월 초, 김일성이 주최한 당 중앙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동규가 김정일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김정일 동지가 당 사업을 시작한 이래 남쪽(한국)에 친척이 있는 자나 남쪽 출신자가 소외받고 있다. 당의 단결을 위해서는 계급 정책을 개선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도 지적했다. "김정일 동지는 노간부들에게 '노쇠했다'라는 딱지를 붙이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든 이후, 자신을 지지하는 청년 간부를 대거 임용하고 있다."

김정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간부 쇄신을 핵심을 찌르며 비판했던 것이다. "김정일 (후계)체제 만들기를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김정일 동지에 대한 추대는 인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갖고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항일 빨치산 출신의 김동규는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한쪽 팔을 잃었던 이른바 '영웅'이다. 또한 김일성과 다른 부주석 김일에 이어 제3의 실력자로 솔직한 성격 탓에 그를 정신적인 지주로 여기고 흠모하는 간부들도 많았다. 그만큼 '영웅'으로부터의 공개적인 비판은 김정일에게 있어서 더 이상 비할 바 없는 고통스러운 바가 되었다.

*李相哲 龍谷大教授 집필.
*일본 <산케이신문> (2015.7.28.)의 전문을 옮긴 것이다.

[관련 분석사항]

제62광수 리을설은 김일성의 호위 전담자였고 김일성이 김정일의 친모를 버리는 시점에서
김정일과 김경희의 대부(代父) 역할을 하였으므로 라이벌 김평일을 지지했던 오진우 등과는

정치적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으며, 스탈린이 직파한 우즈베키스탄과 연결된 남일과는
소련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으나, 리을설은 오진우-최광-리영호(제66광수)와 함께 동북 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젊은 시기를 함께 보냈으므로 남일과는 정치적 신뢰를 구축하기 보다는 남일을 비주류로
간주하였음은 물론, 김정일에 대한 비판 강화를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했을 여지가 높다.

즉 남일의 사망에는 리을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으며, 남일의 사망 시점이 1976년 2월
이었으므로. 그 이후 5.18 광주 대학살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여러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끝/
2015-08-28 14: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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